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일(목)부터 9월 30일(월)까지 오산오색문화체육센터에서는 경기도와 오산시가 후원하고 한신대학교 박물관이 주관 및 주최하는 2024 박물관/미술관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아주 특별한 사진전인 '땅 속에서 찾은 오산의 역사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이번 '땅속에서 찾은 오산의 역사' 사진전은 오산시 땅속에 잠들어 있던 매장유산의 발굴조사 성과를 한자리에 모아 오산시민에게 소개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수천년을 흙 속에 묻혀 있던 유적과 유물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과정을 생생한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다.

오산시도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한국사를 구성하는 모든 시대의 흔적이 빠짐없이 확인되었다. 또한, 각 시대마다 한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유적이 조사된 점 또한 오산시 매장유산의 특징이기도 하다.

'땅 속에서 찾은 오산의 역사' 사진전은 오산의 역사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미있고 친숙하게 꾸며놓았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즐기면서 오산의 전통과 문화를 느껴보는 의미있는 시간이 되리라고 본다.

▶오산오색문화체육센터 2층 홀에는 '땅속에서 찾은 오산의 역사' 사진전을 알리는 베너와 함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 오산시에서는 61곳에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다양한 성격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시대별로 살펴보면 구석기시대 4곳, 신석기시대 2곳, 청도기시대 11곳, 원삼국~삼국시대 22곳, 통일신라시대 9곳, 고려시대 17곳, 조선시대 53곳이다.

▶ 오산시 인간 활동의 시작, 청호동 구석기시대 유적

오산시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구석기시대의 유적은 갈곶동, 내삼미동, 외삼미동, 청호동 등지에 분포한다. 청호동유적에서는 여러 개의 문화층에서 750점의 구석기가 수습되었다. 유적이 형성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4~3만년 전 무렵으로 후기 구석기시대에 해당된다.

▶ 토기와 간석기의 발명, 가장동 신석기시대 유적

가장동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집터 1기와 야외화덕 1기, 저장구덩이 여러 기가 확인되었다. 유적이 형성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4,500~3,600년 전 무렵에 해당된다.

▶ 내삼미동 일대에서는 지금으로부터 3,000~900년 전에 걸쳐 형성된 대규모 마을유적이 확인되었다. 기다란 모양의 집터 40기가 확인되었는데, 규모가 가장 큰 집터는 길이가 22m에 달한다. 내삼미동유적은 고고학적 방법으로 시기를 구분할 때 청동기시대 전기에 해당되며, 화덕자리가 여러 개 설치된 기다란 집터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한 집에 여러 세대가 모여 살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마을의 형성과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내삼미동유적은 오산시 최초의 마을로 평가할 수 있다.

▶ 내삼미동유적의 집터에서는 많은 양의 그릇과 돌로 만든 도구가 나왔다.

▶ 탑동·두곡동유적에서는 집터와 함께 무덤이 공존하는 것이 특징이다. 고인돌과 돌널무덤은 청동기시대 중기에 속하는 것으로 작아진 집터와 함께 이 시기의 대표적인 요소이다. 농사를 지어 생계를 해결하는 방식이 사회 전체에 뿌리내린 결과, 사람들이 한 장소에서 안정적으로 오래 살게 되었고 조상의 안녕을 기원하는 무덤이 만들어진 것이다.

▶ 오산시에는 금암동과 외삼미동에 위치한 고인돌 공원이 널리 알려져 있고, 탑동·두곡동유적의 고인돌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사례로 붉은 칠을 한 작은 항아리와 돌칼이 함께 나왔다.

▶ 신성한 제사공간의 경계, 창학동 환구(環溝)유적

청학동유적에서는 지금으로부터 2,500~2,300년 전에 형성된 제사공간과 무덤이 확인되었는데, 청동기시대 후기에 속한다.

▶ 궐동에서는 지금으로부터 1800년 전 무렵에 만들어진 마한의 무덤유적이 확인되었다. 궐동유적에서 확인된 유물 중 굽다리가 달린 항아리에 뚜껑이 결합된 '유개대부토기'는 다량의 철제 무기와 함께 오산, 평택, 아산, 진천, 청주 등 마한의 영역과 대구, 경산, 경주, 포항, 합천, 밀양, 창원 등 진·변한의 영역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이는 삼국시대 이전에 오산지역의 집단과 삼한이 서로 교섭한 흔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 수청동 무덤유적은 지금으로부터 1750년 전 무렵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1550년 전 무렵까지 유지되었던 경기 남부지역 최대 규모의 공동묘지로 300여 기에 달하는 무덤이 확인되었다. 수청동유적은 오산천유역의 전통적인 지배세력이 남긴 공동묘지로 판단된다.

▶ 수청동 무덤유적에서는 많은 양의 구슬과 함께 금 장식, 금동 귀걸이, 청동 장식, 대롱옥 등이 나왔다. 특히 구슬은 목걸이나 가슴·머리 등을 꾸몄던 장식으로 판단되는데 무려 7만여 점이 나왔고 이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사례에 해당한다.

▶ 수청동 무덤유적에서는 많은 양의 구슬과 함께 금 장식, 금동 귀걸이, 청동 장식, 대롱옥 등이 나왔다. 특히 구슬은 목걸이나 가슴·머리 등을 꾸몄던 장식으로 판단되는데 무려 7만여 점이 나왔고 이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사례에 해당한다.

▶ 내삼미동유적은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 무렵에 조성된 백제의 마을유적으로 주로 정사각형 모양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 내삼미동유적에서는 백제의 저장구덩이가 많이 확인되었다. 오산지역에서 확인된 저장구덩이는 모두 500여 기에 달하는데 이 중 400기가 내삼미동 일원에 집중되어있고 경기 남부지역에서도 제일가는 규모이다. 이러한 저장구덩이는 백제가 조성한 곡식창고에 해당되며, 오산천유역을 물류센터로 중시했던 정황을 보여 준다.

▶ 가수동유적은 가감이산 남쪽의 골짜기에 위치한다. 가수동유적은 삼국의 흔적이 모두 확인된 희귀한 사례이다. 지금으로 부터 1600년 전 무렵 백제가 마을을 조성하였고, 뒤이어 고구려, 신라에 의해 차례로 점유된 상황을 잘 보여준다. 백제의 수도였던 서울 송파 일대부터 탄천을 따라 용인 기흥구를 지나 오산천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삼국 모두가 중시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 신라~통일신라시대 지방지배의 거점이 되었던 독산성

통일신라시대에 한주로 이름을 바꾸었고 오산시 일대는 한주 산하의 수성군에 속하였다. 신라는 중요한 지역에 산성을 쌓아서 지역주민에 대한 통제와 수취를 강화하고 고구려와 백제에 군사적으로 대비하고자 하였는데 오산에서 이러한 역할을 한 군사시설이 바로 독산성이다. 독산성은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무렵에 신라가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독산성은 신라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이래 조선시대까지 지역 중심지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토기도 출토되어 성벽 축조 이전에 백제에 의해 점유된 사실도 밝혀졌다.

▶ 신라~통일신라시대의 마을은 양산동, 세교동, 지곶동, 내삼미동, 외삼미동, 탑동·두곡동 등지에서 확인되었다.

▶ 신라~통일신라시대의 무덤은 돌로 만든 돌방무덤과 돌널무덤으로 구분되는데, 가장동, 궐동, 내삼미동, 탑동·두곡동에서 확인된 돌방무덤에 상대적으로 높은 계층의 사람들이 묻혔을 것으로 판단된다.

▶ 지곶동유적지에서는 8동의 건물터와 축대 등으로 구성된 대규모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청동제 소탑과 청동 접시 등이 출토되었고, 건물터와 구조로 보아 불전터와 강당터 등으로 구성된 사찰로 판단된다. 1965년 지곶동 일대에서 발견된 금동관음보살입상의 존재를 감안하면 지곶동 일대에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대규모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가장동, 세교동, 지곶동, 청학동, 탑동·두곡동 등지에서 고려시대 때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오산에서 확인된 고려시대 집터의 형태는 직사각형에 한쪽 구석에 부뚜막이 설치된 형태가 대부분인데 탑동 두곡동 유적에서는 여러 줄의 고래가 가진 구들시설이 확인되었다.

▶ 삼국시대 이래 전통적인 군사적 요충지였던 독산성은 고려~조선 전기에는 다소 방치되었다가 임진왜란을 통해 경기 남부를 방어하는 부동의 요새로 자리매김한다. 현재 성문 4개소, 암문 1개소, 치 8개소, 보적사, 세마대지 등의 시설이 위치하며, 독산성 세마대는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쌀로 말을 씻긴 일활로 유명하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독산성은 현재 사적 140호로 지정되어 있다.

1750년(영조26) 온양온천에 행차하였던 영조는 한양으로 들어가던 중 독산성에 올라 임진왜란 때의 일을 회상하였고 무기와 장비를 점검하도록 하여 군사상 요충지인 독산성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1760년(영조36) 사도세자의 온양온천에 행차하였다가 한양으로 들어가던 중 장마로 황구지천을 건널 수 없게 되자 독산성에서 하룻밤 묵어가게 되었다. 다음날 진남루에 올라 활쏘기를 한 후 임진왜란 당시 권율의 전공을 떠올리며 독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고 병사와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1790년(정조14) 정조는 독산성에 올라 운주당에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사도세자가 묵었던 당시의 상황을 물으며 이야기를 나눈 후 쌀과 옷감을 지급하였다.

이는 독산성이 중요한 군사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조에게는 아버지 사도세자와 관련된 매우 소중한 장소였음을 보여 준다.

▶ 오산시에서 확인된 대부분의 유적에서 조선시대 마을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 봉학교가 발견된 곳은 융건릉이 위치한 안녕동에서 독산성을 향해 황구지천을 건너는 세람교터 근처이다. 봉학교는 사료에서 확인되지 않는 이름인데 이 비석을 통해 세람교의 또 다른 이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봉학교비는 조선시대의 교통, 수공업은 물론 지역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오산시에서 확인된 대부분의 유적에서 조선시대 마을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가수동, 가장동, 갈곶동, 궐동, 내삼미동, 누읍동, 세교동, 원동, 지곶동, 청학동, 청호동, 탑동, 두곡동 등지에서 집터가 조사되었는데, 지곶동 유적에서 80여기, 탑동·두곡동유적에서 90여 기로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9월 말까지 열리는 '땅 속에서 찾은 오산의 역사 사진전'은 오산오색문화체육센터 2층 전시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전시는 오산시 땅속에 잠들어 있던 매장유산의 발굴조사 성과를 한자리에 모아 오산시민에게 소개하기 위해 마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천년을 흙 속에 묻혀 있던 유적과 유물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과정을 생생한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사진전인 만큼 오산시민들의 관심과 성원 그리고 많은 관람이 있기를 적극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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