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경상남도 온라인 홍보 명예기자단 최홍대


경남 함양에 자리한 논개의 묘를 보고 아니 이제 주논개의 모든 흔적을 모두 다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경상남도 진주에 글을 쓸 때 촉석루 아래에서 바위에 새겨진 의암을 보았으며 의암 주논개의 삶을 본질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논개는 관기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냥 몰락한 양반의 처자였는지는 분분합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어우야담에서도 논개의 이야기는 처첩, 노비, 창기에서 다뤄지지 않고 인륜 편에 실려 있다고 합니다.

그다음으로 논개의 흔적은 만나보게 된 것은 전라북도 장수에 있는 논개사당과 논개 생가지였습니다. 의암사(논개사당)는 1954년 장수군내 각계각층에서 성금을 모아 남산공원의 아래봉우리 꼭대기에 창건하였고, 초기 논개 영정은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이 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경상남도 함양군의 서상이라는 지역은 논개와 그의 남편이었으며 의병장이었던 최경희의 묘를 찾기 위해 방문해 보았습니다.

경상남도 서상면이라는 지역은 남덕유산이 자리한 곳에 있으며 백두대간이 잠시 쉬어간다는 육십령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이 고개를 넘으려면 60명 이상이 무리 지어야 도둑떼를 피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논개묘를 방문하기 전에 서상면의 다목적센터 및 다양한 편의시설을 방문해 보아도 좋습니다. 위쪽의 전라북도와 경상남도를 가르는 곳에 있어서 논개의 삶과도 연관이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논개의 부친은 주달문이라는 사람이었으며 오빠는 요절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1578년 부친 주달문의 별세 후 숙부 주달무에 집에 의탁되었으나, 숙부가 벼 50석에 김부호(金富豪)의 집에 민며느리로 혼인시키려 하니 이를 피해 모녀는 경상도 안의현(현재의 경상남도 함양군)의 친가에서 피신했었다고 합니다.

부호는 쌀까지 주고 그녀를 샀는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도망치자 모녀를 기소하여 구금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장수군에 있던 장수현감 충의공 최경회(崔慶會)의 명판결로 모녀를 석방시키고 모녀는 현감의 관저에 의탁하게 되고 후일에 최경회가 성년이 된 논개를 후처로 맞아들이는 인연을 맺게 됩니다. 1574년에 태어났으니 그녀가 결혼할만한 나이가 된 1592년은 안타깝게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습니다.

이곳은 경상남도 함양군의 논개묘가 자리한 곳이입니다. 논개의 묘 앞에는 논개 사당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앞서 장수군은 1968년부터는 이날을 장수군민의 날로 지정하고, 군민의 날 행사와 겸하여 대제(大祭)를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주논개의 묘와 남편이었던 의병장 최경회의 묘를 보기 위해 걸어서 올라가 봅니다. 의병장 최경회는 논개의 보필을 받으면서 의병도 모집하고 진주성으로 가게 됩니다. 1593년에 최경회가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동행하였으나,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논개는 일본군들이 진주 촉석루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을 때 왜장 기다 마고베(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하여 진주 남강 진주 의암에 기다 마고베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殉節)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논개의 묘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지리산과 덕유산이 이어지는 곳에 자리한 이곳은 풍광이 좋은 곳입니다. 최경회와 논개가 죽고 난 다음 해인 1594년 어우야담을 쓴 유몽인이 삼도순어안사가 되어 하삼도의 피해상황을 살피다가 주논개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쓴 어우야담에서 아래처럼 적었습니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계사년에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군사들은 패배하였고 백성들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몸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위에 서 있었는데 바위 아래는 깊은 강물이었다. 왜적들이 이를 바라보고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했는데 오직 왜장 하나가 당당하게 앞으로 나왔다. 논개는 미소를 띠고 이를 맞이하니 왜장이 그녀를 꾀어내려 하였는데 논개는 드디어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함께 뛰어들어 별세하셨다."

19년이라는 삶은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그래도 일찍 최경회의 도움으로 현감의 관저에 머물 수 있었기에 어머니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까지는 가지 못하고 이곳 함양에 묻혔다. 최경회와 정실이 안장된 묘소의 아래에 안장되어 있고 그 아래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녀로서 선택의 자유가 있었는지는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그녀로서의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묘가 있는 곳의 아래로 내려오다 보면 주논개의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의병장 최경회보다 그녀의 이름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장수가 주논개의 출생지 진주는 논개의 순국지였지만 그녀가 묻힌 곳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물길처럼 흘러서 어딘가에 도달하는 것이 인생일까요. 주논개의 삶의 시작과 중간, 끝지점에 도달해서 마침표를 찍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생전 모습이 어떠했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2008년 2월 4일 문화체육관광부는 충남대학교 윤여환 교수가 그린 논개 영정을 정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물이 많았던 곳에서 태어나 물이 많았던 곳에서 삶을 마쳤으며 물이 많은 곳에서 그렇게 잠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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