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일 전
산청여행 문익점 목화 최초 재배지, 목면시배유지
산청여행
문익점 목화 최초 재배지
목면시배유지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천송이가 모카라떼를 마시며
"문익점 선생님이 왜 모카씨를 숨겨 들어왔는지
이제 알 것 같다"고 했던 장면, 기억하시나요?
이 대사에 많은 사람들이 웃었다는 건 우리가 문익점 선생의 이야기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보여주는 재미있는 순간이었죠
물론 몰래 들여온건 모카씨가 아니라 목화씨지만요😛
오늘은 소중하게 들여온 목화씨를 처음으로
재배에 성공한 장소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바로 산청군에 위치한 목면시배유지인데요.
목면시배유지의 소개와 함께 문익점 선생에 대한
일화도 소개해드리도록 할께요~ :D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 遺址)
경남 역사 여행 장소로 안성맞춤인
산청 목면시배유지는 경상남도 상청군 목화로에 위치해있으며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관람료가 있었지만 현재는 무료로 입장이 가능합니다.
크기가 크지 않아 아이들과 함께 둘러보기도 적합해요.
다양한 자료와 모형이 준비되어있어서
산청여행 장소로도 좋은 곳입니다.
⭐ 관람시간 ⭐
3월~10월 : 09:00~18:00
11월~2월 : 09:00~17:00
폐관 30분 전까지 입장
매주 월요일 / 명절 휴관
목면시배유지라는 단어가 생소하실텐데요
목면시배유지를 그대로 풀이하자면
목면(木棉)
목화(면화)를 의미하며
면화는 옷감의 원료로 사용되는 식물
시배(始培)
처음으로 재배함
유지(遺址)
유적지, 과거의 중요한 사건이나
활동이 이루어진 장소
이걸 문장으로 정리해보자면
'한국에서 최초로 목화가 재배된 역사적인 장소'를 뜻합니다.
전시관으로 가는 길에 두개의 비석을 보실 수 있으실텐데요.
'면화시 배사적비'와 '삼우당 유허비' 입니다.
면화시 배사적비는 1964년에 세워졌으며 문익점 선생의
애민정신과 면화를 들여온 행적을 기리고 추앙하는 비석이며
삼우당 유허비 또한 원나라에서 면화를 들여온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후손들과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징표가 되도록 건립한 비석입니다.
목면시배 유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선 문익점(文益漸)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빼먹을 순 없을것 같습니다.
문익점 선생은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위치한
배양마을에 태어났으며 문신으로써 정치인, 학자로서의 업적도 있지만
고려 말기 공민왕 12년(1363년)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길에 목화씨앗을 몰래 들여온 인물로 가장 유명합니다.
그렇게 소중히 가져온 목화씨를 본인의 고향인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처음 재배하였으며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시험 재배를 통해
성공적으로 목화를 번식한 곳이 바로 이 목면시배유지인거죠!
목면시배유지 전시관
목면시배유지 전시관은 크게 제1전시실, 제2전시실로 나뉘어져있습니다.
제1전시실은 물레, 무명이 되기까지의 과정, 면화의 역사, 베틀,
목화의 성장과정에 대한 설명과 모형, 사진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많은 분들이 궁금할 목화솜을 어떻게 무명(木綿, 면화)으로
만드는지를 알 수 있는 무명베짜기 모습을 모형으로 제작하여
남녀노소 알기 쉽게 전시해놓은게 특징입니다.
무명베를 만드는 과정은
먼저 솜에서 씨앗을 제거하는 씨아기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이후 솜을 부드럽고 균일하게 만드는 활타기 과정을 거칩니다.
이렇게 부풀린 솜은 고치말기를 통해 고르게 말아주며 준비됩니다.
다음 단계는 실뽑기로 물레질을 통해 고치솜에서 실을 뽑아내는 작업입니다.
이어서 베짜기를 위해 실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무명날기가 진행됩니다.
정리된 실은 풀을 먹이고 숯불에 말려 강도를 높이는 무명매기 과정을 거치고
준비된 도투마리를 베틀에 얹어 무명베를 짜는 베짜기 작업으로 완성됩니다.
제2전시실에선 생활 속 목화, 지역별 길쌈노래, 영상으로 보는 전통염색체험,
애니메이션 감상실, 기념품샵이 있습니다.
전시관 관람 후 나오면 보이는 부민각과 효자비 또한
이곳 목면시배유지의 볼거리 중 하나입니다.
문익점 선생의 목화씨 재배와 목면 생산은
고려 말 조선 초기(여말선초)의 산업혁명이라 불려도 좋을만큼
국부 증진과 백성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요!
산청군에서 시작된 목화재배는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그간 삼베옷으로 겨울을 나야 했던 서민들의 의복에 큰 변화를
주었으며 솜을 두둑히 넣은 무명옷을 지어입게되면서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면포의 생산을 통해 가내수공업이 시작되면서 백성들의 수익이 창출되자
국가 경제가 부흥하게 되었고 세종대왕은 목화를 들여온 문익점 선생의 공이
부민후(백성을 부유하게 만든이)라는 관위를 내리고 이 뜻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일곱 간의 집을 짓고 그 집을 부민각이라 하셨습니다.
그의 애민정신과 공로를 칭송한 사람은 비단 세종뿐만은 아닌데요.
조선시대 여러 학자와 임금들에게 칭송받았으며
율곡이이와 남명 조식은 그를 업적을 시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신농씨와 후직씨는 백성에게 농사를 가르쳤는데
충선공(문익점)은 우리에게 옷을 입혀줬으니
그의 공로는 신농씨와 후직씨보다 더 하다
<율곡 이이>
백성들에게 옷을 입힌 것이 중국의
후직과 같도다(衣被生民 后稷同)
<남명조식>
신농(神農)은 농업신으로 여겨지는 인물로,
농경체계의 등장으로 인한 사회 변화가 반영된 설화가 전해집니다.
후직(后稷)은 농업을 지도하는 직책을 맡았던 인물로,
요순시대부터 하 왕조까지 벼슬살이했다고 전해집니다.
문익점 선생은 지역에서 효자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어머니가 상을 당하여 시묘(侍墓부모의 묘 옆에서 여막을 짓고 3년간 묘를 돌봄)하던 중
왜구들이 마을로 침입해 불을 태우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산속으로 피난하였으나
선생께선 뜻을 굽히지 않고 여막을 지키는 모습을 보고 왜구들이 효성에 감동하여
효자를 해치지 말라는 글을 쓴 말뚝을 세워놓고 물러갔다고 전해집니다.
효자비는 이런 선생의 효심을 기리고자 세워진 비입니다.
목면시배유지 앞에는 목화밭이 넓게 펼쳐져있습니다
매년 7~8월에는 목화꽃이 만개를 하게 되어 예쁜 장관을 이루게 되는데요.
산청 지역내에선 오래전부터 목화를 재배해오고 있으며 전통 방식인
'무명 베 짜기'의 명맥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오고 있습니다.
목화는 역사상 가장 가치가 높은 비식량작물로 뽑는데요!
목화가 씨앗을 맺을때 생기는 털이 바로 목화솜으로
이 목화솜을 이용하여 솜과 무명천을 만들 수 있으며
목화씨는 기름을 짜서 면실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문익점 선생의 노력으로 시작된 목화 재배는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했고, 한국 섬유 산업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이런 행동에는 추위로 떨고있는 백성을 위한 애민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요.
이곳 산청군 목면시배 유지에서 문익점 선생을 기리고
역사 공부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며
특별한 시간을 보내시는건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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