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에 독립 운동가가 한 마을에서 많이 배출한 의령 입산 마을

안희제 선생 생가 와 고산정(고산서당) 소개

의령군 블로그 기자단 서정호

의령군 부림면 입산마을

주소 :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마을

본인이 태어난 고장 의령이라 해서 자랑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이전 조선이 일제의 침탈을 당하여 나라를 잃고 다시 나라를 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국내외에서 펼치던 일제강점기에 한 마을에서 이렇게 많은 독립운동가가 탄생하였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의 본보기가 되고 자랑하여도 무방한 마을이라 생각되어 돋보이게 자랑하고 싶습니다.

이 마을의 독립운동가 안창제, 안준상, 안호상, 안균, 안기종, 안효제, 안희제 일곱 분은 탐진 안씨 집성촌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출생한 분입니다. 우리 모두 나라 사랑하는 애국심을 본받아 자유민주 대한민국을 자손만대에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안희제 선생의 생가를 여기에 소개합니다.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재 선생의 생가 전경

백산 안희재 선생 생가의 대문

생가와 생가 앞에 농가에서 활용하기 편리한 실질을 살려 만든 초가가 한동 세워져 있습니다.

생가와 초가 사이에 있는 장독대와 초가 앞쪽에 위치하고 있는 우물이 떨어져 있는 모양입니다.

생가와 가까운 거리에 세워진 초가는 사랑채로 사용하기도 하고 농사를 하는 사람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건물이며 보통 농가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편의를 위한 유용한 쓰임새 있는 설계로 지어진 초가로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고 방이 2개 그리고 넓은 마루가 만들어져 있는 형태의 초가입니다.

의령 안희제 생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3호로 1885년 안희제가 태어난 곳이다. 안희제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 대문채 등 3동으로 되어 있다. 안채는 앞면 6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옆에서 보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 기와 건물이다. 왼쪽에서부터 마루, 큰 마루, 방 부엌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앞면 4칸 규모의 초가 건물로 안채와 매우 가까이 붙어 있다. 안채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두 건물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고 남쪽으로 1칸 크기의 마루를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별도의 건물을 두지 않고 한 건물 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도록 여러 방을 둔 조선 시대 후기 민가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안희제는 1914년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백산상회는 단순한 개인 기업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국내 연락 거점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 60% 이상을 지원하였다. 또 민족 교육과 민족 언론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으며, 독립투사로 헌신하며 생을 마감하였다.

생가 가까이에 있는 초가의 뒷면, 실용적으로 사용하기 좋게 설계하여 지어진 사랑채입니다.

생가의 뒷면을 보고 있습니다. 저가 본 생가의 특징 중 한 가지는 생가의 4면 가운데 한 면을 제외한 세 면은 마루를 이용하여 신발을 신지 않고 통행을 할 수 있도록 지어진 것이 특징이며 가운데 부분은 문을 열면 마루와 통화를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형식으로 설계하여 지어진 형태입니다.

백산고가, 백산구랑 두개의 편액이 생가에 게시되어 있습니다.

생가의 대지는 넓은 면적입니다. 대문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화장실이 있고 화장실 앞쪽에 작은 수목 화단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생가를 바라보아 왼편에 담장과 나란히 수목 화단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기와집이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가 대부분 보이면 곳곳은 생가를 방문하는 이들의 차량을 세워둘 수 있는 주차장과 화장실이 현대식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공부한 고산제 고산서당

주소 :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의령군 부림면 입산마을의 독립운동가의 생가(고가)를 여러분 방문하였으나 고산제는 초행길입니다. 마을에 소개된 마을 지도를 보고는 찾아가기 어려웠습니다. 마을과는 동떨어져 있으며, 이름 그대로 높은 산에 있는 서당이었습니다. 길이 포장이 되어 고산제 앞까지 차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파르고 길이 아주 좁은 상태라 운전에 조심해야 할 길이었습니다. 안희제 생가에서 상로재를 지나 도보로 비탈길을 600m 정도 걸어가려니 속옷이 흠씬 젖더군요. 방문하고 싶은 분은 차량을 이용하시길 바랍니다.

고산제 가는 평탄한 길에는 들판과 어우러진 수령이 오래되어 보이는 정자나무가 아름다운 풍경으로 보여 평화롭고 한가로운 농촌의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고산제 가는 길은 상로재를 지나 위에 보이는 수목이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길이 나 있는 도로를 따라 처음은 포장이 안되어 있고 다음은 포장이 된 도로가 나타납니다. 계속 비탈길을 올라가야 합니다.

고산제 가는 길이 급경사로 되어 있어 문화재청 사업으로 복권기금으로 추진한 제설함이 설치되어 있더군요.

도로에 교행은 불가능하며 중간에 한곳 교행이 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산제에서는 차량을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고산제 전경

고산제에 들어가는 대문 밖에 살림을 살았던 가옥 한채와 화장실 시설이 되어 있습니다.

살림집 건물의 측면

고산제에 들어가는 대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17호 의령 고산재는 조선 정조 2년 1778년에 설산재 안여석이 지은 건물이다. 제사를 지내는 재실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서당으로 두루 사용되었으며, 수파 안효제, 송은 안창제, 백산 안희제 등 많은 애국지사와 인재들이 공부하였던 곳이다.

고산재는 앞면 4칸, 옆면 1, 5칸의 규모로, 옆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는 왼쪽에서부터 좁은 마루가 딸린 온돌방 2칸 대청마루 1칸,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른쪽의 온돌방 앞쪽에는 넓은 마루를 달아 위에서 보았을 때 ㄱ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고산재는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공간 구성에 중점을 두었으나, 앞쪽으로 튀어나온 넓은 마루는 풍류를 살리면서도 격식을 갖추고 있다. 조선 후기 이 지역에서 나타난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 : 고산제 안내문 이기함>

고산재 가운데 부분의 마루

앞쪽으로 한칸 튀어나온 마루로 바람을 막는 시설들이 낡아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고산재 측면의 모양

고산제에 게시되어 있는 편액 고산제, 고산서당, 차군관 이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산제 옆에 백산 안희제 독립운동가 일족의 산소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묘소가 있는 곳에서 바라본 고산제의 전경

고산제 온동방의 부엌 아궁이 시설

산길에 가을 들국화류 꽃이 화사하게 피어있었습니다.

고산제 고산서당을 내려오며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옛날 그 시절에 학동들이 흰 무명으로 된 바지저고리를 입고 머리는 길게 땋아 서책을 챙겨 상투를 한 서당의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마을에서 출발하여 약 1km의 거리를 걸어 비탈길을 걸어 산중에 있는 서당을 숨차게 걸었어야 했을 것을 생각하였고, 또 고산서당은 입산마을 뒷산에 산으로 쌓여 사방이 산의 수목만 보이고 바람 소리 새소리만 들리는 곳에서 한문 서책을 읽고 명심보감과 사서삼경을 읽으며 경제나 과학보다 정신문화에 관한 공부를 하였을 생각을 하니 그래서 이 마을에서 많은 독립운동에 헌신한 위대하신 분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는 생각을 하며 하산하였습니다.

독립운동가분들이 이 고산서당에서 학문을 익혔다고 하니 산중에서 깊은 학문을 탐 통신으로 대화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이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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