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 속 쓸모를 찾아서;

생태작가 연암 박지원과 공생의 아름다움

당진시립중앙도서관(관장 구본휘)은 연암 박지원을 주제로‘시간 여행 속 쓸모를 찾아서’ 강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번 강좌는 ‘2024년 길 위의 인문학’ 공모사업에 선정돼 운영하는 사업으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한국도서관협회가 공동 주관하는데요.

‘길 위의 인문학’사업은 지역주민이 이용하는 문화기반 시설을 통해 생활 속에서 함께하는 인문학을 구현하고, 강연과 체험, 지역 인문자원 탐방 등을 결합한 인문 프로그램입니다.

'시간 여행 속 쓸모를 찾아서’는 연암 박지원의 실용적이며 개혁적인 사상과 철학을 주제별로 강의가 이뤄지고 있는데요. 수강생들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여행, 실학, 공생 등 각 분야 전문 강사의 강연과 탐방, 영화 감상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과거를 마주하며 배움의 기회를 얻고 있습니다.

오늘은 '생태 작가 연암과 공생의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로 박수밀 교수의 강연이 진행된다고 해 면천읍성 작은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젊은 시절부터 권세와 이익만을 좇아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세태를 깊이 근심했다고 해요. 현실에 실망한 연암은 수년 동안 우울증 증세를 겪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회 현실을 치유하고 진실한 문학을 하는 돌파구로 연암은 자연 사물에 주목했는데요. 연암의 중요한 정신 중 하나가 생태와 공생이라고 합니다.

연암은 경전의 세계가 있는 고대 중국이 아닌 지금 이곳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조선의 삶에 현장에 주목했는데요. 곧 눈앞의 사물에 참된 정취가 있기에 내가 지금 바라보는 자연의 삼라만상이 가장 위대한 문장이자 배움의 공간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늘은 푸른데 왜 하늘 천자는 푸르지가 않아요"

"이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을 굶어 죽이겠소" <답창애 중에서>

연암 박지원이 훈장을 하며 천자문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한 아이가 항변하면 한 말이라고 합니다.

연암은 아이의 말을 인용해 문자가 실제를 은폐하고 있음을 설파했는데요. 살아있는 학문의 출발은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믿는 지식 체계에 함몰되지 않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박수밀 교수는 연암의 글을 인용하며 우리가 책을 읽을때에도 책 속의 지식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 비평적으로 따져서 읽을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네요.

"지금 사람들의 독서는 옛사람의 말라비틀어진 종이 위에 머리를 묻고, 그 좀 오줌과 쥐똥에 코를 박고서 이미 용도폐기된 죽은 지식의 껍데기만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펄펄 날며 우짖는 저 새의 생의로움을 시골 늙은이 지팡이 위에 새겨 놓은 새마냥 가두어 두고도 그들은 쉽게 만족하고 흐믓해 한다. 술에 취해 죽으려거든 깡술을 마실 일이지, 왜 술지게미만 배가 터지게 먹어대는가?

사물과 만나고 싶으면 가슴을 활짝 열어 그것들을 받아들일 일이지, 왜 낡은 책갈피만 뒤적이고 있는가?"

연암은 40세 전후로 지금의 파고다 공원 뒤편인 전의 감동에 머물며 몇 년간의 글을 '종북소선'로 엮었는데 그중 한 부분입니다.

그 옛날 포희씨는 하늘을 살펴보고, 굽어 땅을 관찰하며 팔괘를 만들었고, 창힐씨는 사물을 관찰해 형상을 그대로 재현해 한자를 만들었다고 해요.

연암은 저서를 통해 포희씨와 창힐씨가 태초의 교감, 원음을 듣는 감동, 사물을 기호속에 재현해냈던 것처럼 글엔 소리와 감정과 색깔과 경계가 있어야 한다고 저술하고 있습니다.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고 독일에 괴테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박지원이 있다고 할 정도로 연암은 세계적 수준의 문장가로 손꼽히고 있는데요. 우리가 자랑하는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를 쓴 연암은 하찮은 것에서부터 관심을 갖고 출발해야 제대로 된 문장을 이룰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글쓰기의 본질은 자연을 자세히 관찰하고, 교감하는 것인데요. 가장 평범하고 비루한 것들에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를 찾아 내는 것이 진정한 문장의 창조자라고 합니다.

햇살에 따라 달라 보이는 까마귀의 다양한 스펙트럼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깃털이 그보다 더 검은 것은 없다. 하나 얼핏 옅은 황금색이 돌고, 다시 녹색으로 반짝인다.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솟구치고, 눈이 부시면서 비취색으로도 변한다. 그렇다면,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 해도 괜찮고,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까마귀는 본디 정해진 색깔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버린다. 어찌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겠는가. 보지도 않으면서 마음속에서 미리 판정해 버린다. 아! 까마귀를 검은색에 가두어 버리는 것도 그렇더라도, 까마귀를 가지고 천하의 모든 색을 가두어 버리는구나!”

-연암이 조카 종선의 '능양시집'에 부친글 중에서-

박수밀 교수는 수강생들에게 연암의 적오(붉은 까마귀)를 예시로 들며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했는데요. 외관상 한가지로만 보이는 사물도 여러 각도에서 여러 가지로 드러날 수 있다며, 사물에 대한 관찰과 통찰없이는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연암은 프레임에 갇히지 않기 위해 기존의 법고창신(法古創新)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했다고 해요. 연암에게 있어서 법고는 근본정신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며, 창신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의 조화였습니다.

즉, 옛것을 따르되 변화를 수용하고, 새것을 받아들이되 옛것의 법도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라고 해요. 연암에게 있어서 미적 감수성은 도덕적 감수성이며 생명 미학임과 동시에 생태 미학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생태 미학의 실천적 함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 인간과 자연의 공생에 이르는 실천 미학이라 할 수 있다고 해요.

연암의 소설 '호질' 속에 내포하고 있는 문명과 자연의 대결과 같은 생태사상의 중요성에 대한 강연이 이어졌습니다. 호질은 양반의 위선을 풍자하는 데서 더 나아가 문명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묻고 있는데요.

연암은 범의 입을 빌려 자연(범)의 시선에서 인간의 야만성과 잔인함, 폭력성을 거세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암의 궁극적인 의도는 인간과 문명을 거부하려는 것이 아니라 ‘범이든 사람이든 만물의 하나’임을 말하고 있는데요.

그동안 고전이 인간 중심으로 자연을 생각했다면 연암의 사상은 달랐다는 것을 깨닫는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연암은 인간의 지식은 냄새나는 가죽 부대 같은 몸에 문자 몇 개를 조금 더 아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붓이 흉기가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인간이 지각과 깨달음이 있다고 해서 남에게 잘난 척하거나 사물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인데요.

나무에서 매미가 시끄럽게 우는 건 시를 읊는 것이고 땅속에서 지렁이가 소리 내는 것은 책 읽는 소리이다. 모든 생명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각자 삶의 방식이 있고 삶의 활동을 영위한다. 그러니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착각에 빠져 자연 사물을 함부로 해치거나 업신여겨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소똥구리가 굴리는 소똥 경단이든 용의 여의주든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쓸모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입장에 서면 인간이 가장 귀하게 보이지만 하늘의 입장에서는 사람이나 범이나 개미나 모두가 각자 자리에서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다"

연암의 생태적 시선에는 모든 존재가 공생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해요. 그 궁극의 지향에는 차등적 위계질서와 차별의 세계관을 극복하여 존재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의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박수밀 교수는 연암의 생태 정신을 과거에 머물게 하지 말고 21세기 현실에서 각종 차별과 차등을 극복하고 인류 보편의 인권과 생명, 다양성의 가치를 모색하는 데에 적용해 가야 할 것을 강조했는데요. 연암은 모든 생명체는 쓸모없어 보이는 존재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소중한 쓸모를 발휘하며,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르게 드러나므로 존재를 우열로 갈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수밀교수는 강연을 마무리하며 "연암 박지원은 실학으로 대표되는 북학(北學)의 대표적 학자이자 근대 이전 산문 역사에서 가장 큰 명성과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나라엔 연암 관련 박물관이 없을 정도로 박지원의 가치가 일반 대중에게 덜 알려진 것이 현실이다.

당진엔 면양잡록, 골정지, 면천향교 등 연암 박지원 선생의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는 문화콘텐츠 기반이 갖춰져 있다. 앞으로 당진시에서 연암 박지원 선생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박물관도 조성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으면 좋겠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골정지로 향했습니다. 골정지와 건곤일초정은 연암의 이용후생의 정신이 가장 잘 담긴 장소 중 한 곳인데요. 1797년 면천군수로 부임해 3년간 재직하며 청나라에서 배워온 농업기술을 보급하기 위하여 골정지를 준설하고 건곤일초정을 지어 새로운 농사법과 농기구를 직접 이곳에서 사용했습니다.

또한 칠사고를 집필하여 수령칠사의 실천적 지침서를 저술했는데요. 이러한 실천적 경험을 국가 전체에 권장하기 위해 과농소초라는 농사서를 저술하여 정조임금에 바쳤습니다.

연암은 사물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이용후생을 실현했는데요. 골정지는 당시에 버려진 연못 한가운데에 돌을 쌓아 인공섬을 만들고, 그 위에 지은 정자입니다. 이 장소는 인근 면천향교의 유생들이 시를 읊고 학문을 익히는 장소로 사용했는데요.

보통 문명의 본질을 찾을 때 프랑스는 에펠탑, 뉴욕은 자유의 여신상 등 거창하고 대단한 것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연암은 똥과 깨진 기왓 조각이 진정한 문명의 본질이라고 했는데요.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북경에 갔더니 깨진 기왓 조각을 활용해 디자인을 만들고, 마당의 진창을 막고 더러운 똥은 버리는 게 아니라 말려 장작을 삼거나 거름으로 사용하는 등을 보면서 오히려 가장 작은 것에 위대한 본질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정지를 돌아보며 연암의 애민사상과 실학, 문명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는데요. 청나라에 발달된 문물을 배워 가난한 조선의 백성들을 살찌우려 했던 연암.

부국강병을 위해 기술 도구를 활용한 경제활동으로 백성의 삶을 도탑게 하려고 했던 연암의 애민정신. 만물과의 공생을 꿈꿨던 생태학자 등 그동안 몰랐던 또 다른 면모의 연암을 만난 시간이었습니다.

몇 년 전 당진행복아카데미에서 고미숙 평론가가 연암을 정의했던 문장을 남기며 시간 여행에서 만난 생태작가 박지원 관련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푸코가 고고학적 탐사를 무기로 근대성의 지축을 뒤흔든 전사라면 연암은 그 위를 사뿐히 날아올라 종횡으로 누비는 나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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