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칠 뻔 했던 문화재 의령 서동리 남군보 묘표에서 8월을 만나다.
지나칠 뻔 했던 문화재 의령 서동리 남군보 묘표에서 8월을 만나다.
의령군블로그기자 조윤희
의령 서동리 남군보 묘표
-의령군 의령읍에 있는 비석
-주소: 경남 의령군 의령읍 의병로 15동길 4-1(지번. 의령읍 중동리 205)
-경남 문화재자료 제501호(2010.4.8. 지정)
지난달 의령 향교에 갔다가 나오는 길에 지나쳤었던 곳에 배롱나무가 많이 있었다는 기억이 떠올라
남군보 묘표를 다녀왔는데, 이곳이 어떤 곳인지 함께 둘러보실까요?
'의령 남씨 관조 남군보 묘역'이라고 쓴 글을 바라보면서 단순하지만 뭔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고
무심히 서 있는 안내석을 들여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네요. 아마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뭐 하고 있나 했을 것 같았네요.
관조? 낯설어서 찾아보니 본관(本貫)의 시조를 관조(貫祖)라고 하더군요.
참고로 성씨(姓氏)의 시조는 종조(宗祖), 파문중(派門中)의 시조는 파조(派祖)
그리고, 성씨, 본관이 같은 부계 혈족이 모여 사는 집성촌(集姓村)에 처음 들어오셔서
터를 잡으신 조상은 입향조(入鄕祖)라고 한대요.
이리 오너라~~~~
더운 열기를 뿜어내는 햇살만 한 바가지 찾아오고 나오는 사람은 없고~~ㅎㅎㅎ
알고 보니 외삼문 옆에 철문이 열려 있지 뭐예요?
그쪽으로 들어서자마자 꺄아~~~ 하고 놀랄 일이 눈앞에 펼쳐져 있더라고요.
얼마나 얼마나 건강한 잔디가 넓게 펼쳐져 있던지
그리고 배롱나무가 조선시대 여인의 가채처럼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던지
엄청 더워 땀이 장대비처럼 정수리부터 흘러내리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니까요.
아마 이곳의 풍경을 처음 만나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정말 넓은 공간에 8월이 혼자 독차지하고 있어서 엄청 놀랐답니다.
묘 앞에서 바라본 외삼문인 경모문까지 너른 잔디밭의 모습입니다.
남군보 묘역이 위치한 곳은 의령 읍성의 흔적을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서측 체성과 부측 체성인데 북측 체성은 낮은 야산 쪽에 있어 찾기가 쉽지 않고
서쪽은 도로변에 있어서 찾기가 쉽다 하지요.
묘표는 묘에 묻힌 사람의 이름이나 생애 등을 기록한 돌로, 묘비의 일종인데, 여기에서 남군보묘표라고 함은
남군보라는 사람의 이름과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있어서 이름이 붙여진 것이지요.
남군보의 생존한 연대는 1230년에서 1310년으로 추정되며,
그의 묘표(墓表)는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501호로 2010년 4월 8일에 지정되었답니다.
남군보에 대해 알려면 의령 남씨의 역사를 알아야 이해가 될 것 같아 올려봅니다.
경상남도 의령군의 상징적인 성씨인 의령 남씨(宜寧 南氏)의 시조는 당나라 현종 때 이부상서를 지낸 김충(金忠)이랍니다.
김충은 당나라 여남(汝南) 사람인데, 755년(경덕왕 14년)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낙양과 수도인 장안을 내주고
황제를 따라 옛날 촉한의 수도였던 성도로 파천하였고, 이후 왕명을 받아 군사 원병을 청하러
당나라의 안렴사(按廉使)로서 일본에 사신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신라 영해부(지금의 영덕군 축산면)에 표착(漂着) 하였다고 해요.
본국의 정세가 어지러워 신라 국왕에게 귀화를 요청하자 이에 경덕왕이 이러한 사실을 현종에게 알리자
“십생구사지신(十生九死之臣)을 신례(臣禮)로 부를 수 없으니 소원(所願)대로 하라”는 조서를 내렸고
그 후 그의 출생지가 당나라 여남(汝南)이라 하여, 남씨(南氏) 성을 내리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으며
영양현(英陽縣)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며, 이로써 남씨(南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해요.
이후 남민의 7대손으로 원종-충렬왕대의 대장군 남진용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중 차남 남군보(南君甫)는 원간섭기인 고려 충렬왕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으며,
이후 의령 남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며, 그 밖에 장남 남홍보(南洪甫)는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냈으며,
영양 남씨의 중시조가 되었고, 3남 남광보(南匡甫)는 고성 남씨(固城南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해요.
의령 남군보 묘표는 1589년에 세운 것으로, 비석에 쓰인 글은 조선 중기 문신인 최립(1539~1612)이 지었는데,
묘표에는 최립이 남군보의 외손자인 김찬의 부탁으로 비문을 쓰게 된 경위와
남군보의 묘소가 발견되는 과정 등을 구체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기록하고 있지요.
임진왜란 이전에 세워진 남군보 묘표는 비석으로서의 그 중요성과 가치가 인정되며
조선 중기 금석문(金石文. 쇠붙이나 돌로 만든 비석에 새겨진 글자)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01호로 지정되었던 것이지요.
남군보 묘표는 1589년에 세웠고,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 비문이 새겨진 몸돌, 꽃봉오리 모양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남군보가 세상을 떠나고 세월이 흘러 묘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게 되었다.
고을에서는 묘역 북쪽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면서 일부 고분을 없애려고 하였다.
그때 남씨 외가 후손과 고을의 한 노인이 꿈을 꾸었고, 꿈에서 보았던 봉분을 찾아보니
‘남(南)’자가 새겨진 돌조각과 금가락지 등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부장물을 통해 이곳이 남군보의 묘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무덤을 다시 조성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남군보 비문의 내용
남군보의 묘소와 함께 의령 남씨의 재실이 전하는 남군보 묘표는
비각과 함께 보존되어 있게 한 조선 중기 최고의 문장가 최립(崔岦‧1539∼1612)으로 인해
남군보 묘가 되살아나게 된 과정이 자세하게 담겨 있지만 그 내용을 설명한 기사는 다소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랍니다.
하지만 의령의 뿌리가 될 문화공간인 이곳이 자라는 세대에게도 올바르게 지켜지고 전수되길 바라는 마음이
8월의 햇살 아래 붉은 꽃빛으로 피는 배롱나무가 대신하는 듯합니다.
중국이 원산지인 배롱나무의 '부귀, 떠나간 벗을 그리워함'이라는 꽃말이 꽃 빛과 함께
8월을 지키고 섰는 남군보 묘역에서 사진을 찍어도 참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넓고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는 이곳에서 의령의 오늘과 어제 그리고 내일의 시간이 공존해 있음을 잠시 엿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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