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좋은 후장마을!

김제여행 가볼 만한 곳으로 살기 좋은 후장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장화동은 1,450년경 당시 성균관 진사였던 돈화 정임이 낙향해 살면서 마을 이름을 장화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장화 또는 꽃잔이라고도 하였으며 장화동이 커지면서 전장(전장화)과 후장(후장화)으로 나누어졌다고 해요.

후장 마을은 효자와 열녀가 많은 마을로 알려져 있어요. 효자와 열녀가 많아 광주 이씨 열녀정문, 김제 조씨 열녀정문, 정지형 효자 정문, 정윤교 효자 정문 등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효녀가수로 잘 알려진 가수 현숙은 이 고장 출신으로 전국에 어르신 목욕차 보급과 장학금 기탁 등 선행에 앞장서고 있어요.

국가보훈부 지정 현충시설 '정화암 생가'

김제여행 후장마을에는 정화암 생가가 있습니다.

화암 정현섭 선생은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흑색공포단, 상하이해방연맹 등 아나키즘 단체들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고 합니다.

정화암 생가는 국가보훈부 지정 현충시설입니다.

이곳은 3.1운동에 참여하고 국외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정화암 선생의 생가입니다.

1896년 김제에서 출생한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1920년 미국 의회 사절단이 내한했을 때, 일본의 침략상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 경찰의 추격을 받아 1921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였다고 해요.

망명 이후 이희영, 신채호 등과 교류하며 무력투쟁을 통한 광복 쟁취를 위해 폭탄 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 확보 방안을 강구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1928년 재중국 조선 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1931년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본 공사관에 폭탄 투척 등 무력 항쟁을 지속했다고 해요.

1933년 이강훈, 백정기 등과 함께 상해 해방 연맹을 결성하고, 1936년 남화 연맹의 기관지인 남화 통신을 발간하기도 하였다고 해요.

이후 임시정부의 시책에 협조하여 1940년부터 상해 방면에서 활동하며 광복군의 현지 책임자로 미. 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하여 보고하는 등 정화 활동에 기여하였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2013년 선생의 생가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고 합니다.

특별한 뒤주, 초대형 장화리 쌀뒤주!

김제여행을 떠나서 가 본 후장마을에는 특별한 뒤주가 있습니다. 초대형 쌀뒤주 장화리 쌀 뒤주가 있어요.

조부 때부터 십만석꾼인 정준섭은 매일 찾아오는 수백 명의 과객이나 식객을 위해 안마당에 70가마 분량의 쌀이 들어가는 초대형 쌀뒤주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흉년이 들면 쌀뒤주에 보관된 쌀을 풀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었다는 선행이 전해지고 있어요.

나무로 만든 사각형 뒤주는 높이 1.8m, 너비 2.1m이며, 일반 건물처럼 위에는 초가지붕을 얹고 아래에는 주춧돌을 놓았다고 합니다. 진짜 상당히 큰 뒤주입니다.


찾아오시는 길↘↘↘

정화암 생가, 초대형 쌀뒤주 장화리 쌀 뒤주가 있는 후장 마을! 김제여행을 계획하신다면 한 번 방문해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사진·글 ⓒ 2024. 김제시 SNS 서포터즈, 윤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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