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일 전
전북 가볼만한 곳 - 세계무형문화유산 계승을 위한 고창 판소리 박물관
우리나라 최초의
판소리 박물관
'얼쑤!', '잘한다!'
“판소리” 하면, 추임새에 벌써 덩실덩실 어깨가 들썩입니다. 광대들에 의해 구전된 우리의 문화예술인 판소리는 2003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의 쾌거를 이루었는데요, 그 초석이 된 인물, 바로 신재효 선생님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고창 판소리 박물관 바로 옆에 신재효 고택이 있는데요, 이 판소리 박물관의 주인공인 신재효 선생은 어떤 사람일까요? 저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저 사진 모습은 모양성에서 고창천까지가 거의 동리정사 터였는데요, 지금 박물관이 있는 이곳은 동리정사 터의 일부였다고 해요. 담벼락가로 빙 두른 저 행랑채는 광대 소리꾼을 위한 숙식 공간이었답니다. 얼쑤~ 흙내음 넘는 소리꾼들의 소리가 쉬지 않았을 것 같지요?
이곳에 모인 광대들을 가르치기 위해 소리선생도 여럿 두었는데요, 지금의 명창들이 모두 이곳을 거쳤다고 하네요. 일종의 판소리 전문학교 격인 기관을 신재효 개인의 재력으로 해결했다고 하죠. 그렇다면 어째서 신재효 선생은 이렇게 큰일을 하게 되었을까요?
신재효는 아버지에게 큰 부를 물려받은 중인 출신입니다. 신분의 한계로 과거는 볼 수 없었지요. 하급 공무원 격인 이방이란 직업 아래 행사를 직접 주최했다고 해요, 행사 때마다 따라다니던 소리꾼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겠지요.
이로 인해 판소리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됩니다. 재력은 풍부하지, 머리는 좋지, 중인 신분이라 과거는 볼 수 없지 어쩌겠어요? 좋은 머리를 판소리에 쓰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귀명창으로만 판소리를 접하던 그는 “내용은 같은데 왜 저마다 소리는 다르지?” 관심을 집중합니다. 광대들이 글은 모르지, 통일된 매뉴얼은 없지, 그럼 이 이론을 정리해 봐? 생각한 그는 이방을 그만둔 후 재력을 거침없이 쏟아 부으며 이 동리정사를 계획하게 됩니다.
광대들의 숙식을 제공뿐 아니라 당시 열두 마당이던 판소리를 여섯 마당으로 개작하고, 판소리 이론을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광대가 등 15편의 새로운 사설도 직접 창작합니다.
신재효와 제자 진채선의 사랑이야기 도리화가
판소리는 남성 전유물인 시대에 운명의 소녀 진채선이란 여인이 나타납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당골 출신이었는데, 딸에게는 당골의 대를 잇게 하고 싶지 않았던가 봅니다. 신재효의 소문은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진채선을 신재효에게 부탁합니다.
처음엔 진채선을 허드렛일꾼으로 생각했다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인물치레, 사설치레, 득음, 너름새 등 신재효가 주장한 소리꾼의 덕목을 갖춘 그녀를?...당시로선 파격적인 시도로, 신재효는 진채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가르치게 됩니다.
그 무렵(1867년) 신재효는 경복궁 낙성연 소식을 듣고 하나의 창작을 꿈꿉니다. 진채선에게 남장을 시켜 낙성연에 보내지요. 장원을 한 채선은 대원군의 애첩이 되고 맙니다.
결국, 신재효에게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채선을 그리워하며 ‘도리화가’를 짓게 되는데, 도리화가는 스물네 살의 꽃다운 여인이 권력의 이슬로 사라진 애틋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소설가 문순태는 2015년에 장편소설 “도리화가”를 내어 영화로도 상영되었지요.
사별을 경험한 신재효에게 어쩌면 진채선이 특별함으로 다가왔던 걸까요? 스승의 삶이 아리따운 채선에게 판소리를 전수함으로 승화된 건 아니었을까요? 그들의 입장에서 지그시 바라보게 합니다.
판소리에 몰두했던 신재효는 판소리 이론가로, 지도자로 이름을 냅니다. 형식 없이 구비되던 판소리 내용을 열두 마당을 여섯 마당으로 정리합니다. 하층민의 전유물이던 판소리를 양반층에 끌어들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고도 하죠.
한편, 신재효가 판소리를 개작하지 않았다면 생생한 입말이 더욱 풍부하게 전해지지 않았을까? ‘천하고 상스러움? 그 자체에 오히려 구수함과 진정한 가치가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신재효의 판소리 개작으로 인해 이러한 찬반론이 오르내린다고도 합니다,
갈래진 생각이 난무한 것은 사람 사는 세상에 순리의 흐름이겠지요.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평가는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이러한 신재효 선생의 연구에 초석을 다진 사람이 바로 가람 이병기 선생이라고 합니다.
판소리 여섯 마당 개작을 통해 세계문화유산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 동편제 서편제 유파에 상관없이 많은 소리꾼을 배출했다는 점. 특히, 남성의 전유물이 판소리를 여성에게 최초로 소리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 대한 선생의 판소리 발전 역할에 무게를 실어봅니다.
신재효 선생은 능력과 재력, 그리고 사람됨을 빼놓을 수 없다는데요, 그의 사람됨에 대한 일화 한번 들어볼까요?
집을 지을 때 둥근 기둥은 양반만이 쓸 수 있었다죠. 둥근 기둥에 고대광실을 짓고 흠모까지 받는 신재효를 보고 배가 아팠을까요? 고변이 들어옵니다. 이에 암행어사가 천민 복장을 한 채 어험! 신재효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신분에 관계없이 친절할 뿐 아니라, 나라님도 할 수 없는 백성 살리는 그에게 단 한 마디만 했답니다. “고창읍성에서 보이는 기둥만은 네모기둥으로 바꾸도록 하시오” 모양성에서 보이는 쪽은 네모기둥 뒤쪽은 둥근기둥인 이유라고 해요.
앞서 말했듯, 2003년 세계 무형유산 선정의 초석이 되었음은 커다란 쾌거는 신재효의 판소리 여섯 마당 정리와 맛깔진 이론의 결과입니다. 무속신앙을 넘어 광대들에 의해 구전된 판소리가 신재효에 의해 광대들의 신세계를 이뤄냈음을 조명해 보았습니다.
글, 사진 = 전예라기자
- #전북특별자치도
- #2025전북
- #고창가볼만한곳
- #고창판소리박물관
- #신재효판소리
- #판소리
- #세계무형문화유산
- #전북실내가볼만한곳
- #고창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