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일 전
전북 역사기행 - 고창 단군성전과 어사각
고창의 문화와
역사를 배우는 여행
봄이 오고 있는 것은 몸이 먼저 느낀다고 하지요? 코끝이 쨍하던 매서운 바람이 많이 온화해진 것을 느낍니다. 아직 봄이 왔다고 하기에는 이른 것인지 잔설이 남아 있었던 고창으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고창읍에서 걸어서 다녀올 수 있었던 고창의 숨은 명소를 소개할까 합니다.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단군성전과 전북 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인 어사각입니다. 두 곳은 서로 도보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어서 고창의 문화와 유적을 돌아볼 수 있다는 좋은 점이 있었습니다. 먼저 단군성전부터 소개하겠습니다.
단군을 기리는 단군성전
높게 솟은 홍살문 안으로 돌계단이 3단으로 높게 조성되어 있는데요. 홍살문 옆에는 ‘단군성전’이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랍니다. 전국적으로 설립된 ‘단군성전’은 단군전, 단군사묘, 단군사우 등으로 불리며 한국의 국조인 단군의 영정이나 위패 등을 모시고 봉향하는 사당인데요.
고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의 건국이념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 있는 ‘홍익인간’입니다. 그래서인지 돌계단의 끝에 다다르면 나오는 단군성전 입구의 세 개의 문 중 가운데 문 위의 편액에 홍익문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단군성전의 문이 닫혀있는데요. 1년에 다섯 번 정도 분향이 이루어질 때 문이 열린다고 합니다. 음력 3월 3일(삼짇날)과 5월 5일 (단옷날), 9월 9일(중구절), 10월 3일 개천절에 12월 22일(동지)에 추모 분향을 진행한다고 해요. 단군성전의 본전을 보고 싶다면 옆 건물인 고창 유교문화 체험관을 통해서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본전을 보면 단군전 건립 사적비와 단군성전 건립헌성비가 좌우에 세워져 있는데요. 1979년 약 1,250명의 고창 군민이 순수한 성금을 모아 건립했다고 합니다. 단군성전의 관리는 고창 지역 유림에서 한답니다.
다시 돌계단을 올라가면 본전이 나오는데요. 한옥 건축 양식으로 단층 구조이며 제례 공간이 되는 제단이 있습니다.
성전 내부는 볼 수 없었지만, 기념행사가 있을 때는 방문객들이 참배할 수 있도록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전북에는 고창의 단군성전 외에도 순창 단성전, 정읍 단군성전, 익산 단군성전이 있습니다.
단군에 대한 봉향은 역사적으로 왕조 국가 및 민간에 의해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해요. 조선시대는 유교 중심의 국가 이념으로 단군에 대한 제사가 활발하지 않았는데 고려시대와 독립운동 시기에는 단군을 받드는 문화가 이어졌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대종교를 중심으로 단군을 모시는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고조선 건국 이념과 민족 정체성 강화의 의미로 전국 각지에 단군성전이 세워졌는데요. 종교와 관계없이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왕검으로서 단군성전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고조선의 건국이념을 되새기고 단군의 정신을 기리는 역사적·문화적 장소가 단군성정이었습니다.
전북 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
제109호 ‘어사각’
어사각은 단군성전과 가까이에 있어서 함께 둘러보면 좋은데요. 조선시대에 왕이 내린 크고 높게 지은 집을 어사각이라 하고 정려각이라고도 합니다.
정려각은 충신, 효자, 효부,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서 정려 받은 사람의 이름과 행한 일 등을 기록한 나무판이나 비석 등을 세우고, 지방의 관리에게 보호하게 했는데요. 고창의 ‘어사각’은 왕명에 따라지었다 하여 어사각이라고 합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호남에서 전사한 김해 김씨 삼현파 김극일의 후손 25명과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고 순절한 부인 5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웠는데요.
1605년에 이들의 충의를 기리고자 선조 임금이 ‘선무원종공신’을 하사하고, 옥쇄가 찍힌 공훈록 [단서철권]이라는 책을 내렸다고 합니다. 1749년에는 영조 임금의 명으로 ‘각’을 하사하여 ‘어사각’이 되었습니다. 어사각에는 [단서철권]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진흙을 이긴 돌담에 기와가 덮여 있는 담을 지나면 홍살문이 나오는데요. 충절이나 정절을 상징하는 홍살문이 격에 맞는 장소에 세워져 있습니다. 홍살문 뒤로 솟을삼문이 나오는데요.
일반적으로 정려각은 단칸 팔작지붕의 화려한 집인 데 반해 고창 어사각은 솟을대문과 맞배지붕 건물이라 검소하지만, 격조가 느껴집니다. 정면 세 칸에 측면 두 칸 규모입니다.
솟을삼문은 문고리를 열고 들어갈 수 있는데요. 안으로 들어가면 ‘어서각’ 현판이 걸린 정려각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사각의 왼쪽 방에는 ‘김해김씨-문내- 효자오열녀 사적‘이라는 글씨와 함께 행실이 적힌 정려가 전시되어 있는데요. 고창 어사각 안내문에 적혀 있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호남에서 전사한 김해 김씨 삼현파 김극일 후손 25명과 순절한 5명의 이야기가 적힌 글 같았습니다.
오른쪽 방에는 김해김씨 삼대육충신 동시순절 사적이란 정려가 보입니다. 가운데 방에는 ‘어휘급단서철권봉안’이라는 글이 쓰여있는 보관함이 있는데 아마도 [단서철권]을 보관하던 함인가 본데 아무것도 없는 걸로 보아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는 듯합니다. 함 밑에는 ‘어휘급육충신단서철권봉안지소’라고 적혀 있는 편액이 있습니다.
[단서철권]이 책자인 줄 알았는데 철로 만든 기왓장에 먹물이 아닌 빨간색 광물로 글을 쓴 것으로 왕이 내리는 일종의 국가유공자증 같은 것이라고 해요. 조선 시대에는 두루마리 문서로 주면서 공신녹권의 의미를 더하기 위해 단서철권이라는 품격을 덧붙인 것이라고 해요. 김해 김씨 삼현파는 김극일과 손자 김일손, 김일손의 조카 김대유를 삼현파라고 부르는데요.
김해 김씨 일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를 이를 장남만 남겨두고 집안의 남자들 모두와 마을 사람 수백 명을 데리고 전투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김기남은 김축의 아들로 아버지가 진주에서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김천일, 최경희 등과 합류해 전투를 벌여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이후 충남 금산군 진산의 큰 고개인 이치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순절했다고 해요.
고창 어사각은 이렇듯 신라 김유신 장군의 후예인 김해 김씨 삼현파의 절효공 김극일의 직계 근친인 25 의사와 5열부를 기리는 곳이었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 신념을 지킨 이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큰 의미를 지니며 후손들에게 교훈과 자부심을 주고 있습니다. 고창 어사각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충절과 효행을 기리는 중요한 문화유산이었습니다.
글, 사진 = 이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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