의로움으로 나라를 위해 일어난 사람들

호남의병 특별전


순천 호남호국기념관 호남의병 특별전

관람시간 : 3월-10월 9:30-18:00 / 11월-2월 9:30-17:00

휴관 :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 추석 당일

관람요금 : 무료

#호남호국기념관 #호남의병특별전 #순천전시회

얼마전에는 연향동에 위치한 호남호국기념관에서 '호남의병 특별전'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보았습니다.

호남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는 말처럼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이자 곳간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습니다. 호남인들은 나라의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호남호국기념관은 그 희생과 공헌을 널리 알리고, 미래 세대들이 기억할 수 있는 공간, 지역민들과 소통하고 호흡하는 살아있는 역사 공간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더 가까이 국가보훈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역사문화공간입니다.

호남호국 기념관 뒷편에는 무료 주차공간이 넓게 마련되어 있었고 주변 조경도 잘 되어있어 분홍빛 배롱나무 꽃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호남의병 특별 기획전은 2024년 5월 31일부터 2026년 5월 31일까지 2년동안 진행되며 호남호국기념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관람가능합니다.

호남호국기념관 구조

1층

다목적 강당, 파노라마 영상관, 기획전시실, 호국 보훈의 빛(추모공간)

2층

제1전시실, 제2전시실, 제3전시실

3층

체험관&북카페, 세미나실, 사무실

호남호국기념관 1층 로비에는 '호국보훈의 빛'이라는 조형물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호남의병 특별전을 관람하기 위해 1층 기획전시실로 향하였습니다.

전시는 1부. 호남의 연대 / 2부. 호남의 결의 / 3부. 호남의 투쟁 / 에필로그. 한계를 넘어 의병의 꿈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전시를 열며

호남 의병장 기우만은 '의병'의 정의를 전투에 참여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뒤에서 지원한 사람들까지 범주에 포함하여 규정하였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회생을 감내한 모든 이들의 역할을 가치있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의 활동은 일시적인 분노나 혈기에 의한 것이 아닌 의로움'을 바탕으로 한 '옳지 못한 것'에 대한 저항 의지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격동의 시기 분연하게 일어났던 호남 의병의 역사를 되새겨보며 의로움에 대한 가치와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부. 호남의 연대

1894년 일제는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조선을 군사적으로 장악하고자 청⋅일 전쟁을 도발하였습니다. 전쟁은 1895년 일제의 승리로 끝나고, 청일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삼국 간섭'으로 위기를 느낀 일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 내각으로 하여금 단발령까지 강행하게하자 민중들의 반감과 분노는 폭발하였습니다.

호남에서는 이름 높은 유학자였던 기우만이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나주 의병들과 연합 부대를 결성하고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고 합니다.

호남호국기념관에서는 기우만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그가 쓴 글과 나주 금성정의록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2부. 호남의 결의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까지 거머진 일제는 한국에 대한 침략을 더욱 노골적으로 가속화하였습니다.

일제가 광무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조약의 무효와 일제의 침략을 강력히 규탄하는 상소문이 전국 각지에서 쇄도하였습니다.

원로 대신이었던 최익현 역시 광무황제에게 상소를 올리고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백낙구, 양한규, 양회일 등도 의병의 기치를 올리며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최익현의 창의토적소 및 을사늑약문을 직접 관람할 수 있어 어린 자녀들에게 역사의식과 민족정신을 길러주기도 좋을 것 같습니다.

태인의병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에 대한 정보도 가시적으로 관람할 수 있어 유익하였습니다.

전남 담양 출신 의병장인 고광순이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정부의 단발령을 격렬하게 비판하며 올린 상소문입니다.

전시 중간중간 불원복 태극기에 소망을 적어보는 코너나 포토부스도 마련되어 있던 점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3부. 호남의 투쟁

1907년 일제에 의해 광무황제가 강제로 퇴위하고, 대한 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면서 항일 무장 투쟁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기우만의 장성 의병에 참여했던 기삼연은 1907년 호남의 의병 부대들을 규합하여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였습니다.

'호남창의회맹소'의 특징은 호남 지역의 여러 부대들의 연합으로 조직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상황에 따라 분진과 합진을 유연하게 구사하며 일제의 침략 기관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영광 법성포 전투 등에서는 일제가 쌓아 둔 세곡을 탈환하여 군량미를 확보하고 일부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한, 미곡 유출과 외래품 판매 금지 등을 선전하면서 의병 탄압에 앞장서는 자위단에 참여하지 말 것을 호소하고, 일본군을 상대로 항일전을 펼쳐나갔습니다.

호남창의회맹소의 기세가 나날이 높아지자 일제는 대규모 전담부대를 편성하여 의병들을 추격하였습니다.

1908년 의병장 기삼연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 부대를 정비하기 위해 의병들을 이끌고 담양의 금성산성으로 입성하였으나, 이미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기습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당시, 기삼연은 가까스로 적의 포위망을 빠져나왔지만 순창에서 은신하던 중 피체되어 사형 순국하게 되었습니다.

1908년 들어 호남 지역이 의병 항쟁의 최대 격전지로 떠오르자 1909년 일제는 대규모 군사작전을 개시하여 호남 의병을 탄압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심남일 안규홍, 전해산 등 의병장들을 비롯한 수많은 호남 의병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일제의 남한폭도대토벌 작전 보고서와 이에 대한 사진첩입니다. 이렇게 거센 탄압 속에서도 끝까지 나라를 위해 힘써주신 분들께 감사한 마음과 숙연함이 들었습니다.

끊임없이 투쟁한 호남인들

기삼연의 순국 이후에도 호남창의회맹소의 정신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호남인들은 일제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치열하게 항거하였으며, 1908년 말 이후부터는 전국의병을 대표할 정도로 의병항쟁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의병들의 수많은 희생과 헌신은 일제의 침략 정책을 지연시키고 민족의 주체의식을 고취시켜 향후 독립운동이 장기 지속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중후기 호남 의병장들의 주요 활동 지역입니다.

지도를 보면 호남 의병장들의 활동지는 전라도 곳곳에 분포되어 있는걸 알 수 있습니다.

에필로그. 한계를 넘어 의병의 꿈

우리 민족은 일제의 혹독한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을미의병의 정신은 을사의병으로 그리고 다시 정미의병으로 이어졌습니다.

일제는 호남의병을 탄압한 군인들에게 상을 내리고 사진첩까지 제작하며 스스로를 찬양하였지만, 의병들이 남긴 강인한 정신만큼은 결코 꺾을 수 없었습니다.

1908년 말 이후 의병항쟁의 최대, 최후의 격전지였던 호남의 의로움은 잠시 작은 불씨가 되었으나 열 번의 긴 겨울을 거쳐 마침내 1919년 3월 1일 봄, 온 겨레의 우렁찬 함성과 함께 붉은 화염을 강하게 내뿜는 횃불이 되어 다시 밝게 타오를 것입니다.


호남호국 기념관

호남호국 기념관에는 성인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호남의병 특별전'은 2026년 5월 31일까지 2년동안 진행되는 전시인 만큼 볼거리가 많았으며 현재 우리의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애써준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유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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