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함안 여행/함안 가볼 만한 곳] 길 따라 걷다 보면 보이는 원북벽화골목길 끝에서 만난 어계고택과 은행나무
제13기 함안군 블로그 기자단 조윤희
[10월 함안 여행/함안 가볼 만한 곳] 길 따라 걷다 보면 보이는 원북벽화골목길 끝에서 만난 어계고택과 은행나무
중시조인 조려의 고택 등 많은 유적이 남아 맥을 이어오고 있는 곳에 600년의 역사를 품고 자리하고 있는 함안조씨 집성촌, 함안군 군북면 원북 마을을 다녀왔네요.
군북면 사무소가 있는 시가지에서 지방도 1004호선을 따라 진주 방면으로 4㎞ 정도 가면 괘방산의 동남쪽 발치에 형성된 원북 마을로 함께 가보실까요?
원북벽화골목길
주소: 경상남도 함안군 원북리 831-4
예전에 길을 잘못 들었다가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커다란 은행나무를 봤던 기억이 나서 다시 찾은 길에 벽화가 그려진 골목길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아마 그때도 있었겠지만 예사로 스쳐지났던 곳이 오늘은 의미가 되어 가슴을 두드리면서 다가오더군요.
우리나라에서 벽화마을이 본격적으로 발생한 시기는 정부의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시작된 2006년 이후이며,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방법은 페인트였다고 해요. 왜냐하면 페인트가 보편적으로 사용된다는 대중성과 재료를 구하기 쉽다는 용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원북벽화골목길도 아마 페인트로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벽화마을이 유명해지면 생각지도 않은 소음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곳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이 불편할 정도로 방문객들의 태도가 무례할 경우도 왕왕 있었던 사례가 있다는 점이 걸리긴 했지만 호젓한 산책을 원하실 때는 이곳에 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던 건 사실이었답니다.
원북벽화골목길은 2023년 농촌 재능 나눔 활동 지원 사업으로 함안군 원북 마을 주민과 함안 미술협회와 함께 골목길을 예쁘고 정갈하게 꾸몄는데 원북 마을을 끼고 흐르는 개울에는 마을 공용 우물이 두 개가 있었고 흐르는 물속에는 다슬기며 작은 물고기들이 신나게 놀고 있는 것을 보다가 목적한 곳으로 이동하였답니다.
어계고택(漁溪古宅)
-주소: 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북길 104-1
(지번. 원북리 592-1)
-관리처: 문화유산담당관 문화유산담당
-문의전화:055-580-2551
넓어도 너무 넓은 주차장에서 바라본 어계고택이 은행나무와 함께 10월의 시간을 지키고 서 있는 것 같은 생각을 하면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어계 고택(漁溪古宅)은 1976년에 12월 20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답니다.
어계 조려(1420~1489) 선생이 태어난 곳이라고 전하지만 이 건물에서 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가에서 고택으로 명칭이 바뀌기도 했지요.
외삼문인 솟을대문의 문이 마치 제가 방문할 줄 알았던지 활짝 열려 있더군요.
솟을대문이란 대문 종류 중 하나로 주변의 담장 혹은 연결된 행랑채보다 높게 지은 문을 의미하는데, 솟을대문이 있는 가옥은 고위 관료가 거주하는 곳 즉, 권위의 상징이기도 한 대문의 형식이랍니다.
활짝 열린 솟을대문 앞에서 바라보이는 안의 모습입니다.
솟을대문의 등장은 거주자 내지는 주 출입인의 이동 수단과 관련이 있다고 해요.
종 2품 이상의 관리가 타던 수레를 ‘초헌軺軒’이라고 하는데, 초헌(軺軒)이나 말이 드나들 수 있도록 문턱을 아예 없애거나 凹 형의 문턱을 두기도 했다지요.
어계고택의 대문채는 3칸으로 되어 있는데 중앙은 대문으로 양쪽에는 방이 각각 하나씩 있는데 안으로 들어오면 밖에서 볼 수 없는 방의 모습을 볼 수 있답니다.
생육신(生六臣)은 조선시대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탈취하여 세조에 즉위하자
세상 속의 삶과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명의 사람을 일컫는 말로서
‘절의파, 청담파’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어계(漁溪) 조려(趙旅),
관란(觀瀾) 원호(元昊),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문두(文斗) 성담수(成聃壽),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을 일컬어
그렇게 부른답니다.
솟을대문이 권위의 상징이라고는 하지만 얼마나 단출하던지 둘러볼 만한 팔작지붕 외에는 화려한 가옥도 없는 것이 특징이랍니다. 그래서 이곳에 제일 처음 와서 받았던 소박함에 충격을 받기도 했답니다.
원북재 현판을 중앙으로 좌측에는 어계고택(漁溪古宅), 우측에는 금은유풍(琴隱遺風. 어계 선생의 조부인 조열(趙悅)의 호가 ‘금은’으로 거문고를 잘 탔다고 한다는 데서 붙여졌다고 해요.)과 원북재(院北齋)라는 현판이 나란히 붙어 있었습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원북재는 중앙 두 칸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 끝에 온돌방 구조였지만 부엌이 없는 것을 보면 이곳은 살림집이라기보다는 재실의 기능으로 지었구나 생각을 하면서 원북재의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답니다.
10월의 하늘답게 맑고 푸름의 깊이가 나날이 달라지는 것이 엿보이는 어계고택 둘러보기는 이제 원북재 뒤편의 사당 쪽으로 향합니다.
원북재와 사당 사이에 있는 내삼문을 지나면 정면 3칸의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의 조묘(祖廟. 원조(遠祖)를 합사(合祀)하다)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사당을 만나게 된답니다.
음력 3월이 되면 조려 선생과 그의 부인에게 향례를 치르고 있다는 사당 안에는 국왕의 하사품인 향로와 선생이 사용하던 죽장이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문이 닫혀 있어 구경하지는 못했네요.
조선 초에 조려(趙旅)의 조부(祖父)인 전서공 조열(典書公 趙悅) 선생은 이성계가 고려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여 태조왕이 되자 공조 전서(工曹典書, 정 2품, 오늘날 국토 건설부 장관)의 벼슬자리를 내던지고 경기도 두문동으로 들어가 몇 달 살다가, 경남 합천 두심동으로 내려와 거기서 2~3년간 살다가, 다시 지금의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로 내려와 정착함으로써 함안 조씨(咸安趙氏)가 되었으니, 함안 조씨라는 본관이 태생된 집이 바로 어계고택(漁溪古宅)이라 할 수 있다고 본다는 설이 있더군요.
저도 본관이 함안인 조씨 성을 쓰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곳에서의 시간은 저의 뿌리찾기 같은 여행이기도 해서 의미가 남달랐답니다.
원북재와 관리사 쪽에 있는 중문을 통해 나오니 예전의 건물은 없어지고 깨끗한 건물 한 채가 새로 지어져 있더군요. 이 건물의 의도는 아마도 어계고택을 알리고 전승하려는 함안군의 의지가 내포된 게 아닌가 싶어지더군요.
이곳은...
-주소: 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북길 104
(지번. 원북리 607-1/607-2)
원북재와 사당이 있는 곳을 둘러보고 나서 바로 옆의 오래된 집을 둘러보러 왔네요. 예전에는 이곳이 자물쇠로 채워져 있어서 둘러보지 못해 아쉬웠었는데 오늘은 어떨지 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았습니다.
세게 잡으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마른 나뭇가지를 끼워 넣은 대문은 누구라도 둘러보고 가라는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하더군요.
그래서,...
매일 청소를 하는 것 같은 마당과 예전에는 이곳에서 생활을 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의 안채가 보였습니다.
정면 4칸의 집은 왼쪽부터 부엌 - 방 - 대청마루 - 누마루를 둔 방 순으로 지어졌었는데 이곳이 어쩌면 원북재를 관리하기도 하면서 살림을 살았던 관리사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보았는데 어디에도 이 집에 대한 정확한 문헌이나 자료를 찾을 수 업었고 제 나름의 해석으로 결론을 내려 올리기 때문에 정설이 나온다면 바뀔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안채의 왼편으로 행랑채처럼 보이는 건물에는 방 한 칸과 곡식을 쌓아두고 빻았을 것 같은 저장고로 추측되더라고요.
이곳을 모두 포함해서 어계고택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원북재는 재실로서, 이곳은 생활의 기능을 가진 살림집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생각인데 이곳을 손질해서 어계고택을 좀 더 요즘 시대에 맞게 알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지더군요.
들어올 때 미처 보지 못했던 이 빈 집의 대문채에는 좌측에 창고, 우측에는 방으로 사용했을 것 같은 모습을 보면서 이곳의 기억을 가진 분을 만날 수 있었다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전해 들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더군요.
돌담 그리고 은행나무...
어계 조려의 삶을 중국 주나라 때 불사이군의 충신인 백이와 숙제에 비유하기도 하면서 원북리 앞산을 백이산(369m), 남쪽 봉우리를 숙제봉, 북쪽 봉우리를 백이봉이라고 부르는데, 고택은 주산인 방어산(532.1m) 산줄기의 끝부분에 해당하는 산진처(山盡處)에 위치하고 있지요.
산을 끼고 있어서 그런지 돌담과 기와도 마치 어계 선생의 삶을 대변하는 것 같이 여겨져 의미를 담으면서 담아보았습니다.
어쩌면 하나라서 오롯이 혼자라서 더 도드라지게 보이는 은행나무.
권력과 타협 않았던 조려 선생의 의지처럼 비좁은 마당을 화분 삼아 서 있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공자의 뜻을 본떠 어계 조려의 후손이 심고 가꾼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요.
1982년 11월 10일 자로 보호수로 지정되어 관리받고 있는 은행나무의 수령은 그 당시 500년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542년이라야 맞겠지만 나무의 나이테를 보지 않고서야 정확한 나이야 알 수 없지 않겠어요?
나무 높이가 20m, 둘레가 3.4m나 되는 은행나무에는 아직 완연한 가을이 묻어나진 않았지만 많은 열매를 품고 있어 언제라도 계절의 바닥에 분신을 떨어뜨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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