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단] 음성군 가톨릭 성지 방축골 계마대 교우촌 봉암성지
1839년 기해박해 뒤 형성된 천주교 교우촌
최양업 신부가 김 사도요한 신학생으로 선발한 곳
6명의 교우가 순교한 봉암성지
음성군 맹동면 충북혁신도시 빽빽한 아파트 단지와 공공기관을 뒤로하고 작고 소박한 마을길로 향합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최양업 신부님의 동상과 함께 봉암성지 이정표가 나타납니다. 지금으로부터 158년 천주교 박해가 있었던 신앙촌입니다. 오랫동안 잊혔던 곳은 2020년 청주교구의 천주교 성지로 선포되면서 160여 년 전의 역사를 기리네요.
봉암성지는 버스터미널 안쪽으로 봉암공소가 있고 길을 따라 안쪽으로 십자가의 길, 야외 제대, 순교자 묘역, 방축골 신앙촌터로 구성되었습니다. 공소에서 시작되어 약 1시간 천천히 성지 투어로 즐기게 됩니다.
봉암의 방축골과, 계마대는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천주교 신자들이 이주해 와서 교우촌을 만들고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했던 마을입니다. 김백심, 송군명 가족이 최초로 터를 잡았고 민윤명 회장 가족이 계마대로 이주하였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사목 순방 도중 방축골과 계마대에 들러 김백심의 막내아들 사도 요한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진천 베티에 있는 조선대목구 신학교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1866년 병인박해 때 신창촌이 발각되면서 순교하게 됩니다.
봉암공소는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로 단층의 기도소와 종탑이 있습니다.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된 듯한 소박한 모습입니다. 성지 선포 이후 감곡성당과 꽃동네와 연결되는 성지순례 길이 계획되네요.
감곡성당의 경우 1896년 프랑스인 임가밀로 신부가 건립한 곳으로 전국에서 18번째 성당이자 충청북도 내에서는 최초로 건립되었습니다. 꽃동네는 1976년 거지성자 최귀동 할아버지와 깊은 인연이 있는 오웅진 신부가 설립한 천주교 사회복지시설입니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음성품바축제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공소 앞으로는 맹동면의 너른 들판이 이어지네요. 성지는 공소를 지나 마을 안쪽 낮은 야산 어귀로 십자가의 길이 이어집니다.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신자들이 이주해오면서 형성된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때 폐허가 되었습니다. 1892년 다시 신앙 공동체가 꾸려졌고 1898년 봉암공소가 만들어지며 지금에 이르네요. 봉암성지는 순교터도 아니고 순교자의 묘소도 없습니다.
마을길 사이로 야외제대가 있고 6인의 순교자 묘역이 안내되네요. 민윤영, 김백심, 김성회, 김성서 김사도요한, 이 베드르입니다. 병인박해 때 수원, 서울, 충주 등으로 이송돼 문초와 형벌 끝에 순교한 분들입니다.
우리나라 천주교 박해의 역사는 길었었네요. 광해군 때 천주실의 서적이 들어오고 1645년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오면서 시나브로 교리가 퍼져나간 후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 병인박해까지 정착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이곳 봉암성지는 기해박해와 병인박해로 인해 형성되었고 순교하였네요.
십자가의 길을 따라 장미꽃이 식재되어 숭고함을 기립니다. 그리고 이어 대형 십자가 아래로 성 안드레아, 성 필립보, 성 바르톨로메오, 성 마태오, 성 토마스 등의 성인들의 조각상이 길게 이어져서는 방축골 신앙촌 터를 굽어봅니다. 당시 희생된 영혼을 기리는 듯합니다.
2020년 11월 1860년대 신앙촌이 형성됐던 방축골이 봉암성지로 선포되었습니다. 봉암공소를 중심으로 성지 순례길이 이어지네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학생이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사제가 되었던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도 남은 곳은, 음성감곡성당에 이어 천주교의 역사를 만나는 또 하나의 역사 문화유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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