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역사 탐방 덕포진 돈대터 포대 파수청 손돌목까지

​덕포진 포대는 사적 292호로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106번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소를 찍고 내비를 따라 넓은 주차장에 이르니, 평일이라 주차장이 정말 한산했어요.

​입구에는 덕포진과 김포시 곳곳의 관광 안내도가 자세하게 있어서 쉽게 찾아갈 수 있어요.

​위쪽으로 조금만 오르면 덕포진 전시관이 있지만, 지금은 운영을 안 하고 있습니다.

덕포진 전시관 뒤쪽으로는 야외 공연장도 있습니다.

이곳은 야외 학습장이라는데, 오늘은 학습 예약이 없는 날인지 한산했습니다.

​언덕에는 전에 없던 한옥 건물이 들어서 있어요. 건물 주위를 돌아보니 아무런 안내 표지판이 없고 조용한 걸 보니 무슨 용도인가 궁금하기도 했어요.

​이곳에서 바라보니 뒤쪽으로도 한옥이 지어서 있고, 옆에는 또 다른 한옥을 짓고 있는 중이더라고요.

​덕포진 포대 안내도를 따라가 봅니다.

​오솔길이 예쁘고 한적해서, 요즘 같은 날씨에 역사 탐방길 걷기에도 아주 좋았습니다.

​바로 아래에 덕포진 포대가 바로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보이는 곳에서 바라보니, 포대를 위치했던 곳이 위에서는 잘 안 보여 아래로 내려가 보았어요.

​덕포진 포대는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마주하는 이곳은 가포대 각각의 포대입니다.

​각기 살짝씩 다른 모습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구역이 나누어진 포구입니다.

​가포대는 총 7개의 포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강화 초지진과 덕진진의 남장포대를 향하고 있어요. 1980년 발굴 조사 당시 중포 2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중 1문은 고정식 포가 걸려있는 채로 발굴되었답니다.

각 포에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포의 무게, 화약의 용량과 함께 고종 11년(1874년 5월)에 운현궁에서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시 길을 따라 앞으로 쭉 따라가니, 덕포진 나포대가 보입니다.

나포대는 총 5개의 포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강화 초지진과 덕진진의 남장포대를 향하고 있어요. 1980년 발굴조사 당시 5번째 포대에서 고종 11년에 만들어진 소포 2문과 중포 1문이 함께 묻혀 있는 채로 출토되었답니다.

​나포대 역시 가포대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어요.

마지막인 포대는 다포대로 이곳은 총 3개의 포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강화 덕진진의 남장포대를 향하고 있어요.

다포대는(가, 나)와 다르게 지붕이 기와로 되어있는데 발굴 당시 이곳에서 발견된 기와에 근거한 것이라고 합니다.

1980년 발굴조사 당시 고종 11년에 만들어진 중포 1문이 고정식 포가 걸려있는 채로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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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을 따라 파수청과 손돌묘, 돈대터까지 가보려고 해요.

​파수청은 덕포진의 핵심적인 군사시설로, 1980년 발굴 조사에서 건물 터로 확인되었습니다.

발굴 직후에는 지붕 형태의 보호각을 쒸워 전시하다가 보호각이 노후화하면서 유구 보존을 위하여 2016년에 매장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2023년에 추가 발골 조사 등 고증을 거쳐 2024년에 복원하였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화방벽으로 구성되어 있으면, 건물 가운데는 화덕이 있답니다.

첫 건물 터 발굴 조사에서 조선 후기의 상평통보, 산탄, 철환, 기와편 등의 유물을 확인하였으며, 추가 발굴 조사에서 철환와 기와편 등을 추가로 확인되었답니다.

발견된 유구(화덕)와 유물 (상평통보, 산탄)이나 포대와 돈대(해안가에 설치된 방어시설) 중간에 있는 점으로 보아 포에 쓸 불씨를 보관하던 장소인 동시에 포병을 지휘하던 장대(장수가 지휘하던 군사시설)의 기능도 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답니다.

고문서인 통진부읍지(1871)에는 파수청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지도인 통전부지도(1872)와 강화부전도(1872)에는 각각 포청, 포사청으로 표시되어 있답니다.

몇 해 전에 왔을 때는 터만 주춧돌로 세어 놓았더니 이제 완공이 되었더라고요.

​덕포진 손돌 묘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에 위치한 고려 시대의 뱃사공 손돌의 무덤이랍니다.

손돌 묘를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으로 보이는 곳이 손돌목이랍니다. 손돌목은 안면도, 염창동과 함께 난파 위험지역으로 꼽히며, 물살이 빠른 곳이랍니다. 태조4년(1395)에 조운선 16척, 태종3년(1403) 30척, 태종14년(1414) 60척이 침몰한 기록이 있답니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시대 몽고군이 침입하여 왕이 강화도로 피난을 갈 때 이 지역의 물길을 잘 알던 뱃사공 손돌의 안내로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세찬 물살에 배가 심하게 요동 치자 왕은 손돌이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목을 베라 명령하였다 합니다.

손돌은 죽음에 직면하면서도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일러준 뒤 참수되었답니다.

바가지를 따라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한 왕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충직한 손돌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후히 장사를 지내 주었다 합니다.

그때부터 이 좁은 물길의 이름을 '손돌목' 이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해마다 손돌의 기일인 10월 20일에 불어오는 추운 바람을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한이 서린 바람이라 하여 '손돌이 바람' 이라 부르고 이때의 추위를 '손돌이 추위' 라 부른답니다.

원래 이곳에는 손돌을 모시던 사당이 있어 제를 올렸으나 일제강점기에 사당이 헐리고 제사도 중단되었답니다. 그 후 1970년 주민들이 손돌 묘를 세우고 다시 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답니다.

1989년부터는 김포문화원의 주관으로 손돌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에 진혼제를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은 덕포진에 속한 돈대터로, 돈대는 적의 침입을 경계하고 방어하기 위해 평지보다 높은 평평한 곳에 보루를 만들고 화포를 비치한 소규모 방어시설물이라고 합니다.

시기는 선조 대(제위 1567~1608)로 추정, 덕포진의 위치는 서해에서 강화만을 거쳐 수도 한성(오늘날의 서울)을 침공하려는 외적을 방어할 수 있는 전력적 요충지랍니다.

또한, 병인양요(1866) 때는 프랑스 함대, 신미양요(1871) 때는 미국 함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이기도 합니다.

1980년 발굴 조사 당시 이곳에서 돈대를 위한 시설의 하부 구조가 확인되었으나, 돈대의 설치 시기는 알 수 없다고 해요.

이곳은 해안 쪽으로 돌출된 지형이어서 강화 해협을 사이에 두고 강화 적진진 남장포대, 광성보 용두 돈대와 삼각을 이루는 중요한 지점이랍니다.

​바로 앞에 나무 위로 잡초가 우거져 안 보이지만, 당시는 덕포진 돈대가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해안 쪽으로 돌출되어 강화의 주요 관방 시설물들이 한눈에 조망되는 중요한 지점이랍니다.

​강화 해협을 사이에 두고 왼편으로는 강화의 초지진이 보이며 강화의 덕진진 남장포대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멀리 장족산과 마니산도 보입니다.

이처럼 외적의 침공을 막기 위한 격전지로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한 김포의 곳곳에는 크고 작은 아픈 흔적들이 많은 곳이랍니다. 선조들의 크나큰 희생으로 지켜온 이 땅 이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하루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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