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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일 전
어린 시절 박찬호의 운동 코스, 산성찬호길에서 박찬호기념관을 거쳐 공산성 진남루까지
박찬호 선수는 IMF 시절 희망을 잃었던
한국인들에게 유일한 등불이었습니다.
메이저리그 아시아 선수 역대 최다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박찬호 선수는 IMF 시절 희망을 잃었던 한국인들에게 유일한 등불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날아오는 승전보가 고통을 잊게 하는 진통제였습니다.
박찬호는 1973년 7월 28일, 공산성의 남문인 진남루 아래에 있는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마을에서 당시 전파사를 운영하던 박재근씨의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2024년 현재 51살이 되었군요.
어린 시절 가정이 그리 넉넉하지 못하여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었고, 라면을 먹을 수 있다고 하여 야구부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박찬호는 어린 시절부터 꿈이 야무지고 끈기가 대단했습니다. 타석에 들어섰을 때 공에 대한 공포를 견디기 위하여 스스로 공산성 아래에 있는 공동묘지에 가서 담력훈련 겸 스윙 훈련을 했다는 이야기와 하체 단련을 위하여 공산성을 토끼뜀하며 오르내렸다는 일화가 회자되곤 합니다.
박찬호가 살았던 공산성 근처 있는 작은 길에 박찬호의 이름을 딴 산성찬호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며, 생가는 박찬호기념관이 되었습니다.
박찬호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그의 운동 코스의 하나였던 산성찬호길에서 박찬호기념관을 거쳐 공산성 진남루까지 걸어보겠습니다.
'61, 산성찬호길!'
박찬호의 운동 코스는 공주산성시장 건너편에 있는 골목길에서 시작합니다.
61은 박찬호 선수 메이저리그 백 넘버입니다. 박찬호 선수의 성공으로 61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야구선수 백 넘버가 되었습니다.
박찬호 생가는 공산성 자락에 있어서 꽤 가팔랐습니다. 박찬호는 운동을 겸해서 늘 이 길을 뛰어다녔다고 합니다.
산성찬호길 곳곳에는 박찬호의 벽화가 있습니다. 입구에는 박찬호기념관을 알리는 그림과 안내도가 게시되어 있습니다.
박찬호가 남긴 말도 쓰여 있군요.
"나를 슬럼프에 빠뜨리게 한 가장 큰 요인은 '안 된다'라는 생각이었다."
박찬호 선수는 매우 강한 멘탈의 소유자였으며, 마음이 안정되면 제구력도 무척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무척이나 민감한 성격이라서 잘 던지다가도 갑자기 흔들려 포볼을 난무하거나 난타를 당하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1994년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에 직행하여 명문 구단 LA 다저스의 유니폼을 입었지만, 처음에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2년 동안 마이너리그에서 고생하며 실력을 갈고닦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습니다.
힘차게 공을 뿌리는 모습이 활력이 넘치네요.
박찬호는 시속 160km를 넘나드는 강속구를 던져서 코리안 특급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특히 낙차 큰 커브는 내로라하는 메이저리거들도 헛방망이를 돌려 삼진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박찬호기념관 앞에는 제법 큰 주차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주차장은 마을 사람들의 공동으로 이용하는 곳이라서 그런지 빈자리를 찾기 힘듭니다. 인근에 있는 공산성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오는 것이 더 편할 수 있습니다.
박찬호기념관은 박찬호가 태어나서 살던 집터를 공주시가 사서 20여억 원을 들여 개관하였으며, 박찬호 선수의 소장품 등을 기탁 받아 전시하고 있습니다.
기념관 앞에는 지용호 작가가 폐타이어로 만든 BULL(황소) 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박찬호가 소띠이며, 황소가 박찬호의 강한 힘을 상징한다고 하는군요.
2층짜리 전시관에는 7개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각 전시실 전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층 전시실>
1전시실 - 박찬호 선수의 시작과 끝
2전시실 - 유소년 야구 선수 시절
3전시실 - 박찬호 선수 소재 예술작품
4전시실 - 박찬호 선수의 노력과 영광의 순간들
<2층 전시실>
5전시실 - LA다저스 이외 구단에서 활약했던 모습
6전시실 - 박찬호 선수의 과거, 미래
7전시실 - LA다저스 시절의 락커룸 재현
전시관 옆 건물에는 헬멧을 쓰고 날아오는 공을 야구 배트로 치는 야구 체험 시설도 있으며, 옥상에 조각 공원과 전망대가 있습니다.
박찬호 선수는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124승을 거둡니다. 승리를 거둘 때 사용되었던 공들이 모두 이곳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승리구를 이렇게 한자리에서 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은 승리구를 잘 모아두었다는 겁니다.
124승 아시아 선수로 메이저리그 최고 기록을 이렇게 보여드릴 수 있으니까요.
공 하나하나에 너무 많은 사람들의 소망과 기쁨이 있고 또 저에겐 아픔을 발견했던 보람의 기억이 있어 124승은 더없이 소중한 기억입니다."
메이저리그 124승은 체구가 작은 동양인으로서는 정말 달성하기 어려운 기록입니다.
국내에서 펄펄 날던 투수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단 1승도 못하고 귀국한 선수들도 있을 정도이니까요.
맨 왼쪽이 첫승, 오른쪽이 100승, 가운데가 맨 마지막 승리인 124승을 이룬 공이라고 하네요.
공에 승리를 기록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박찬호는 1994년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바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합니다. 하지만 데뷔전 등 두 번의 등판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고 마이너리그에서 2년 동안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숱한 고생을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1966년 4월 7일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구원승을 따내며 본격적인 메이저리거가 됩니다.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11년 만인 2005년에 100승을 달성하고 2007년 아시아 최다승인 124승을 기록한 뒤 은퇴합니다.
박찬호가 신고 활약했던 신발과 야구공, 유니폼 등이 실물 그대로 전시되고 있어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박찬호는 키 185cm에 몸무게 95kg의 동양인으로서는 거구입니다. 신발 사이즈가 무려 290cm, 과장을 하면 군함 같은 느낌입니다.
박찬호는 공주중동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하여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공주중학교 3학년 때는 3루수에서 투수로 포지션을 바꾸었습니다. 공주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고 2학년이던 1990년에 청룡기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습니다. 고3이었던 1991년에는 한미일 청소년야구대회 청소년대표로 미국에 간 적이 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에 입단하지 않고 한양대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한양대 3학년 시절이던 1994년 메이저리그 명문 구단 LA 다저스에 계약금 120만 달러를 받고 정식으로 입단하여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되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박찬호의 투화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풍선에 물감을 넣고 던져서 우연의 효과로 만들어진 작품이지요.
박찬호는 무척 성실하고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라서 그런지 메이저리그 입장 티켓, 선수카드, 마우스피스까지 잘 보관해 두었군요.
2층 6전시실에는 박찬호의 성장 과정과 꿈, 30년간의 야구 선수로서의 생활과 꿈나무 육성에 대한 영상이 상영되고 있습니다.
소년은 꿈을 꾸었습니다. 허황된 꿈이라고 사람들은 말했지만, 그 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습니다. 소년은 바라던 꿈을 이뤘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오직 야구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죠.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 때문에 야구부 선배들이 쓰던 글로브와 코드 물려받아야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을 들여다보지만 11살에 시작해 꼬박 30년을 채운 저의 야구 인생도 한 편의 드라마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더 많은 인내와 고통, 그리고 수많은 실수들이 저를 더 강하게 더 노력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고 싶었던 20년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 때문에 외로운 길이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고, 다시 도전할 수 있고 다시 꿈꿀 수 있는 힘을 주고 싶었습니다.
박찬호는 선수 절부터 재단법인 박찬호 장학회를 만들어 꿈나무들을 지원해 왔습니다.
그 결과 많은 꿈나무들이 훌륭한 선수로 성장하였습니다. 지금은 깨졌지만, 한 시즌 200개의 안타를 쳐 최다 안타 기록을 가지고 있는 기아의 서건창 선수도 2001년 박찬호 장학회 장학생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장지훈, 구창모, 신재영, 전상현 등 박찬호의 지원을 받은 프로야구 선수들이 많습니다.
박찬호는 앞으로도 꿈나무 육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전망대에 올라 바라본 공주 시가지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박찬호는 공산성 바로 아래서 시내를 바라보며 자랐습니다. 이곳에서 지용호 작가의 박찬호 조각상들이 힘차게 공을 뿌리고 있습니다.
이제 박찬호가 매일 올랐다는 공산성 진남루로 향합니다.
진남루로 향하는 길 담장에도 박찬호의 어록이 게시되어 있습니다.
" 오늘의 나는 어제까지의 내가 만들었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박찬호는 어렸을 때부터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꾸었고, 매일 이 길을 뛰어다니며 체력을 길렀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메이저리그 아시아 최다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진남루 입구에는 '한양길'이라는 말을 끄는 사람 조각상이 있습니다.
이 길은 조선시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충청도를 거쳐 한양으로 가는 삼남대로 9개 가운데, 제 7로에 해당하는 길입니다. 공주는 백제의 도읍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웅천주, 조선시대에는 충청감영이 있던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선비들이 과거 급제의 꿈을 꾸며 공주 공산성 진남루를 통해 한양으로 향했습니다.
소년 박찬호는 야구선수로서의 꿈을 안고 이 길을 뛰어올랐습니다.
박찬호는 체력을 기르기 위하여 매일 진남루 계단을 토끼뜀하며 오르내렸습니다. 지금 이 길은 공주 산성동, 옥룡동, 웅진동 사람들의 산책로가 되고 있습니다.
공산성의 남문인 진남루입니다. 진남루를 통해 공산성 성곽길을 걷거나 영은사를 거쳐 금강변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공주 금강변에는 배다리가 있어서 금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박찬호가 뛰어다녔던 놀이터 공산성의 모습입니다. 예전에는 이 부근에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하는데 어두운 밤에 일부러 이곳에 와서 담력을 키우기 위해서 스윙 연습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지금 이곳에서는 백제의 왕궁을 찾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공산성에서 박찬호가 태어났던 산성동을 바라다보았습니다. 소년 박찬호도 공산성에 올라 자기 집 주변을 내려보곤 하였겠지요.
박찬호는 레전드 코리안 특급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선수였던 영광스러웠던 이름을 내려놓고 2012년 11월 30일 유니폼을 벗고 30년간 지켰던 마운드를 떠났습니다.
"내가 자랑할 건 기록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해낸 것이란 사실이며, 마이너리그야말로 인내와 절제라는 소중한 것을 가르친 준엄한 학교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의 나를 만든 건 애국심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이 애국심이야말로 타국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게 했고,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고, 내가 어떤 사람들로부터 끊임없는 사랑의 에너지를 받고 있는지를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이었습니다. 가족의 사랑, 스승의 사랑, 동료의 사랑, 팬들의 사랑, 온 국민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저는 말 그대로 천지분간 못하는 천둥벌거숭이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같은 무한한 사랑을 깨달았기에 저는 30년 야구 선수 생활에서 한없는 보람을 느낍니다.
하여 저는 감히 영웅이라는 이름을 떼어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웅입니다."
박찬호기념관
위치 : 충남 공주시 산성찬호길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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