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여산면 가볼 만한 곳

가람 이병기 생가와 가람 문학관

익산시 여산면은 충남 논산과 맞닿은 곳으로

익산에서도 가장 북쪽인데요,

국문학자이자 시조시인으로

20세기 시조 중흥에 기여해 현대 시조의 아버지라

불리는 가람 이병기 선생이 태어난 곳입니다.

여산은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면

논산을 지나자마자 호남 지방에서 첫 번째로 만나는

호남 관문이어서 늘 정겨운 곳인데요,

1400년 여량현(礪良縣)과 낭산현(朗山縣)을

합쳐 여산현이라 부른 것이 시작입니다.

한때 군(郡)이었고 1699년 (숙종 25년)

2명의 왕비를 배출해 도호부가 되었지만,

1895년 (고종 32년)에 다시 군으로 격하되었다가,

1914년에 익산군에 편입된 곳인데요,

가람 이병기 선생이 태어난 1891년 당시에는

여산군이었을 정도로 큰 면입니다.

우리 방으로는 창으로 눈을 삼았다.

종이 한 장으로 우주를 가렸지만

영원히 태양과 함께 밝을 대로 밝는다. ​

이병기 선생의 대표작 창(窓)을 작품으로

꾸며 놓은 광장에는 동상을 비롯해

기념비, 시 등이 적힌 팻말 등이 있는데요,

동상 뒤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대나무 근처에

선생의 묘소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단아한 초가 앞 기다란 장방형 연못은

우담(愚潭)이라고 합니다.

선생의 조부가 1844년 집을 지을 때부터

함께 연못을 만들었다는데요,

주변으로 살구나무, 배롱나무, 산수유, 배롱나무,

동백나무 등 새싹들이 싹을 틔우고

낮 기온이 15도를 웃도는 날이 계속돼

연못 주변 생태계도 곧 활기로 넘쳐날 것 같습니다.

우담(愚潭) 한쪽에 우석(愚石)이라고

쓰인 입석도 있습니다.

'늘 변함없고 한결같은 마음'을 상징하는 용어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산다'라고 의역되는데요,

이병기 선생의 조부의 아호가 동우(東愚)여서

집을 지을 때부터 후손들이 본받으면 좋은

가훈으로 세운 것 같습니다.

가람 이병기 생가에 가면

꼭 보고 가야 할 명물이 있는데요,

생가 바로 옆에 있는 탱자나무입니다.

선생의 조부가 충남 연산에서 여산으로 내려와

집을 짓고 정착하면서 함께 심은 나무로

수령은 약 200살 정도 되는데요

2024년 11월 15일전북특별자치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탱자나무입니다.

탱자나무 수형도 독특한데요,

사람 키 정도 높이에서 가지가 6개로 나누어져

아주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수고는 5.2m에 이른다는데요,

허리 높이 지름은 19cm에 이를 정도로 우람합니다.

가을이면 노란 탱자가 열리는데요,

단독으로 있어 외부 침입 방지용은 아니고

탱자 꽃향기가 은은하고 강렬하며

열매는 소화를 돕고 기침을 가라앉히는 효능이 있어 관상용과 응급용으로 심은 듯합니다.

이병기 생가는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사랑채와 안채, 고방채, 모정으로 구분됩니다.

사랑채는 수우재(守愚齋) 현판이 걸려있고

모정에는 승운정(勝雲亭) 현판이 걸렸는데요,

이병기 생가를 수우재라고도 합니다.

수우(守愚)란 '어리석음을 지킨다.'는 뜻인데요,

마당에 자리한 우담(愚潭)과 우석(愚石)에서 보듯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살자'라는

선생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조부로부터 이어 내려온 신조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채는 4칸에 이를 정도로 큽니다.

맨 좌측에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어

사랑채 구조가 반대로 있었다면

행랑채, 문간채 역할을 했겠지만,

사랑채가 겉으로 드러난

전형적인 양반가옥이라고 합니다.

안채는 부엌과 이어지는 ㄱ자형 고패집으로

3칸의 고방채와 안채 뒤쪽 장독대가 있으며

감나무, 대추나무, 자두나무, 모과나무 등

유실수가 있어 조경도 상당히 실용적으로 식재한 듯합니다.

이제 수우재를 나와 가람 문학관으로 이동하는데요,

가람 이병기 선생의 현대 시조 혁신, 국문학 정립,

한글 및 문화 수호 활동 등 수많은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7년 11월에 개관했습니다.

이병기 (1891~1968) 선생은 술복, 문복, 제자복 등

스스로를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 자처할 만큼

술과 시조와 제자를 사랑한 분입니다.

변호사인 부친 이채 (李倸, 1868~1948)의

6남 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한성 사범학교를 졸업했으며

1912년 재학 당시 주시경 선생에게

조선어 문법을 배워

1909년 4월 13일부터 한문으로 쓰던 일기를

1919년부터 국문으로 쓰기 시작했는데요,

작고하기 4년 전인 1964년 9월 30일까지

55년간의 기록이 바로 가람 일기입니다.

가람 이병기 선생은 한성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화성 남양 초등학교에서 첫 교편을 잡고

교사 생활 중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면서 시조를 연구하고 창작했다고 합니다.

김윤경, 최현배, 최두선 등 16명과 함께

조선어 연구회를 창립하고

조선어 사전 편찬을 계획했으며

고교 교사와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강사로

조선 문학을 강의하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되고

옥고도 치렀는데요,

출감 이후 감시와 협박으로

1944년 고향으로 낙향했으며

조국이 광복되자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후배 양성에 힘쓰다 한국전쟁 때인 1952년

전북대학교 교수로 제1대와 제2대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8년 정년퇴임했습니다.

퇴임 후에도 중앙대학교와

서울대 대학원에서 강사로 활동했다는데요,

1957년 우리말 큰사전 출간기념회에 참석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 뇌일혈로 쓰러져

1958년 고향 여산으로 돌아와

10여 년간 투병하다 1968년 78세를

일기로 운명했습니다. ​

선생은 1962년 문화포장을 받았고

1977년 건국포장이 서훈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승격되었는데요,

1993년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습니다.

전시실을 둘러보다 흥미로운 콘텐츠를 발견했는데

이병기 선생이 가사를 쓴 교가가

서울대학교를 비롯해 전국에 31개나 됩니다.

전북특별자치도 지역이 대부분이고

그중 출신학교인 여산 초등학교 교가도 있는데요,

선생의 각별한 고향사랑과

여산이 호남의 첫 관문이라는 것도

교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여산은 옛 고을 호남의 첫 고을

그 역사 몇 천 년 나리어 오면서

이렇다 할만한 자랑은 없으나

그려도 우리는 못 잊는 이 고장

동정하는 동무들아 잘 배우고 잘 익히자

익산 여산은 호남의 첫 관문으로

일찌감치 천주교가 전래돼

수많은 신앙공동체와 순교자들을 배출했는데요,

인문학의 성지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와

가람 문학관에 이어 병인박해 당시 22명의 신자들이

순교한 천주교 숲정이 성지도 함께 둘러보고

1일과 6일 5일장이 서는

여산 5일 시장, 여산 향교,

천주교 박해와 관련 있는 여산 동헌과 백지사 터 등

함께 둘러보면 좋은 여산 여행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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