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나루에서 금강도 보고

소나무숲길도 산책해봐요


오늘은 바람이 제법 부는 쌀쌀한 날씨입니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고마 나루로 향했습니다.

고마나루터 옆에는 금강이 흐르고 있고 주위에 큰 건물이 없어서 인지 칼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어 너무나 추운 일요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갈 수는 없지요.

지금부터 저와 함께 고마나루를 살펴 볼까요?

▲ 고마열차

고마나루에 도착하니 공주에서 종종 보았던 고마열차가 도착해 있었습니다.

공산성까지 간다고 했습니다.

열차가 너무 귀여운 모습입니다.

▲ 고마나루 안내

고마나루에 대한 안내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가까운 곳에는 공주 박물관과 고마아트센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곳은 곰사당, 고마나루 솔밭, 전망대, 수상무대입니다.

그럼 고마나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공주 고마나루

공주 고마나루는 금강 및 연미산 등 무령왕릉 서쪽으로 전개되는 낮은 구릉지대와 금강변 나루 일대로,

공주의 태동지이자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는 유서 깊은 명승지이다.

백제의 웅진 천도 시 문주왕이 천도를 위하여 이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시대 국제적 교통의 관문이며,

백제 이래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공식적인 국가의 제사 공간으로서 민중의 정서와 애환이 짙게 서려있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금강과 그 강변의 모래벌 및 450여주의 소나무 군락 그리고 연미산 자락이 함께 어우러져 경관적 가치 또한 뛰어난 명승지이다.(출처. 네이버 위키백과)

▲ 솔밭

솔밭 사이로 커다란 흙 길이 있습니다.

이길 양옆에는 소나무가 대부분입니다.

450여 주의 소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소나무를 맘껏 볼 수 있습니다.

은행나무도 한두 그루 눈에 띄지만 대부분 소나무입니다.

소나무가 원래 저렇게 굽어져서 자라는 나무였을까요?

특이하게 생긴 소나무가 많아서 소나무 보는 재미가 솔솔 합니다.

솔밭은 더 깊이 들어갈수록 소나무들이 춤을 추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가지치기를 한 가지들이 모아져 있어서 평소에 관리를 잘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금강 모습

▲ 웅진

솔밭 길 왼편으로 보면 금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강이 꽤 넓고, 건너편은 산이어서 찬바람이 더 세차게 부는 것 같았습니다.

금강 건너편 산은 벌써 가을 옷 색깔이 짙어져 가고 있네요.

천혜의 요새, 웅진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길 당시 백제는 첫 번째 도읍인 한성을 고구려 군에게 빼앗기고 급하게 도읍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새 도읍으로 여러 지역이 검토되었으나 그 중 웅진은 험준한 산지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서 육로를 통한 공격이 쉽지 않았고,

수로인 금강 또한 진입로의 폭이 좁아서 많은 병력이 한꺼번에 진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백제는 적이 어느 쪽에서 공격해도 방어하기 좋은 웅진을 두번째 수도로 선택했고,

이를 바탕으로 훗날 백제의 중흥기로 기록되는 웅진 백제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중소 도시 공주가 백제시대의 수도였다니 현재의 모습에서는 상상이 잘 안 갑니다.

그래도 그 당시 화려했을 수도 공주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 웅진단과 수신제

조금 더 걸어가니 공주 웅진단터와 수신제를 지내는 곳이 나옵니다.

어떤 곳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공주 웅진단터

이곳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가의 주관으로 금강의 수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장소이다.

웅진단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문헌과 고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웅진사, 웅진단, 웅진제소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2011년 발굴 조사 결과, 고려·조선시대 기와 건물지 1동과 담장 시설이 확인되었으며,

제사에 이용되었던 분청·백자제기와 기와, 전돌 등이 출토되었다.

웅진단과 수신제

웅진단 제사는 처음에는 곰에 대한 제사였으나 점차 수신(水神)에 대한 제사로 성격이 변화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웅진단 제사는 연 2회에 걸쳐 다른 산천제와 함께 한 번에 치러졌는데

「세종실록」 에서는 이 제사를 곰 신이 아닌 용왕 신에 대한 제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곰에 대한 제사라고 생각했으며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분의 증언에 따르면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 사람들이 웅진단에서 OO을 드렸고

제사상에는 곰이 좋아하는 도토리묵과 마를 올렸다고 합니다.

지난 2011년 인근 지역을 발굴 조사 한 결과, 조선시대 웅진단 건물터가 확인되었습니다.

여러 설이 있지만 금강 옆이라 물에 관한 신과 연관이 깊고 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걸 보면

곰에 대한 애정이 많은 듯 합니다.

▲ 곰사당

산책로를 둥그렇게 돌다 보니 곰사당이 나왔습니다.

작은 사당인데 담으로 둘러 쌓여 있고 건물이 한 채 있었습니다.

곰사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곰사당

금강에 빠져 죽은 암곰과 새끼 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제를 지낸 사당이다.

앞마당에 있는 웅신단비에는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적혀 있다.

1972년에 백제 때의 유물로 추정되는 돌곰이 웅진동에서 출토되어 현재 공주박물관에...

조선 시대 향교의 대성전을 본떠 소박하게 건축 하였으며 야트막한 담장과 아늑한 솔숲이 어우러져 신묘한 기운을 자아낸다.

단군 신화에도 곰이 나오지만 여기에도 곰 토템 신앙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네요.

고마나루에서 곰은 특별한 존재였나 봅니다.

▲ 여러 이야기

산책하는 중간 중간 안내 표지판이 있어서 발길을 멈추고 보게 됩니다.

표지판에 있는 여러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천 리 물길의 중간 정류장, 고마나루의 번영과 발전

강변 포구를 활용한 수운이 발달했던 시절, 고마나루는 전막, 장깃대 나루터 등과 함께 금강을 대표하는 나루 중 하나였습니다.

고마나루는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는 교통망 덕분에 조선 시대에는 상업의 중심지로서 명성이 높았습니다.

특히 1910년에는 공주와 군산을 정기적으로 항해하는 노선이 생겨 더욱 활기를 띠었습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고 근대 교통 수단이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고마나루는 점차 기능이 줄다가

일제 강점기 이후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이후 고마나루는 유구한 역사 문화유산을 간직한 명승지의 가치를 인정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고마나루에 잠든 백제의 숨결

공주의 옛 이름인 고마나루는 곰을 뜻하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고마나루가 큰 마을을 의미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근거는 백제 동성왕 시대에 금강이 넘쳐 200여 호가 물에 잠겼다는 기록과

당나라가 고마나루에 웅진 도독부를 설치했다는 기록, '백제가 고구려의 침략을 피해 고마나루로 옮겨 도읍하였다'라고 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등 여러 기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945년에는 큰 장마가 져서 고마나루 일대의 모래가 쓸려 나갔는데, 그 자리에 가로 세로로 쌓은 건물의 흔적이 확연히 드러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 기록들을 보면 고마나루는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변화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 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고마나루에 남아 있는 백제의 숨결은 오늘날 공주 지역이 웅진 백제의 중심부였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웅진 백제, 금강을 통한 국제 교류로 문화 강국이 되다

웅진으로 천도한 후 백제는 금강을 통한 해상 무역으로 풍부한 경제적 이익을 거두며 다시 한번 문화 강국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1971년에 발굴된 무령왕릉에서는 백제가 신라 및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알려주는 국보급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2015년 7월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이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배경에는 "백제가 중국으로부터 도시 계획, 건축 기술, 예술, 종교를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킨 뒤, 일본과 동아시아에 전해 주었음을 증명한다." 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웅진 백제시대 고마나루가 금강의 나루터로써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왕들의 은신처가 되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사비성이 함락되자 웅진으로 몸을 피해 공산성에서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의자왕은 5일 만에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고 당나라로 끌려가게 됩니다.

당시에는 고마나루가 근방의 최대 나루터였으므로 의자왕은 고마나루에서 배를 탔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또 다른 왕들인 고려 현종과 조선 인조가 공주를 은신처로 삼습니다.

두 왕들은 모두 고마나루를 통해 공주로 들어왔으며 극진한 환영을 받는 한편 난이 평정 되었다는 기쁜 소식도 듣게 됩니다.

이렇듯 한 나라의 왕이 공주를 은신처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공주가 갖는 특수성과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표지판에 써 있는 이야기를 통해 공주 고마나루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또 공주가 여러 왕들의 은신처 역할을 제대로 했다는 사실을 아니 공주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 곰 작품들

산책을 하다 보면 곰 조각상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위의 사진 맨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어떤 작품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산책길

연미산에 살고 있는 외로운 곰이 님을 찾아 산속을 거닐고 있다. 2010년 작가 김경화

행복한 오후

나무꾼과 정을 나눈 곰은 두 마리 새끼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2010년 작가 서옥재

기다림

돌아오라는 애원을 외면하고 강을 건넌 님에 절망한 곰은 강물에 몸을 던졌다. 2010년 작가 김대열

그리움을 향한 마음

어미곰과 새끼들이 떠난 님을 애절한 마음으로 그리워 하고 있다. 2010년 작가 김석우

작품에 대한 설명을 읽고 작품을 보면 정말 곰들이 작품 설명대로 보입니다.

그래서 작가인가 봅니다.

공주는 백제의 두 번째 수도였던 만큼 문화유산도 많고 볼 거리도 많습니다.

아직도 못 가본 공주의 여러 곳을 탐방해 봐야겠습니다.

이번에 고마나루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그동안에 몰랐던 여러가지 사실을 알게 되어 좋고,

솔밭 길 산책 또한 너무 좋았습니다.

다음에는 어디를 가볼까요?

고마나루

○ 장소: 충남 공주시 웅진동

* 방문날짜: 2024.11.17

※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별이님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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