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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일 전
곡성 역사 여행, 옥과 성황사 목조신상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한 지붕 세 가족 같은 만취정과 성황사 그리고 옥산사
옥과면 소재지 노인회관에 들어서면 만취정(晩翠亭)이라는 한옥 한채이 있습니다. 만취란 늦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푸르름이라는 의미와 함께 [나이가 들어서도 강직한 지조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답니다. 만취정 동쪽 단칸 맞배지붕 작은 건물이 성황사입니다. 그 옆 삼칸 맞배지붕 건물은 옥산사(玉山祠)입니다. 이 세 건물은 각각 다른 목적으로 지어졌으나 한 울타리 안에 서 있어서 한지붕 세 가족이나 할 수 있겠네요.^^
옥과 노인회 건물로 사용하는 만취정(晩翠亭)은 고색창연한 겉모습과 달리 그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옥산사(玉山祠)는 얼마 전에도 소개드린적 있는 옥과현 출신 문신이자 의병장인 월파 유팽로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이번 포스팅의 주인공 옥과 성황사는 만취정과 옥산사 사이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울타리 안에서는 가장 작은 건물이지만 유일하게 문화재가 보존된 곳입니다. 성황사 문을 열면 나무로 깎은 두 개의 신상이 있습니다. 전라남도 민속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목조신상입니다.
목조신상이 모셔진 옥과 성황사의 수난사
서 있는 모습의 남신상은 높이가 84cm입니다. 여신상은 앉아있는 모습으로 높이가 68㎝입니다. 이 두 개의 신상은 고려 말부터 서낭신으로 받들어지며 남도 지역 무당들의 조상 즉 '무조(巫祖)'였다고 합니다. 목조신상이 모셔진 성황사는 원래는 마을 동쪽 끝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건물이 워낙 오래되어 허물어질 위기에 처하자 현재 옥과 고등학교가 있는 곳으로 옮겨졌습니다. 학교가 세워지자 다시 마을 서쪽 끝에 있는 율사리로 이전했다가 1976년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고 하네요.
조선시대까지도 성황사는 신성시하며 정성을 다해 관리했습니다. 근대화 이후에는 미신이라는 굴레가 씌워져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지금 이렇게라도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안에 무슨 이야기가 담겨 있던, 또 어떤 신앙이 깃들어 있든 간에 수백 년 이상 신성시 여긴 건물이라면 그것이 갖는 문화적 가치는 왕릉이나 궁궐 또는 불상이나 탑에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 역시 우리나라 사람의 보편적인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단편 중 하나이니까요. 그렇다면 옥과 성황사의 목조신상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길래 정성을 다해서 지켜왔던 것일까요? 그 해답을 찾아서 시간 여행을 떠나보시죠.
옥과 성황사 목조신상의 역사
고려 시대부터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옥과 현감이 성황당 제사를 주관하고 집전했을 정도로 목조신상을 중요하게 모셨습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옥과현 아전과 한량, 광대, 기생으로 삼색계를 만들어 그들이 주도하여 제사를 모셨다는 군요. 제사는 매년 음력 삼월 삼짇날(3월 3일)에 열렸다고 해요. 성황당 앞 마당에 긴 서낭대를 세우고 오색 헝겊으로 장식된 여덟 가닥의 왼쪽으로 꼬은 새끼줄이 늘어져 있었다는군요. 전라도 각지에서 모여든 광대, 기생, 무녀들이 사흘 밤낮을 노래하고 춤추고 술을 마시면서 성대한 잔치판이 벌어졌습니다. 옥과현이 곡성군에 통합되기 전 1914년까지 제사가 이어졌습니다.
일제 강점기라서 그랬을 테지만 이후로는 더 이상 제례가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황당을 지금의 위치로 옮긴 이후 옥과 노인회에서 잘 관리를 해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현재 보존된 목조신상은 원형을 본뜬 복제품입니다. 안타깝게도 진품(아래 사진)은 도난을 당했는데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네요. 누가 훔쳐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돌려주세요.
그렇다면, 옥과에서는 왜 이 목조신상을 그토록 소중하게 모셨던 것일까요? 옥과 주민들이 성황당을 [조장군 사당]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고 하는데에 단서가 있습니다. 목조신상중 남신은 옥과현 출신으로 고려 중기 때 이름 날린 문신이면서 한림학사 칭호를 받을 만큼 대학자였던 조통선생 입니다. 여신은요? 전설에 따르면 조통선생을 찾아서 옥과현으로 내려온 아왕공주라고 합니다. 조통선생과 아왕공주사이에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야기는 조통선생이 활동했던 서기 1100년 고려 신종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통은 1143년 전라도 옥과현 입평면 양내에서 ( 현 곡성군 입면 약천리) 태어났습니다. 자는 '역락'으로 고려 신종 무렵에 활약한 학자이며 문신입니다. 당대에는 경서, 사서, 제자백가에 있어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일찌감치 과거에 합격했지만 거듭된 무신정변으로 무려 35년 동안 벼슬을 받지 못했어요. 초야에 묻혀 시를 읊으며 이인로·오세재·임춘·황보항·함순·이담지 등 당대 최고 문사들과 어울리며 진나라 고사에 나오는 죽림칠현을 본떠 강좌칠현을 자처하였습니다.
1196년경 고려의 실권자였던 최충헌에게 발탁되어 50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 '정언'의 관직을 받아 처음으로 벼슬살이를 합니다. 이후 고공낭중, 태자문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칩니다. [봉사 10조]를 입안하여 왕실 개혁에 앞장서고, 실권을 잡은 무신과 권력을 분점하며 별도로 세금을 거두어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등 백성들의 원성이 높은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을 등극시키는데 막후 역할을 한 인물로서 최충헌의 심복이라는 설도 있지만, 나라와 백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일관성 있는 행적이 돋보이는 것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기지를 발휘하여 오히려 관계를 돈독히 하고 돌아와 신종과 최충헌으로부터 더욱 신임을 받게 됩니다.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럴 때마다 안무사로 파견되어 성난 민심을 달래고 난을 진정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최고 학자에게만 부여하는 한림학사를 제수 받고 오늘날 서울대학교 총장에 해당하는 국자감 대사성을 지냈습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최당, 백광신 등과 해동기로회를 조직하고 원로로서 국정을 자문하다가 낙향하여 고향에서 여생을 마쳤습니다.
아왕공주가 실존 인물이었다면
최충헌이 조통을 그토록 신임했던 까닭은 유능한 일 처리뿐만 아니라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하층민들이 사는 동네에서도 초라한 작은 초가집에 기거했을 정도로 청렴했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만큼 반듯한 선비이며, 대학자이며, 유능한 관리였던 조통의 생애 어느 곳에서도 공주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왕 공주는 무녀들이 꾸며낸 가공인물에 불과할까요? 야사에 등장하는 조통에 대한 평판과 활동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혹시?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통선생은 키가 크고 아주 잘 생긴 미남이었습니다. 개경 거리를 지날 때면 여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고 야사는 전합니다. 아마도 연예인급 인기를 누렸던 것 같습니다.
당시는 금나라가 고려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때였습니다. 명종에서 신종으로 바뀐 배경을 설명하고 그것을 추인 받기 위한 사신 역할을 잘 수행하고 돌아온 조통을 위해 신종은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그 자리에서 태자를 가르치는 임무인 태자문학을 제수합니다. 당연히 왕실 깊은 곳까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겠지요. 만약 아왕공주가 실존 인물이라면 이때 만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 나이 많은 문신 조통은 변방이나 민란 현장을 골라 자청했을까.
고려사에는 신종의 두 공주에 대한 혼인 관계와 배우자, 자녀에 대해서까지 상세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왕공주는 가공인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혼인하지 못할 정도로 문제가 있는 공주나 왕자에 대해서는 기록에서 아예 빼버리는 일이 당시에는 당연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역사에 드러나지 않는 공주가 충분히 존재할 수 있겠지요.
전설에 따르면 조통선생이 아왕공주의 열렬한 구애를 피해 변방을 떠돌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조통은 당시에는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태자문학 같은 요직을 내려놓고 돌연 여진족과 충돌이 잦은 변방에 그것도 직급까지 낮춰서 파견을 나갑니다. 거기서 부상을 입고 잠시 개경으로 돌아왔다가 상처가 아물기 무섭게 다시 경상도 양산 현감으로 내려갑니다.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행보에는 뭔가 사연이 있어 보입니다. 최충헌은 한사코 조통을 개경으로 불러 드리는데, 또다시 민란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백성과 반군을 설득하는 안무사의 역할을 도맡습니다. 누가 등을 떠미는 것도 아닌데 심각한 부상까지 감수하며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일을 계속 하는 것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문신인데도 이런 활약을 펼치는 조통을 고려 백성들은 용감한 [조통장군]이라 부르며 추앙했지만 그 이유를 역사에서는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아왕공주는 실존인물인지도 모릅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조통에 대한 아왕공주의 짝사랑과 상사병은 전설이 아니라 사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다시 야사에 등장하는 공주의 행적을 따라가 봅니다. 공주는 조통을 잊지 못하고 혼인도 포기합니다. 마침내 큰 병을 얻어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서 비롯된 마음의 병이 그만큼 깊었던 것일까요? 벼르별 약을 써도 효험이 없자 아버지 신종은 신통력이 뛰어나다고 소문난 산중의 무녀에게 공주의 치료를 부탁했습니다. 공주는 다행히 무녀의 도움으로 생명은 건졌지만 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거기 남아 무녀의 제자가 되어 살아갑니다.
아버지 신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개경으로 돌아옵니다. 오빠 희종은 개경에 머물면서 함께 살기를 바라며 공주를 붙들었습니다. 그러나 조통이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고 곧장 말을 달려 조통을 찾아갑니다. 자신이 조통의 병을 치료해주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옥과현에 도착했을 때 조통은 이미 세상을 떠난 다음이라 묘소 앞에서 목놓아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주는 신분을 속이고 아예 옥과현에 눌러 앉아 신당을 차리고 아픈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무당이 되었습니다. 공주의 능력이 신통하다는 소문이 남도에 퍼지면서 무녀들이 몰려와 제자 되기를 청하면서 그들의 대모가 되었습니다.
역사의 인물 조통, 사후 행적은 미스터리
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고려 왕실이 주도하여 대대적인 장례를 치뤘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당들은 자신들의 대모 신분이 무당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물론 여기까지는 야사입니다. 고려 조정은 옥과 서낭당을 국행성황사 즉 나라에서 관리하는 서낭당으로 승격하고 제사를 위해서 무려 100여 두락의 토지를 하사합니다. 이 부분은 실제입니다. 공주가 조통을 그토록 연모했다는 애달픈 사연을 알게 된 전라도 무당들은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 저승에서라도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무 인형을 깎아 성황당에 모시고 제사를 올렸습니다. 이 부분도 실제입니다.
다만, 여신상이 조통선생 부인이라는 설이 있는데 얼핏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옥과 사람들이 그토록 존경하는 조통선생을 기리려면 유교적 전통에 따라 사당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낭당에 모신다는 논리는 전혀 타당하지 않습니다. 옥과현의 어느 무당을 추앙한 나머지 그런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설은 더욱 가당치 않습니다. 당시 하층민이었던 무당을 공주로 칭하며, 존경하는 조통선생의 상대역으로 신격화하여 관청이 앞장서서 제사를 모신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조통과 아왕공주사이에 얽힌 사연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8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을 보면 뭔가 드라마틱 하고 로맨틱한 사연이 있었던 것 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조통선생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고, 함께 활약했던 이인로 같은 문인들의 문집에도 그 행적이 무수히 등장하고 시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역사적 인물이 언제 타계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나라를 위해 그토록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인데도 작은 사당하나 없는 것 까지 모두가 미스터리 투성이 입니다. 부디 조통선생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져 이 모든 궁금증이 속시원하게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조통선생 관련 여행정보
■ 목조신상이 모셔진 성황사는 공개하지 않습니다.
취재. 학술 목적으로 관람을 원한다면 곡성군청 문화과에 문의하세요.
■ 조통선생의 고향 약천리에는 조통선생 관련 유적이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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