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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전
새로운 문화공간의 가능성 중산동 취락유적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눈부신 변화와 발전을 이룬 도시를 꼽자면 울산이 첫 번째가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 조용한 어촌마을이었던 울산이지만 지금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업도시가 되었으니 말이죠.
그래서 울산의 역사가 짧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이곳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좋았던 좋은 입지를 가졌던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국가유산인 반구대 암각화만 보아도 알 수 있죠. 지금처럼 안정적인 주거환경이 없었던 선사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이 살아가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바다와 맞닿아 있어 풍부한 어족자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은 식량이 충분하지 않았던 시대에 매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인접한 경주가 신라의 중심지였던 만큼 울산에도 한반도 고대와 관련된 유적지들이 다수 남아 있습니다.
북구 중산동에는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의 흔적, 중산동 취락유적이 있습니다.
울산광역시 북구 중산동 일원에 위치한 중산동 취락유적은 이화마을 안내석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이화천을 따라 조성된 데크길을 걷다 보면요. 한 교회 입구로 가는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별도의 중산동 취락유적을 소개하는 이정표가 없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중산동 취락유적을 소개하는 안내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중산동 취락유적은 쉽게 설명하면 과거에 마을이 있었던 흔적들이 발견된 곳입니다.
2002년 울산발전연구원에서 시굴조사를 진행하였는데 그 결과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이었던 주거지는 물론 각종 물품을 생산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업장과 마을 일대를 지키기 위한 방어시설 등이 대규모로 확인되었습니다.
인근의 달천철장에서 생산된 철은 울산 앞바다를 통해 중국, 왜 등에 수출되기도 했었죠.
철장과 머지않은 곳에 있는 중산동 취락유적은 당시 이 일대가 번화했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양쪽에 높은 산들이 솟아있는 골짜기인데다 삼국시대엔 신라의 중심지였던 경주와 울산의 바다 드나드는 중요한 길목이었습니다. 인근에 관문성이 위치한 것도 무관하지 않죠.
그리고 머지않은 곳에 고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산동 고분군이 있는데 아마도 이곳 중산동 취락유적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취락유적이 현생을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었다면 중산동 고분군은 과거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공간이었던 것이죠.
육안으로 확인되는 고분의 수는 적지만 1991년 최초 발굴 이후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의 수와 규모를 보았을 때 중산동 일원에는 꽤나 강력한 세력이 오랜 시간 터를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쪽 달천동에 위치한 달천철장은 이 일대의 대표적인 철 생산지였음을 생각해 보면 학술적인 자료로는 남아있지 않지만 바다에서 수확한 생산물과 철장에서 생산된 철, 그리고 경주에서 생산된 생산물을 중계하는 강력한 집단이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상상도 해보게 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중산동 일대에 대한 관심은 많지 않은 편이라 관련된 문화 콘텐츠의 개발이나 정비 사업은 거의 전무한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 경작지로 활용되어 왔기에 보상 문제는 물론 주변으로 다수의 주거지와 상업시설이 들어서 있어 활용방안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장기적인 계획을 통해 북구의 관문성, 기박산성 - 중산동 고분군 및 취락유적 - 달천철장으로 이어지는 고대 문화는 물론 4.19 혁명열사인 정임석 열사의 묘도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만큼 북구 지역 또 하나의 문화·관광 콘텐츠 권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해당 내용은 '울산광역시 블로그 기자단'의 원고로 울산광역시청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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