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시인 심훈이 직접 지은

당진 필경사와 상록수 소설

동혁이가 동네어구로 들어서자,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불그스럼하게

물들은 저녁 하늘을 배경 삼고,

언덕 위에 우뚝 우둑 서 있는 전나무와

소나무와 향나무들이었다.

회관이 낙성되던 날,

그 기쁨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회원들과 함께 파다 심은 상록수들이 키 돋움을 하며 동혁을 반기는 듯,

<오오, 너희들은 기나긴 겨울에 그 눈바람을 맞구두 싱싱하구나! 저렇게 싯푸르구나 ! >

동혁의 걸음은 차츰차츰 빨라진다.

(..... 중략 ......)

회관 근처까지 온 다가온 동혁은 누가 등 뒤에서

<엇 둘 ! 엇 둘 ! > 하고 구령을 불러주는 것처럼

다리를 쭉쭉 내 뻗었다.

상록수 그늘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었다.

소설 상록수 중에서 - 심훈(1901∼1936)

심훈은 35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나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소설가, 시인, 언론인, 영화배우, 영화감독, 각본가.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또한,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인물인 최용신도 농촌계몽운동을 하다가 25세에 단명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옛날 사람들은 매우 출중한 것 같습니다.

자신은 건국훈장 애국장에 서훈되었을 정도로 나라에서 인정받은 독립유공자이지만, 그의 일가에는 유독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많았습니다. 특히 그의 두 형인 심우섭(1890~1948), 심명섭(1898~?)은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이고, 첫 아내 전주 이씨 이해영(1900~?)의 남동생도 마찬가지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청풍군 이해승입니다.

주변 가족이 모두 친일파임에도 불구하고 항일운동을 하고 다양한 활동까지 했다는 것이 실로 놀랍습니다.

당시 심훈은 필경사를 지을 터를 잡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아끼던 상아로 된 담배 파이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 돌아다닌 곳을 되짚어 다니다가 찾은 곳이 지금의 자리입니다.

이곳에서 다시 담배를 피워 물고 찬찬히 둘러보니 길들일 만한 터라는 생각에 지은 집이 필경사입니다.

이곳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정열을 바쳐 문학에 몰두했던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필경사는 심훈이 설계하고 지었던 당시의 모습과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농촌계몽소설 '상록수'가 50일 만에 집필되었습니다.

심훈은 글 쓰는 속도가 빨랐다고 합니다. 특히 <직녀성>은 1달 만에, 상록수는 50일 만에 탈고했습니다.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사에서 창간 15주년을 기념하여 상금 500원(당시 소 한 마리 값 60원)을 걸고 조선 농어촌 문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장편소설 공모작입니다.

그 당시 언론에서는 농촌계몽운동가인 최용신의 죽음을 사회장으로 치르면서 장례식 모습과 업적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심훈은 직접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의 샘골에 세 차례 정도 방문하여 최용신과 관련된 내용들을 자세히 기록한 후, 이를 바탕으로 1935년 5월 4일부터 6월 26일까지 「상록수」를 이곳에서 집필합니다.

여주인공 '최용신'을 '채영신'으로 소설의 배경과 현장을 '한진포구'와 '부곡리'의 합성어인 '한곡리'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등장인물이나 명칭 또는 한진포구에서 배를 타고 청석골로 가는 상황 묘사 등을 실제와 비슷하게 그대로 글로 옮겨 사용한 것입니다.

위와 같이 남자 주인공 '박동혁'은 '심재영'이 아니라 송악읍 부곡리에서 먼저 야학을 진행했던 '박동선'이라는 사람이라는 논란도 있습니다.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 집은 앞으로 넓은 들이 펼쳐지고 북동쪽으로 서해 바다가 바라다 보입니다.

주변에 몇 채의 민가와 함께 자리 잡고 있는 이 집은 대문이나 부속채 없이 ‘ㅡ자형 단독 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집 뒤로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앞쪽에는 최근 상록수 문화관을 건립해 두었습니다.

필경사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초가집이어서 외관으로 보면 전통적인 초가집 모양을 하고 있으나 내부 평면은 1930년대 도시주택의 기능에 맞추어 생활에 편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전면을 바라보고 우측에서 2번째 칸을 현관으로 하고 현관을 들어서면 우측에 전후 2칸을 터서 큰 방을 만들고 이 방을 집필실로 사용하였습니다. 현관을 들어서면서 좌측으로는 횡으로 2칸 반을 터서 마루방을 두었습니다.

마루방 뒤편 한쪽은 안방이고 다른 한쪽은 현관 뒤쪽 한 칸과 합쳐 부엌으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2칸의 부엌 중 한 칸은 상부에 다락을 두고 안방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주택의 서측에는 앞뒤로 길게 반칸을 나누어 두 개의 화장실과 하나의 욕실을 배치하였는데 전면의 화장실은 외부에서 사용하도록 하고, 내부의 화장실과 욕실은 안방을 통해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욕실에는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 밑에서 불을 지필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주택 내부에 화장실과 욕실을 둔 평면구조는 일본식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화강석을 대충 다듬은 사괴석과 자연석을 혼용하여 한 단 높이로 기단을 만들고 초석 역시 사괴석을 사용하였습니다. 기둥은 방형 기둥을 쓰고 기둥머리는 보와 도리를 기둥에 ‘+’ 자로 끼우는 사 개 맞춤으로 자 올렸습니다 민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입니다.

우진각 지붕이어서 서까래는 부챗살 모양의 선자서까래로 배열되었습니다. 다만 모서리의 추녀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가 있습니다.

전면과 측면에는 유리창을 달아 전통적인 세살창을 단것보다 내부를 밝게 처리하였습니다. 밖에서 안으로 통하는 문을 각 방면에 두고 있는데 현관을 비롯하여 부엌, 안방, 그리고 사랑방에 각각 문을 두었습니다.

이 주택은 상록수의 작가 심훈 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는 점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설계는 당시 도시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면 형태 중에서 화장실과 욕실을 실내에 설치해 두는 형식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리창을 달아 내부를 밝게 처리함으로써 전통 주거의 실내와는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루방과 사랑방 외부에 작은 베란다를 설치하여 화분을 놓도록 배려한 것은 설계자의 섬세한 마음을 엿보는 듯합니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모습은 농촌마을 경관에 어울리게 한국의 전통적인 외관을 유지하려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필경사의 옥호는 상록수 집필에 앞서인 34년 11월에 쓴 고백 수기 '필경사 잡기'에서 나왔습니다.

1930년에 <그날이 오면>이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다가 일제의 검열에 걸려 못 냈는데, 그 시집 원고 중에 있는 필경이란 시의 제목에서 딴 것이라고 그의「필경사 잡기」란 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필경사란 글자 뜻은 단순히 생각하면 글 쓰는 일을 땅을 경작하는 것에 비유한 이름뿐만이 아니라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심훈의 주요 저서로 '상록수'와 그의 유고집으로 '그날이 오면' 이 1949년 발간되었습니다. 시와 소설 두 대표작 모두가 교과서에 실린 인물로 천재 시인 '이상'을 제외하면 교과서와 관련이 깊은 유일한 사람입니다.

거기에다가 심훈이 3.1 운동으로 복역하던 당시 어머니에게 썼던 편지가 중학교 1학년 국정 국어 교과서에 실린 적도 있으니, 교과서와는 인연이 깊은 작가입니다. 그리고 민족운동에도 공헌이 있고, 동시대의 거의 모든 작가들이 자발적, 혹은 타의에 의해 일제 가담에 연루되기 시작한 시기 이전에 사망하여, 교과서에 올리기에 적합한 인물입니다.

심훈 소설 '상록수'에서 확인되는 상록수 4종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소설 내에서도 나오는 것으로 현실적으로도 많이 보였던 나무들을 사전 답사를 통해 묘사한 것입니다.

심훈은 여자 주인공인 실제 인물 '최용신'이 강습소를 짓고 심었다는 상록수들을 보았습니다.

소나무와 전나무 그리고 향나무 등을 보았습니다. 심훈은 최용신의 활동 무대인 샘골을 세 번이나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변 많은 사람들로부터 강습소를 지은 아기이며 더불어 뜰 앞에 심은 나무들의 아기도 들었습니다.

듣고 본 상록수의 실체는 소설에서도 거의 유사하게 표현되어 현실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상록수와 의자를 놓은 조형물이 앞에 설치되어 그의 농촌계몽정신을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옆에 있는 상록수 문화관 앞마당은 고즈넉한 모습입니다.

상록수 문화관 앞마당의 `그날이 오면' 시비는 1996년 한국문인협회가 세운 것입니다. ​ 또 다른 시비는 심훈이 소설 상록수로 받은 상금으로 지원하여 설립한 상록학원이 오늘날 상록 초등학교가 되었는데 그 교정에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한다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이 시는 격정적인 표현으로 격렬한 정서, 절절한 호소, 강인한 의지, 비장감 치열한 저항성 등을 드러냅니다. 영국의 비평가 바우라(Bowra)는 그의 비평서 ‘시와 정치’에서 이 시를 세계 저항시의 한 본보기로 들며, “일본의 한국 통치는 가혹했으나, 그 민족의 시는 죽이지 못한 바 있다"라고 평했습니다.

문인이며 작가로서는 치밀하고 진지했던 심훈은 자신이 쓴 육필원고를 묶어 잘 정리해 놓았고 소중히 보관해 왔습니다. 현대문학사에서 이처럼 많은 육필원고를 남긴 작가가 드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심훈의 귀한 자료와 유품은 문학과 문화 관광의 귀한 자산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주변에는 심훈기념관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의 유물과 작품에 대한 것을 전시합니다.

심훈기념관과 박물관의 체험 프로그램도 여러 가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살펴보면 그의 작품관과 생애에 대한 자료와 설명을 볼 수 있으므로 일제강점기에 치열했던 과거를 회상하고 교훈을 얻기에 좋은 곳으로 함께 들러보시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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