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인물탐구, 조선 역사상 가장 좋은 관운을 타고난 행운아, 충정공 마천목 장군
곡성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곡성에 묻힌 곡성 사람 마천목
고려 말 전라도 남서 해안은 왜구의 극심한 노략질로 인해 사람이 살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명문가 장흥 마씨 가문에서 태어난 마천목도 그것 때문에 부모님을 따라 외가인 곡성군 오지리로 이주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외가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의 후손인 평산신씨로 무장을 많이 배출한 집안입니다. 마천목도 그런 영향을 받아 문과가 아닌 무과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 과거에 급제한 마천목은 명장 정지 장군 휘하에 들어가 왜구를 물리치는데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왕조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뀐 후 정안군 이방원이 잠시 전라도 절제사를 맡았을 때 만난 인연으로 심복이 된 것으로 짐작합니다. 1. 2차 왕자의 난을 거치는 과정에서 출중한 지략과 용맹을 발휘하여 정안군이 권력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원만한 성격에 합리적인 인물이라서 조선 건국 이후 욕심을 부리다가 숙청을 당한 대부분 개국공신들과 달리 세종대까지 병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꾸준한 신임을 받으며 중용되었습니다.
마천목은 장흥 출신이지만, 곡성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고, 관직을 맡은 이후에도 어머니가 계신 곡성을 수시로 왕래했습니다.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여 말년을 보내다가 생을 마감한 곳 역시 곡성입니다. 실질적 곡성의 인물입니다. 고려와 조선의 왕조가 교체되는 격동의 시대 늘 역사가 일으키는 소용돌이 중심에 있었던 마천목의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마천목 (馬天牧 1358~1431)은
누구일까요?
조선의 무신으로 본관은 장흥, 호는 오천입니다. 정안군 이방원의 측근으로 1~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이방원이 왕권을 거머쥘 수 있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그 공로로 좌명공신에 녹훈되었습니다. 조선왕조가 건국한 이후 4명의 임금을 섬기며 병마절도사. 도총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특히 세종대왕 즉위 이후 군권을 안정시켜 왕이 치세에 전념케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할 때 무진(광주)에 있던 군영을 강진(병영성)으로 옮겨 남서해안에서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침략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시호는 충정이며 사후에 세종께서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하였고, 왕명으로 장례를 주관하였습니다. 충정묘, 영모제, 묘소로 이루어진 마천목 장군 묘역은 곡성군 석곡면 방송리에 있습니다. |
마천목은 왜 곡성에 왔을까요?
14세기 후반 한.중. 일 동아시아 국가들은 모두 극심한 혼란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틈을 타서 일본 열도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던 해적 집단 왜구는 일본 남부를 지배하는 막부와 결탁하여 엄청나게 세력을 키웠습니다. 수백 척의 군선과 3,000명의 기마부대를 갖춘 정규군 수준의 전력을 보유하고 우리나라 남서해안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였습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그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내륙으로 이주를 시키는 공도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어요.
마천목은 증조할아버지가 평장사( 부총리급)를 역임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고위 관직에 올랐던 명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장흥 모원촌으로 돌아와 학당을 열고 후진 양성에 힘썼습니다. 유력 가문이었던 마씨 일가는 회령산성 보수에 앞장서는 등 철저하게 대비한 덕분에 1350년 왜구가 침입했을 때는 백성과 관군이 힘을 합쳐 큰 피해 없이 물리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372년 무렵, 왜구가 또다시 장흥현에 쳐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공격 양상이 예전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수백 척의 군선에 나누어 타고 온 완벽한 군대 편재를 갖춘 기마부대한테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결국, 마천목의 부친 마영은 가족들을 처가인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로 피신을 시켰습니다. 그때 마천목의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습니다. 마천목 가족은 곡성현 오지리 역참 부근에 겨우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하고 궁핍한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고 설상가상 마천목 어머니 신 씨는 병을 얻게 됩니다.
도깨비살 전설의 주인공 효자 마천목
왜구의 침략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바람에 마천목은 고향 장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곡성에 눌러앉아야 했습니다. 마천목의 외가인 평산 신씨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의 후손으로 무예를 중시하는 가풍에 따라 무신을 많이 배출한 가문입니다. 덕분에 마천목도 글공부를 하는 틈틈이 무예를 익힐 수 있었습니다. 왜구가 점점 더 내륙 깊숙이 들어오는 바람에 곡성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었습니다. 곡성현이 보유한 소규모의 군사만으로는 맞서 싸울 수 없어 곡성 백성들은 향병을 조직하여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청년 마천목도 적극적으로 향병에 앞장섰을 것입니다.
마천목의 용기와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심은 곡성 땅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지극정성을 다해서 병든 어머니를 보살핀 감동스토리가 도깨비살 전설이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몸져누운 어머니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마천목은 물고기를 고아 드리면 어머니의 병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온종일 강에 나가 낚시를 드리웠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어요. 그때 한 어부가 물고기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지나가고 있었어요. 마천목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까요" " 여기는 물살이 센 곳이라 낚시로는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단다. 강에 돌을 쌓아 어살을 만들어야 하는데 너는 어림없는 일이야" 마천목은 궁금해서 어살이 있는 곳을 가보았어요. 어살이란 흐르는 강물 한가운데를 돌로 막고 나뭇가지로 촘촘하게 틈을 메워 거기 걸려드는 물고기를 잡는 방식입니다. 자신도 어살을 막아 물고기를 잡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맥이 쭉 빠져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데 강가에 푸른빛이 나는 돌멩이가 있어 신기하게 여기고 그걸 주워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 곤히 잠든 마천목은 밖에서 수선거리는 소리에 깨어 문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도깨비 수백 마리가 집 앞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가 마천목을 보더니 바짝 엎드렸습니다. " 왜 우리 집 앞에서 이런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장군께서 강가에서 주워온 푸른빛 나는 돌멩이를 돌려주세요. 그 돌이 바로 저희 두령입니다.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해드릴게요." 마천목은 어살을 떠올렸습니다. " 좋다. 요 앞 두계강(섬진강)에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어살을 막아다오. 그걸 약속하면 이 돌을 돌려주겠다." " 꼭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 마천목이 주머니에서 푸른빛 돌을 꺼내어 도깨비들한테 던지자 돌은 곧장 우람한 몸집의 도깨비로 변했습니다. "장군님 감사합니다. 날 새기 전까지 두계강에 어살을 만들어 놓겠습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아까부터 나를 장군이라 부르는 것이냐?" " 도깨비 두령이 말했습니다. "장차 나라에 큰 공을 세우는 장군이 되실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난 마천목은 간밤에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싶어 강에 나가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두계강을 가로질러 튼튼한 어살이 막아져 있었습니다. 덕분에 마천목은 어머니께 물고기를 잡아드릴 수 있었고, 머지않아 어머니도 병석에서 일어났습니다. 마천목 덕분에 마을 사람들도 물고기를 실컷 잡을 수 있었지요. 도깨비가 막아주었다는 그 어살 흔적이 지금까지 섬진강 두계리 구간에 남아 있습니다. |
정지 장군 부하로 왜구를 섬멸했던 마천목
마천목은 23세 때 응시한 무과 시험에 무난하게 급제하였습니다. 정 8품 산원 직책을 받아 당시 지용을 겸비하여 만인에게 존경받는 정지 장군 휘하에 배치되었습니다. 정지와 함께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일대에 출몰하는 왜구 섬멸 작전에 참전하여 무수한 전공을 올렸습니다. 정지 장군이 이끄는 부대는 이성계와 함께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합니다. 계속되는 폭우로 위화도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이성계와 조민수는 회군을 결정하고, 정지도 여기에 가담합니다. 요동정벌을 밀어붙인 우왕과 최영에 대한 반란이었습니다. 우왕과 최영은 급하게 군사를 동원해 이성계의 반란군을 진압하려 했으나 결국 이성계에게 제압을 당했지요. 정지도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성계. 정도전과 뜻을 같이하였습니다. 이성계가 우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왕위에 앉히자, 많은 반발이 있었습니다. 반대파를 잡아들이는 과정에서 정지의 이름이 등장하여 느닷없이 붙잡혀 귀양을 가게 됩니다. 무고함이 밝혀져 가까스로 풀려났다가 이성계의 의심을 사서 또다시 청주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홍수로 인해 감옥이 물에 잠기게 되자, 하늘의 뜻으로 여긴 이성계는 정지를 풀어주고 전라 절제사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지켜본 마천목을 비롯한 부하 장수들은 목숨을 다해 정지 장군을 지키고 신원을 회복하겠다고 다짐하며 곧장 개경으로 진군하여 이성계를 비롯한 무도한 무리들을 쓸어버리자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정지는 마천목과 휘하 장수들을 만류하였습니다. " 지금 칼을 뽑아봤자. 의로움도, 명예도, 가족도 지키지 못하고 목숨만 버릴 뿐이다" 마천목과 장수들은 병이 들어 점점 더 수척해가는 정지를 보면서 눈물만 삼킬 뿐이었습니다. 1391년 45세 아까운 나이로 천하의 명장 정지가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자신의 영웅이 그렇게 어이없이 떠나버리자 마천목은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실의에 찬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방원과 마천목의 운명적인 만남
1392년 이성계의 등극으로 조선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마천목의 나이는 서른한 살이었습니다. 정변을 계획하고 조선의 창업을 설계한 정도전은 동방에 이상 국가를 실현할 꿈에 부풀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왕자들과 개국 공신들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중 정안군 이방원은 경계대상 1호였습니다. 우선 왕자들을 각 지방에 뿔뿔이 흩어 놓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방원은 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전라도 절제사로 임명했습니다. 그가 통솔하게 될 전라도 방어군은 정지 장군의 죽음으로 인해 새로운 왕조에 대한 반감이 팽배한 터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이방원에게 위해를 가한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정도전도 그 점을 노린 것 같습니다. 이방원은 정면돌파하기로 선택하고 정지 장군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높고 부하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 마천목과 마주하였습니다. 자신은 정지 장군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정지 장군의 무고함을 알기에 구명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전라도 절제사로 원대 복귀할 수 있도록 도운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간곡하게 설명했습니다. 마천목은 결국 이방원의 진심을 믿기로 하였습니다. 전라도 방어군의 장수들과 병사들을 설득하여 이방원의 편에 서도록 했습니다.
이방원이 도성으로 복귀하면서 마천목도 데려갑니다. 이숙번을 비롯한 측근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역할을 마천목에게 맡겼습니다. 정도전 측에서 이방원의 움직임을 엄중하게 감시하는 상황이라,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은 마천목이 최고 적임자였습니다.
1. 2차 왕자의 난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공헌을 한 마천목
1398년 8월 이성계가 방원의 배다른 동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다른 왕자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때 왕자들에게 입궐하라는 어명이 있었습니다. 마천목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 이방원에게 아뢰었습니다. " 그냥 들어갔다가는 당하기에 십상입니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우리가 먼저 선수를 쳐야 합니다" 이방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숙번에게 군사를 이끌고 들어오라고 연통을 넣으시게" " 병력을 도성 안으로 들이기 위해서는 도성을 방어하는 이천수 장군의 협조가 절대적입니다. 이천수 장군과는 가깝게 지내는 사이이니 설득해 보겠습니다." " 맞는 말이네. 방번도 데려오게. 그 아이가 있어야 거사가 명분을 갖게 되네"
마천목은 도성 경비를 맡은 이천수를 설득했습니다. 완강하게 거절하던 이천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결국 협조하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이복동생 방번은 방원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이윽고 도성 외곽에 있던 이숙번 군대를 시작으로 이천수의 군대를 비롯하여 정안군을 따르는 이들이 이끄는 군대가 도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남은의 집에 숨어 있던 정도전을 죽이고 위세를 부리던 남은. 심효생. 박위. 유만생 등도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세자 방석도 귀양가는 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들의 반란에 손발이 묶인 이성계는 왕위를 둘째 방과에게 물려주고 함흥에 칩거했습니다.
이방원의 호위를 맡은 마천목은 이방간과 박포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그 실체를 파악하고 이방원에게 보고했습니다. "회안대군과 박포 장군이 뭔가 꾸미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리 조치하지 않으면 화가 될 것 같습니다." 이방원은 더 이상 형제끼리 피를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냥 지켜보라고 지시했어요. 마천목이 우려한 사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방간과 박포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천목은 급히 가병을 매복시키고 기다리다가 반란군과 맞섰습니다. 그 사이 궁궐을 지키던 군사들이 합세하여 반란군을 물리쳤습니다.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것을 계기로 정안대군의 입지는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세자로 책봉된 다음 정조가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남에 따라 1400년 12월 조선의 3대 왕으로 등극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을 세운 인물들에게는 좌명공신을 하사했습니다. 마천목은 3등 좌명공신을 하사받고 지위도 상장군으로 올랐습니다.
1405년 태종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습니다. 공신과 외척들은 다투어 큰 집을 짓는 등 사치를 일삼고 위세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태종은 조정 대신들과 백성들의 원성을 핑계 삼아 민무구를 비롯한 처가 식구들을 죽이고, 심복인 이숙번까지도 유배형에 처해졌습니다. 경거망동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킨 마천목은 더욱 중용되어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태종에게 가장 신임 받는 군부의 실력자로 떠올랐습니다.
전라도 절제사로 돌아와 병영성을 축조했습니다.
1409년 태종 9년, 마천목에게 예기치 않았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부패 혐의가 있는 전리 고을귀를 감순청으로 잡아 와 문초하는 과정에서 그가 돌연 죽어버린 것입니다. 감순청 수장인 마천목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는 사헌부의 상소가 빗발쳤습니다. 임금은 고을귀가 죽게 된 것은 공무를 수행하던 중에 의도하지 않게 일어난 사고라며 상소를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사헌부도 계속 물고 늘어졌습니다. 마천목이 임금께 나아가 아뢰었습니다. " 전하, 신이 일부러 죽이지 않았고 죄를 묻는 도중 불의에 일어난 사건이라 하나 신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사헌부의 상소 또한 지당합니다. 그러니 조정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신한테 죄를 물으십시오." 고민하던 임금이 다시 마천목을 불렀습니다. " 생각해 보니 경은 지금까지 단 하루도 편히 쉰 적이 없었던 것 같네. 그러니 고향 곡성으로 내려가 어머님을 봉양하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도록 하라" 마천목은 곡성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마천목의 나이도 어느덧 52세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곡성 유배형을 받은 지 불과 한 달 조금 더 지났을 뿐인데, 전라도 절제사로 임명됩니다. 아울러 이숙번을 중군으로 하고, 마천목을 비롯한 아홉 명의 장수가 나누어서 군정을 맡게 되는 실질적인 조선군 수뇌부 지위가 주어졌습니다. 갑자기 도성으로 올라오라는 어명을 받고 서둘러 입궐하여 임금을 알현했습니다. 임금은 오랜만에 만난 마천목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경이 도성에 있어야 내가 좀 안심이 되는데 전라도 절제사로 임명한 것은 어머니께 효도할 기회를 준 것이다. 경이 전라도 방어군 말단 군관을 시작으로 절제사까지 올랐으니 그것도 의미가 있지 않으냐" 마천목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 신에게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임금은 마천목에게 옷 한 벌과 활과 화살을 하사했습니다. 그것은 최고로 신임한다는 표시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왜구의 침략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왜구와 결탁한 토적 세력까지 발호하여 마천목이 직접 병사를 이끌고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여 일망타진하였습니다. 귀천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무장을 선발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늘 구상해 왔던 바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전라도 시위군에게 주어진 가장 큰 역할은 왜구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고 격퇴하는 일인데 병영이 해안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진주(광주)에 있는 전라도 시위군의 지휘부를 강진으로 옮기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하여 곧장 축성공사를 착수했습니다. 1417년 병영성이 늠름한 모습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마천목은 참으로 감개무량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에 걸쳐 왜구를 막기 위한 숙원 사업을 비로소 완수한 것입니다.
1418년 병영성 축성을 마친 이듬해 궁궐 방어를 총괄하는 요직인 내시위절제를 임명받고 도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임금이 막 부임한 마천목을 불렀습니다. "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을 굳혔네. 그리고 더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고, 세자 책봉 후 곧장 왕위를 충녕한테 물려주려 하네. 장흥군께서는 짐이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짐의 자식 대에서는 골육상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일세. 그것이 경에게 대궐의 군권을 맡긴 이유이네" 큰 충격을 받은 마천목이 간곡하게 아뢰었습니다. " 전하 외람되오나 주상전하께서는 강녕하시고 충녕대군은 춘추 미령하시거늘 선위를 하겠다는 말씀은 거두어 주소서." "그대의 충정을 왜 모르겠는가. 오랜 벗에게 짐의 깊은 생각을 말했을 뿐 이 문제로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으니 장흥군께서는 헤아려 주시게."
조선을 지키는 창칼과 방패가 되어 세자가 성군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주시게.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태종의 구상대로 그해 6월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곧장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당연히 조정의 여론을 들끓었습니다. 임금이 마천목을 불렀습니다. " 짐은 그동안 형제까지 죽여가면서 조선을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 안간힘을 써 왔네. 하지만 아직도 무수한 적들이 조선을 위협하고 있네. 경은 세자가 왕위에 오르더라도 짐한테 했던 것과 똑같이 방패가 돼주고 창칼이 되어 세자가 성군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지켜주시게" 마천목은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신은 오직 주상전하께서 천년만년 사직을 지켜주시기를 천지신명께 빌 따름입니다. 태양과 달이 변함이 없듯 소신의 충심은 죽어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성심을 굳건히 하소서 "
마침내 충녕이 왕위에 오르고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마천목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할 따름이었다. 세종은 즉위와 함께 마천목을 가장 근거리에서 보위하는 오늘날 경호실장 직책인 우금위 절제사로 임명했습니다. 위태로운 정권교체기에 가장 신뢰하는 마천목에게 자신의 안위를 맡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조선의 군권을 총괄하는 병조 판서로 승진하여 무장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세종 3년 사신을 이끌고 명나라에 가서 세종 즉위에 대한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왔습니다. 이때 마천목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태상왕 정종이 연회를 베풀었는데 상왕 태종과 주상인 세종까지 세 사람의 왕이 참석하는 조선왕조에 유례가 없었던 진귀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1422년,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했고, 이끌어 주었던 태종이 승하하였습니다.
세종이 마천목을 불렀습니다. " 소신은 주상전하까지 네 분의 임금을 모셨고, 특히 승하하신 태종께서 어여삐 여겨 평생 고락을 함께하였으니 하늘과 같은 성은에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노신 이제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에 내려가 연로하신 모친 봉양에 힘쓰고자 하오니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 무슨 말씀이세요. 장흥군! 조정에는 경보다 더 나이 드신 대신도 여럿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장흥군은 짐에게는 든든한 기둥이신데, 선왕께서 승하하시고 안 그래도 대궐이 허전한데 장흥군까지 떠나시면 어떡합니까. 모친께서 위독하시다니 가보셔야겠지만 그래도 자주 오셔서 짐에게 언덕이 되어 주세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마천목은 1423년, 66세의 나이에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 곡성으로 내려왔습니다. 덕분에 어머니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곡성의 산천을 거닐며 여유 자적한 시간을 보냈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한양에 가 있었습니다. 북쪽 변방은 여전히 불안했고 도성에는 반역의 칼날을 숨긴 자들이 눈을 번득이고 있었어요. 부하들에게 주상전하를 결사옹위하고, 요주의 인물들을 감시하라고 일러 두었지만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이따금 도성으로 올라가 정세를 살피고 임금을 알현했습니다. 임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칼과 방패가 되어 주는 마천목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고 믿음직스러웠습니다. 즉위한 지 11년째가 되면서 왕권이 공고해지고 임금이 갈수록 눈부신 치세를 펼치는 것을 보면서 마천목은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왕은 도성에 잠시 머물고 있는 마천목을 궁으로 불러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왕족에 버금가는 작호인 [장흥부원군]을 하사했습니다. "주상전하의 선정에 백성들의 칭송은 하늘에 드높고, 나라의 방비도 튼튼해졌으니 이 늙은 신하는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이제부터 고향에서 다리 쭉 펴고 살려 합니다" 임금께 큰 절을 올리고 고향 곡성으로 내려왔습니다.
보기 드문 관운을 타고난 행운아 마천목의 비결은 인덕과 일관성 있는 의리
마천목이 곡성에서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는 동안, 세종은 수시로 의복과 선물을 어의와 함께 보내 마천목의 건강을 살피고 위로했습니다. 1431년 2월 1일, 74세의 나이로 사랑하는 땅 곡성에서 고이 잠들었습니다. 세종은 마치 어버이를 잃은 것과 같은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조정의 조회를 사흘간 폐하면서 애도 기간을 가졌습니다. 마천목에 대한 장례절차와 묘소를 마련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조정에서 직접 주관하였습니다. 평범한 군관으로 출발하여 군부의 최고 지위에 오르고 태종과 세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다가 하늘이 준 나이를 누리고 영면에든 마천목은 대단한 관운을 타고난 행운아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전 생애에 걸쳐 인덕을 쌓고 눈앞에 주어진 이익보다는 의를 중시하며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선왕조 실록에도 등장하는 마천목의 곡성사랑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 교체기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난무했던 시대에 마천목은 태종과 세종의 대단한 신임을 받으며 존경받는 무장으로서 생을 마친 행운아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절대 남용하지 않고, 또 자신을 앞장 세우는 대신 충성으로 일관된 삶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명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마천목의 이러한 삶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마천목을 검색하면, '모친'과 '곡성'이라는 키워드가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대단한 효자였고 고향 곡성을 지극히 사랑한 인물임을 입증해 주는 내용입니다.
* 마천목 장군 일대기는 곡성군이 펴낸 역사소설 [ 변방곡성 세상을 바꾸다 ]를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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