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 푸른 뱀의 기운이 오롯이 깃든

귀래정

흰 눈이 소복하게 내린 아침 순창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순창읍 가남리 남산마을 귀래정을 찾았습니다.

을사년 푸른 뱀의 기운이 오롯이 깃든 귀래정 나들이가 특별한 것은 순창의 진산 금산을 마주 보고 있는 또 다른 진산 오산의 남쪽에 있는 남산의 정기로 새해를 출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산은 60m로 야트막하지만, 정상에 서면 순창 시내를 넘어 멀리 무이산과 성미산, 회문산까지 시원스럽게 보이고 뒤돌아 서면 광주 대구 고속도로는 물론 가남 농공단지도 잘 보이는 명당 중의 명당이랍니다.

남산 기슭에서도 정남향에 자리한 설씨 부인 신경준 선 유지입니다.

정상부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학문을 논하고 시를 노래했던 귀래정이 있으며 좌측으로 정상에는 팔각정과 함께 순창이 낳은 대표적 시인인 권일송 시비도 있는데요, 차례로 만나보겠습니다.

귀래정으로 오르는 길은 여러 곳이지만, 남산마을에서 오르는 길을 택한 것은 설씨 부인 신경준 선생 유지 초입에 있는 효열 정려각이 모두 신씨이고 열녀 정려도 신씨의 부인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남산마을은 순창 설씨 관향 마을입니다. 고려 시대부터 순창 설씨가 살던 마을로 조선 세조 때 고령 신씨 신말주가 설씨 부인과 혼인을 맺으면서 인연을 맺었고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충신불사이군을 외치며 벼슬을 버리고 처가인 남산마을에 은거한 것이 지금은 순창 설씨와 고령 신씨 집성촌이 된 것입니다.

정려각은 맞배지붕으로 홑처마이며, 안에 3개의 현판이 있는데요, 현판에는 ‘효자 장사랑 신상용지려(孝子將仕郞申尙溶之閭)’, ‘열부 학생 신하록 처 유인 황주 변씨지려(烈婦學生申夏祿妻孺人黃州邊氏之閭)’, '효자 증선무랑 종부시 주부 신책지려(孝子贈宣務郞宗簿寺主簿申憡之閭)’ 라고 쓰여 있습니다.

설씨 부인 신경준 선생 유지 입구에 강천사 경내 건립한 부도암 중창 설씨 부인 권선문비 정부인 순창 설씨 송덕비에 각종 협찬·헌성 방명록비가 늘어섰습니다. 2010년 고령 신씨 귀래분화재단에서 건립한 것입니다.

설씨 부인 신경준 선생 유지는 다른 말로 귀래정 신말주 후손 세거지입니다.

즉, 조선 전기 문신 신말주와 부인 설씨 부인 그리고 후손 신경준이 태어난 생가터라고 하겠는데요, 외삼문 현판 일관문(一貫門)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음"을 이르는 말이며 신말주의 충신불사이군 정신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귀래정 신말주 후손 세거지는 현재 후손들이 살지 않습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1단 이상 높은 터에 있는 내삼문을 지나면 왼쪽부터 사당 남산사와 생가터에 있는 안채 자혜당, 남애정사가 있고 오른편으로 고령 신씨 문화유산이 보관된 유장각과 교육관 충서당이 있습니다. 귀래정은 충서당 뒤쪽으로 올라가야 하는데요, 차례로 하나씩 만나보겠습니다.

내삼문 여견문(如見門)입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出門如見大賓(출문여견대빈) "문을 나서면 사람을 대함에 큰 손님을 맞이하듯이 하라"라는 뜻으로 안채를 드나드는 내삼문 현판으로 딱 어울리는 글입니다.

여견문을 들어서면 자그마한 담장 너머로 안채 자혜당이 보입니다.

지금이야 외관상 보기 좋으라고 담장 높이를 낮췄겠지만, 과거에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내외담이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엄격했던 유교사상에 의한 남녀유별에 따라 남녀 전용공간이 분리되었는데, 여성이 사는 공간인 안채는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시선 차단용 가림벽을 쌓았은데 그게 내외담입니다.

내외담 너머로 안채 자혜당과 우측으로 사랑방 남애정사(南厓精舍)입니다.

안채에도 부엌이 있고 남애정사에도 부엌이 있어 살림방으로 사용된 공간인데요, 안채는 설씨 부인이 태어난 생가터에 지은 집으로 부부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남애정사는 아이들 방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당 남산사입니다. 안채와는 샛문으로 통하고 별도로 내삼문도 있지만, 내삼문 편액은 없습니다.

사당에는 고령 신씨 남산사우 배향록이 있는데요, 8세 신말주 배 정부인 순창 설씨부터 22세까지 총 12명의 조상들이 배향되었습니다.

그중 영조대의 실학자 18세 여암공 신경준도 있는데요, 한글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훈민정음운해와 우리나라 산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산경표 등을 저술했습니다.

귀래정으로 가는 길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는 자그마한 담장 안에는 고령 신씨 유물을 보존한 유장각이 있습니다.

주로 신씨 후손들이 남긴 서책과 목판이라는데요, 한때 보물로 지정된 설씨 부인의 권선문첩도 보존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안전상의 이유로 국립전주박물관에 보존되었습니다.

교육용 강당으로 사용하는 충서당(忠恕堂)입니다.

외삼문인 일관(一貫)과 함께 증자의 충서일관(忠恕一貫)에서 차용한 글인데요, 본뜻은 "마음의 중심과 용서가 하나로 뚫림"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이제 눈길이지만, 그리 미끄럽지 않게 야자 매트가 깔린 길 따라 귀래정(歸來亭)으로 오릅니다.

귀래정 초입에 안내문이 하나 있는데요, 귀래정 신부윤(歸來亭 申府尹)이라는 암각서가 있습니다.

눈이 쌓여 있어 글자는 잘 보이지 않는데요, 신말주가 전주 부윤 시절(1476년) 전주에서 순창을 오가며 강습하던 곳이라는 설씨 부인이 남긴 암각서라고 합니다.

신말주(申末舟, 1429~1503)는 몰라도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신말주의 형제자매는 5남 1녀로 신숙주는 형제로는 셋째(위로 형 2, 누나 1)이고 신말주는 막내입니다. 신씨 5형제 중 과거에 급제한 것은 셋째 신숙주 넷째 신송주, 막내 신말주 등 3명이었는데요, 신숙주는 1439년 문과 3위로 급제했고 신말주는 1454년, 신송주는 1457년 과거 급제했으니 신숙주가 훨씬 이른 나이에 관계에 진출해 동생들의 과거 급제에 영향을 끼쳤고 관계 진출에도 큰 도움을 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귀래정 입구에 시비는 강희맹 시문 귀래정과 김인후 시문 영귀래정(詠歸來亭)입니다.

모두 귀래정에 와서 보고 느낀 바를 쓴 시인데요, 얼마나 아름다운 정자였고 주변 풍광과 잘 어울렸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귀래정은 서거정의 귀래정기는 1477년에 지어졌습니다.

신말주는 셋째 형인 신숙주가 도승지로 있을 때 1454년 25세에 과거 급제했는데요, 과거 급제 1년 전인 1453년 10월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이 2년 뒤인 1454년 8월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관직생활 1년 만에 충신불사이군을 외치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은둔할 때 지었다고 알려졌습니다.

관직생활 1년 만에 귀래정을 지을 정도로 돈을 모았지는 않았을 것 같고요, 조선시대 오위에 속한 사직(司直, 정오품 벼슬)을 지낸 순창 설씨 설백민의 무남독녀인 설씨 부인 처가의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사위가 말 그대로 과거 급제한 명문가 자제인데, 처가로 낙향했으니 그 학식을 처가 동네 사람들을 위해 풀어내라는 배려이기도 할 것입니다.

귀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한가운데 1칸짜리 방이 하나 있습니다.

구들장 없는 마루방인데요, 뒤쪽은 문이 없고 삼면에 문이 하나씩 있습니다.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 자료인데요, 1457년 신말주가 세운 정자가 있던 터에 1974년 다시 세운 정자입니다.

지은지 50여 년 정도 되었지만, 최초 지었을 당시 왕래한 시인들이 남긴 귀래정기와 중수기, 시문 등이 편액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문화유산 가치가 높아 지정된 것 같습니다.

특이한 점은 정면에 있는 귀래정, 측면에 있는 귀래정 그리고 안쪽에 조그맣게 만든 귀래정 등 3개의 편액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중 원본은 정면에 있는 귀래정 현판인데요, 안동에 있는 이굉(1441~1516)이 1510년 지은 정자로 1513년 벼슬에서 물러난 후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같다고 하여 이름을 지었다고 한 귀래정 편액과 글씨가 거의 똑같습니다. 조선시대 초서의 일인자로 부르던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 글씨라는데요, 원본을 그대로 복사한 모사본으로 원본은 순창 장류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었으며 황기로로 신말주의 장손 신공제(申公濟,1469~1536 이조판서)와의 인연으로 1550년 써준 글씨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한운야학(閒雲野鶴) 현판입니다. '한가로운 구름 아래 노니는 들의 학'이란 뜻인데요, 18대 손자가 쓴 글씨입니다.

귀래정 내부에도 수많은 편액이 있습니다.

그중 눈에 띄는 편액은 서거정과 하서 김인후의 편액인데요,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서거정의 귀래정기입니다.

귀래정 입구에 있는 비문에 한문과 한글 번역 표기 문의 있는데 일부만 소개합니다.

"순창 남쪽에 울퉁불퉁 아름다운 산이 있으니 그 형세가 대단히 기이하고 훌륭하여 꿈틀거리고 휘돌아 가는 모양이 용이 뛰어오르는 것 같고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은 것 같기도 하며, 어찌 보면 구부린 것 같고 또는 일어난 것 같은데, 조금 내려와 동쪽에 봉우리가 뭉쳐 이루어졌다. 그 봉우리 꼭대기 평평한 땅에 3~4개 기둥을 세워 정자를 지었는데, 정자 좌우에 죽림과 박달나무숲이 컴컴할 만큼 울창하여 사계절마다 바람과 비,, 눈과 달이 알맞으니 그 가운데 화원을 만들어 홍, 백, 주황, 자주색의 각종 꽃들이 피고 지며 사시를 통하여 다함이 없다."

이제 귀래정을 나와 건너편 봉우리로 가는데요, 정자를 지었다면 아마 팔각정이 있는 곳이 더 나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명당입니다.

노송 사이로 계단식 녹차밭이 조성되었는데요, 귀래정 도시숲으로 조성한 것입니다.

팔각정에서 보니 순창 시내가 잘 보이네요.

옆에 시비도 하나 있는데요, 권일송 시인의 반딧불 시비입니다.

한국 현대 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권일송(權逸松, 1933~1995) 시인은 순창읍 가남리 출생으로 광주공고와 전남대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목포 영흥고와 문태고에서 교편을 잡았는데요, 1957년 영흥고 교사 시절 한국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에 등단했습니다. 1982년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과 1994년 한국 현대 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는데요, 그의 고향인 가남리 어렸을 적 자주 올랐던 남산에 시비를 세운 의미가 남다릅니다.

팔각정에서 본 풍경입니다.

산 아래에서 지그재그로 올라오는 산책로와 함께 녹차밭이 조성되었으며 순창 읍내가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보이죠? 뒤로는 순창 IC가 코앞인데요, 사방팔방으로 시원스러운 뷰가 명당 중의 명당임을 알 수 있는 남산입니다.

설씨 부인 신경준 유지

전북 순창군 순창읍 남산길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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