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일 전
15세 때 주자강목 80권을 가지고 석굴에서 10년간 강독한 최산두의 학사대
백운산의 정상이 바로 보이는 산 아래
백운산 옥룡계곳의 물이
너무 맑고 깨끗합니다.
인근의 산장이나 식당이
먼저 보이는 옥룡계곡입니다.
산장 바로 앞에 학사정,
학사대 안내 표지석이 있습니다.
계곡의 건너편에 날아갈 듯
멋진 정자가 보입니다.
오늘은 신재 최산두가
80권의 주자강목을 들고 토굴에 들어가서
10년을 수학한 학사대를 찾았습니다.
이때가 최산두의 나이 15세였습니다.
최산두가 이곳 학사대에서
10년을 계획하고 공부하다
8년 만에 바위굴을 나오면서
우뚝 솟은 백운산에 대한 감흥을
"태산압후천무북(泰山壓後天無北)"
이라고 한 후
다음 구절을 잇지 못할 때
한 초동이 나타나
"대해당전지실남(大海當前地失南)"
이라 하면서
공부를 더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에 자극받은 최산두가
10년을 채워 학문을 완성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곳은 백운산 4대 계곡 중 하나인
옥룡계곡입니다.
백운산의 물이 너무 깨끗하고
계곡의 경치는 절경입니다.
잠시 백운산 옥룡계곡의 물소리
들어보시지 않으시렵니까?
계곡의 건너편에서 바라본 학사 대입니다.
배우면 선비가 되는 정자 학사 대입니다.
백운산의 3대 정기 중의 하나인
북두칠성의 정기를 타고난
신재 최산두가 수학한 학사대 토굴입니다.
계곡을 돌아서 학사대위로 올라갑니다.
계곡을 건너기 전에 화장실이 있습니다.
좁고 가파른 길이지만
차량을 갈 수 있는 길을
조심스럽게 올라갑니다.
바로 학사대 뒤에까지 올라왔습니다.
학사대 지붕 위에는
켜켜이 쌓인 소나무 낙엽이
세월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옆의 소나무는 역사이고 흔적입니다.
세월을 견디고 역사를 지켜온
소나무 그리고 학사대입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백운산
그리고 옥룡계곡입니다.
학사대 옆의 수백 년은 됨직한 소나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마 이 소나무는 15세의 최산두가
석굴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대단한 소나무입니다.
학사대에서 바라본 사방의 경치입니다.
백운산 그리고 옥룡계곡,
뒷산의 바위까지 예사롭지 않는 풍경입니다.
이제 학사대 정자 아래 토굴을 찾아갑니다.
내려갈 수 있습니다.
석굴은 상하 2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위에 있는 굴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들어갈 때는 상채를 구부리고
엎드려 들어가야 하지만
안쪽에는 어른 몇 명은
앉아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자연 암굴로 이루어진 바위 굴의 내부는
사람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한 사람이 마실 수 있는
자연우물이 있으며
주변 경관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바로 이곳에서 신재 최산두는
10년간 수학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래쪽에도 작은 석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너무 작아서
들어갈 수가 없는 굴입니다.
최산두는
위의 자연 석굴에서 공부를 한듯합니다.
최산두는 누구인가?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조선의 문신 신재 최산두
최산두(崔山斗, 1482년 ~ 1536년)는
조선의 문신입니다.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자는 경앙(景仰),
호(號)는 신재(新齋)입니다.
호는 신재(新齋)인데,
날로 새롭고 또 새로워진다는 의미로
자신이 지었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 북두칠성의 광채가 내린 까닭으로
산두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어릴 적의 일화
6세 때 글을 배우러 다니다가
하루는 비를 맞고
밤길에서 도깨비를 만나 문답을 나누었는데,
도깨비가 그를 ‘사인(舍人)’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자라서는 문장이 특출하여
현감이 그것을 기특하게 여기고
문방구를 하사하였다.
최산두는 8세 때 한시를 지을 만큼
총기가 뛰어났습니다.
선생은 이곳 석굴에서
10년간 공부한 것을 토대로
1504년(22세) 진사에 올랐고
1513년(31세)에는
별시문과에 급제했습니다.
이후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당대의 대학자들과 사귀면서
실력을 쌓았습니다.
특히 그는 출신지나 조상들의 배경이
극히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문장과 덕행으로써
홍문관을 거쳐
마침내 젊고 재주 있는 신하들이
임금의 특명을 받아
공부하던 호당에 올랐습니다.
신재는 당시 조광조 등이 주창한
도덕 정치·혁신정치에 뜻을 같이하여
기존의 권력세력으로
부패 양상을 보인 훈구파를
맹렬히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신재가 속한 신진개혁 세력은
지나치게 도학적인 언행과
급격한 개혁으로 왕의 신임을 잃고
보수세력인 훈구파의 반격을 받게 됩니다.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를 맞아
당시 의정부 사인으로 있던 신재는
37세의 한창 일할 나이에
화순군 동복으로 유배되고 맙니다.
또한 선생은 유배 생활 중에
화순 적벽을 오가며
많은 시를 짓기도 했는데
이때 그는 오늘날 관광명소로 유명한
‘적벽’이란 이름 붙이기도 했습니다.
신재는 유배 15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3년 후인 53세 되던 1536년
평생 품었던 ‘혁신정치’의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한편 선생이 돌아가신 후인 1578년
현 광양읍 우산리에
‘봉양사’가 세워져 그의 위패를 모셨으며
그 후 화순 동복에도
도원서원이 세워졌습니다.
묘소는 현재 봉강면 부저리 언덕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왕성하게
본인의 뜻을 펼칠 시기에
정치적 좌절을 겪었던 신재 최산두.
장대한 기골과 호방한 성격의 최산두도
그 어려운 세월을 이겨내려
술에 의지하였습니다.
제자 김인후가
스승 신재 최산두 선생을 추억하며
두릉의 운에 화답한 시에서
최산두가 술로 세월을 달랬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부김하서억신재화두릉운'
(附金河西憶新齋和杜陵韻)
신재가 나복현에 있을 때
첩에게 물었다네 술 남았냐고
덧없는 세상이라 감흥이 치우치니
석양에도 취한 술 깨지 않네
원릉은 슬프게도 눈이 하얗고
친구는 멈춘 구름을 한스러워하네
적막한 곳을 뉘라서 찾아오려나
홀로 깨어 있는 걸 탓할 맘 없어라
현실에 지고 역사에 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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