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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일 전
태안사 입구 조태일 시문학기념관 다시 개관하였습니다. 나만의 '시'를 찾아보세요.
조태일 시문학관 재개관
내부 수리로 인해서 한동안 문을 닫고 있었던 곡성 태안사 입구,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이 말끔한 모습으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지난 10월 19일에는 2024년 죽형 조태일 문학축전과 조태일 문학상 수상식이 성황리에 열리면서 건재함을 알렸답니다. 기다렸다는 듯 [한국소설가협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답사여행이 잇따라 진행되었고, 남도 문학기행 필수 코스답게 여행자의 발걸음도 다시 이어지고 있어요. 조태일 시인의 무엇이 그가 세상에 안녕을 고한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일까요?
시인이자 투사였던 죽형 조태일
조태일 시인의 호는 죽형(竹兄)입니다. 전남 곡성 태안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이 태안사 주지스님이었어요. 어린 나이에 태안사에서 나와 광주로 이주하였고, 광주서중과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합니다. 경희대학교에 진학하여 2학년 때(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아침선박'이라는 시로 당선됩니다. 이후 '국토서시' '식칼론'등 시대의 아픔을 담고 있으면서도 가슴 뭉클한 서정으로 가득한 주옥같은 시(詩)들을 선보입니다. 1969년에 월간 시전문지 '시인'을 창간하였습니다. 김지하. 양성우. 김준태 같은 당대 손꼽히는 저항 시인들 배출하였어요. 암울하던 유신정권 시절인 1972년 고은, 백낙청, 신경림, 황석영, 염무웅, 박태순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하여 유신독재 저항운동을 펼쳤습니다. 서슬 퍼런 긴급조치가 발동되던 시절이라 여러 번 투옥되면서 모진 고초를 당했어요. 민주투사였던 김대중. 김영삼 등의 활약 못지않게 성난 민중의 가슴에 불을 지르며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분들이죠. 그러니 조태일은 보통 시인이 아니라 투사입니다.
1988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바뀐 이후 초대 상임 이사로 취임하면서 문학을 통한 통일 운동을 주도합니다. 1989년 광주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고 이후 예술대학 초대 학장이 되었습니다. 활발한 작품 활동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던 중 1999년 홀연히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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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일은 1941년 9월 스님 신분이었던 부친 조봉호씨와 어머니 신정남씨의 7남매 중 셋째로 태안사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제 강점기때 만해 한용운 시인을 비롯한 대다수 스님들이 가정을 가졌던 상황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시인의 부친은 깨어 있는 분이었던 것 같아요.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을 열고 다양한 계몽사업을 펼치면서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시 '원달리 아버지'에 태안사에서 보낸 시절과 1949년에 갑작스럽게 거길 떠나야 했던 사건이 묘사돼 있어요. 여순사건의 불똥이 곡성으로 튀면서 부친께서는 그 불구덩이 속에서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서 필사적이면서도 긴박하게 태안사를 도망쳐 나왔던 것 같아요.
원달리 아버지
조태일
모든 소리들 죽은 듯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 1리
九山(구산)의 하나인 桐裡山(동리산) 속
泰安寺(태안사)의 중으로
서른다섯 나이에 열일곱 나이 처녀를 얻어
깊은 산골의 바람이나 구름
멧돼지나 노루 사슴 곰 따위
혹은 호랑이 이리 날짐승들과 함께
오손도손 놀며 살아라고
칠남매를 낳으시고
난세를 느꼈는지
산 넘고 물 건너 마을 돌며
젊은이들 모아 夜學(야학)하시느라
처자식을 돌보지 않고
여순사건 때는
죽을고비 수십 번 넘기시더니
땅뙈기 세간살이 고스란히 놓아둔 채
처자식 주렁주렁 달고
새벽에 고향을 버리시던 아버지.
삼십년을 떠돌다
고향 찾아드니 아버지 모습이며 음성
동리산에 가득한 듯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
폐허뿐이네 적막뿐이네.
청년 조태일은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시대정신'에 따라 투사형 시인으로 활약합니다. 김지하. 양성우. 김준태, 고은, 백낙청, 신경림, 황석영, 염무웅, 박태순 등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저항 시인으로 유신독재와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실현시켰던 위대한 문학인이죠. 그 선봉에 조태일이 있었어요. [펜이 총보다 무섭다]는 교훈을 온몸으로 보여준 장본인이죠.
아버지는 조태일에게 '앞으로 30년은 고향에 가지 말아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하직합니다.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고향에서 엄청나게 참혹한 일이 있었나봐요. 그 일이 한 세대 동안의 세월에 씻겨 잊힐 때까지 고향땅을 밟지 말라는 거였어요. 그럼에도 조태일 시인의 내면속에서 고향 곡성은 늘 간절한 그리움의 대상이었음이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납니다. 조태일은 떠나온 지 30년이 되기 무섭게 곡성으로 달려갑니다. 그 절절한 심정이 [태안사 가는 길 ]이라는 연작시에 눈물처럼 흐르고 있어요. 조태일 시인은 곡성을 참으로 사랑하였습니다.
곡성谷城으로 띄우는 편지
조태일
사람들, 곡성 사람들
고집이 바윗덩어리보다 더 센 사람들,
오늘도 푸르른 하늘 믿고
파도 파도 자갈뿐인 땅을 파면서도
압록강*보다 푸른 마음 넘실대며
사람들, 형제간인 곡성 사람들
곡성땅을 잘 지키고 계시는지
죽곡면 원달리 동리산 태안사에서 태어나
광주를 거쳐 풀씨처럼 떠돌다
서울의 한 귀퉁이에서
옥천 조가 조태일은 이 글월 올립니다.
일제하 5년을 겪고 여순사건을 겪으면서도
태안사에서 동계국민학교까지 걸어다니던 시절이
오늘까지 한시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많던 산짐승들도 다 무사한지 궁금하고요.
살아남기 위해서 새벽 압록강을 건너
광주로 피난하던 시절
뒤를 돌아보며 곡성의 산천을 모두
눈 속에 가슴속에 담았었죠.
사람들, 곡성 사람들
마음 굳기로 대나무인들 따르겠소?
마음 너그럽기로 아침햇살인들 따르겠소?
40년 풀씨처럼 떠돌다
오늘 문득 곡성을 떠올리니
눈물보다 앞서 가슴 먼저 터져오네요
이 풍파 속에서 눈을 드면 먼저 곡성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 때도
포근하고 아늑한 곡성땅에서 잠을 이룹니다.
시를 쓸 때도, 서울 거리를 누빌 때도
죽곡竹谷의 대나무처럼 꼿꼿이 생각하고
꼿꼿이 걸어다닌답니다.
곡성이여, 청청하라, 기름져라
영원하라, 고집 세우라.
* 압록강은 보성강이라고도 하는데 내가 태어난 태안사 가는 도중에 있다. 그런데 그 강 이름이 북쪽의 압록강과 같다.
곡성도 조태일 시인을 사랑하였습니다. 시인이 세상을 떠나자 곧장 어린 시절 뛰놀던 태안사 입구에 [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을 세우고 시인을 기렸어요.[조태일시문학기념관]은 '시인의 고향'을 찾아오는 문인들과 조태일의 문학세계를 사랑하는 독자들의 사랑방이 돼주었습니다.
조태일시문학기념관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은 시인의 유물전시 및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예비 문학도의 창작공간 마련을 위해 타계한지 4년이 지난 2003년에 나고 자란 태안사 입구에 세워졌습니다. 이곳에는 시인의 유품과 작품, 시인을 기리는 문학작품 등 2,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별관인 ‘시집 전시관’에는 시인이 수집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시집인 최남선의 『백팔번뇌』,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 등 희귀본을 비롯한 시집 3,000여 점이 전시돼 있습니다.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은 245.76㎥이며 시집 전시관은 313.07㎥로 1개의 세미나실과 3개의 창작실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 건물을 설계한 시인 이윤하(건축사사무소 노둣돌 대표)가 제1회 대한민국 목조건축 대전에서 본상을 수상하였을 정도로 아름다운 건물입니다. |
리모델링을 마치고 한층 깔끔해진 모습으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조태일시문학기념관 안으로 들어갑니다. 전시 구성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어요. 벽체와 바닥 색상과 조명이 확실히 환해진 것 같아 좋았어요.
노벨상을 받은 시인들의 사진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네요.
한때 우리나라를 대표한 시집들을 한데 모아놓았네요.
전시공간 입구에 오래된 피아노 한 대가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시인이 치던 피아노가 아닐까요? 배경 설명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이런 점은 좀 아쉽습니다.
장구. 파이프 담배, 지팡이. 등산 사진, 스위스 아미 나이프도 눈길을 끕니다. 시인께서는 담배와 등산을 무척 즐겼나 봅니다.
아래는 시인이 광주대학교 예술대학장 하던 시절 교수 연구실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 같습니다.
주옥같은 시들이 실려 있는 조태일 시집들이 나란히 모여 있습니다. 암울했던 시절 민중들의 가슴을 뜨겁게 덥혀준 장작불이었던 시들이 저 안에 잠들어 있습니다. 저 시들은 칼이 목에 들어와도 불의에 맞서겠다는 용기였고, 닭 모가지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는 희망이었어요. 시집에 담겨 있는 역사의 무게감때문일까요. 존경심,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아우라가 느껴졌어요.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의 유산 월간지 '시인'
1969년 8월 조태일이 창간했을 당시, 월간지 '시인' 초기 발간 본들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저 책 한 권 한 권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역사를 상징하는 귀중한 유산입니다. 김지하. 양성우. 김준태 등 한 시대를 풍미한 민중시인들은 바로 월간지 '시인'을 활동 공간으로 삼고 박정희 정권에 대한 가열찬 저항운동을 펼쳤습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지요. 그럼에도 1970년 11월 휴간할 때까지 16호를 발행하는 용기를 발휘했어요. 어쨌든 월간지 '시인'은 1970년대 민주화 운동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1983년 5월 무크지 형태로 복간돼 1986년 8월까지 출간되었습니다. 이후 복간과 휴간이 반복되다가 금년 10월 조태일 시인 25주기를 기념하여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시인'의 명맥이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어봅니다.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
조태일
어느덧 뜨거운 7월이다.
출근길을 붉게 물들었던 장미꽃은 지고 말았다.
장미가 피었던 꽃길이 꿈처럼 사라졌다.
태양이 꽃을 불태워버렸다.
꽃이 죽어버린 출근 길이 멀기만 하다.
S병원 암병동 정원을 지난다,
뽕나무 아래에서 참새와 비둘기가 튀어오른다.
지난 6월에 따먹던 오디는 달콤했다.
장미꽃과 오디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남궁옥분이 부른 노래 '재회'를 흥얼거린다.
人能弘道’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다
시인은 '도(道)란 사람이 노력을 기울여야 열리는 것이다'라는 공자님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았나 봅니다. 시인의 힘 있는 글씨가 이곳을 찾아온 우리에게 진심으로 삶에 충실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등대 같은 곳
60년대는 가난했고, 70년대는 정신없었고, 80년대는 두려운 시기였습니다. 누구든지 가슴에 멍이나 상처 하나씩은 품고 살아야 했던 시대였죠. 그땐 다들 시(詩)와 노래로 위로 받으며 아픔을 견뎠죠. 오늘날엔 시(詩)를 찾아볼 수 없네요. 미디어의 홍수, 정보의 홍수에 휩쓸려 사라져버린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시가 흐르는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은 무명의 바다를 표류하는 우리 지친 영혼들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등대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조태일시문학기념관 출구에서 서정의 원천이었던 위대한 시인들이 세상으로 향하는 우리를 배웅을 합니다.
조태일 시문학 기념관을 나오면 바로 앞에 문학인을 위한 숙소인 창작동과 더불어 시집 전시관을 겸한 카페가 있습니다. 시향 가득한 이곳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참으로 각별합니다. 시심이 절로 일어나는 그 순간을 절대 놓치지 마세요.
주차장 옆에는 조태일 시인을 추모하는 시인들의 시를 적은 현수막이 파우초처럼 휘날립니다. 정면으로는 태안사로 향하는 길이 빼꼼히
열려 있어요. 어릴 적 조태일 시인이 학교에 가기 위해 날마다 오고 가던 길입니다.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를 따라 도망쳐 나왔다가 30년 만에 찾아와 켜켜이 쌓인 그리움을 짊어지고 걸었던 길입니다. 차는 주차장에 두고 올라갈 때는 조태일 시인을 만나고, 내려올 때는 그대 영혼을 울리는 시 한편 만나기를 기원합니다.
조태일시문학기념관
여행정보
■ 개관 안내
▷ 입장료 : 무료
▷ 주차요금 : 무료
▷ 개관시간 : 09: 00~17:00 ( 동절기)
▷ 휴관일 : 월. 화요일
■주변 가볼 만한 곳
▷ 태안사
▷ 독도사진전시관: 조태일 시인이 다니던 동계 초등학교가 있던 자리
▷ 인성원 : 대황강 생태공원 산책길
▷ 대황강 출렁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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