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콘텐츠는 수원시 SNS 시민 서포터즈가 취재한 내용입니다."

조선 성곽의 꽃 수원화성을 축성한 정조대왕의 어진을 모신 수원 화령전을 찾았습니다. 화령전은 화성행궁 옆에 있는데요, 신성한 곳으로 입구에 하마비를 세워 예를 갖추도록 했습니다. 수원에는 수원향교, 화성행궁, 화령전, 지지대 비각 앞 하마비가 남아 있습니다.

수원 화령전으로 바로 입장하는 것이 아닌 화성행궁을 통해 갈 수 있습니다. 비가 와도 올 사람은 온다고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도 단체로 오는 화성행궁으로 주말이 아닌 평일 오전에 방문하니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수원 화령전은 화성행궁 낙남헌과 마주 보고 있습니다. 득중정을 지나 낙남헌을 둘러보고 화령전으로 가는데, 일제강점기에 파괴된 지 119년 만에 화성행궁을 완전히 복원할 때 화령전도 보수 공사했습니다.

수원 화령전은 정조의 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처음에는 영정을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봉안각에 모셨고 화성행궁이 완성된 후 행궁으로 옮겨 모셨습니다. 행궁도 본래 영정을 모시는 곳이 아니므로 1801년 별도로 영정을 모실 화령전을 행궁 옆에 나란히 건축해 영정을 모셨습니다.

원래는 수원 유수부를 겸했던 화성행궁의 북쪽에 인접하여 건립되었던 건물입니다. 건물 배치는 정전-내삼문-외삼문을 일직선상에 두고 외삼문의 좌우로는 담장을 둘러 안과 밖의 경계로 삼았습니다. 정전 뒤 나지막한 자연 경사를 이용하여 이중담장을 설치했는데 신성한 정전을 외부 세계와 차단하는 상징적 의미입니다.

임금님의 어진을 모신 곳인데 정문인 외삼문이 허술해 보입니다. 오래전 종묘를 방문했을 때 혼이 드나들 수 있도록 비틀리게 틈이 있도록 문을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이곳도 혼백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틈이 많은 듯싶습니다.

삼문이 두 개로 밖에 있는 건 외삼문, 안에 있는 건 내삼문으로 왕의 어진을 모신 곳이라 그런지 외삼문에는 신도만 있고 내삼문 안쪽엔 삼도가 있습니다. 동입서출로 동쪽 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 왼쪽으로 나왔습니다. 여기서 동서는 자연 방위인 동서남북이 아니라 유교에서 의례상 방위 기준인 배북향남에 따라, 안쪽(사당 위패 기준)에서 좌측이 동쪽으로 밖에서 보면 오른쪽이 동쪽입니다. 유교 시설물을 출입할 때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측으로 입장합니다.

정조의 어진 즉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수원 화령전은 정조 이후 모든 왕이 방문하여 제사를 지낸 곳으로 궁궐과 마찬가지로 삼도가 있습니다. 정전 좌우로 재실과 전사청이 있습니다.

제사를 주관하는 헌관이 머물며 준비했던 건물 재실로 갔습니다. 임금이 직접 제사를 지낼 때는 어재실로 왕이 지나가는 길인 어로와 잠시 대기하는 장소인 판위가 설치되었습니다.

정조 어진을 서울로 옮긴 뒤 비어있는 화령전 건물을 수원의 풍화당 어른들에게 관리하도록 해서 재실을 풍화당으로 부릅니다.

정조가 승하하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가까이에 조성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나랏일을 보던 정순왕후가 현륭원 재실에 모시고 있던 정조 어진을 화성행궁으로 옮기고 별도로 어진을 봉안할 전각을 짓도록 명령했습니다. 명에 따라 순조 1년 1801년 4월 29일 화성행궁 옆에 화령전을 완성하고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모셔져 있던 어진을 옮겨와서 봉안했습니다.

왕을 비롯한 제관들이 정전으로 가는 어도로 정조의 아들 순조가 1804년에 처음으로 화성에 내려와서 현륭원과 건릉에서 제사를 올리고, 화령전에서 술잔을 올리는 작헌례를 올렸습니다. 재위 기간 동안 총 10차례 화령전에서 작헌례를 올렸던 순조를 본받아 헌종, 철종, 고종도 화성에 내려올 때마다 작헌례를 올렸습니다.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가 중심이 되어 5일마다 어진과 화령전 건물을 살폈으며 매년 정조 탄신일과 납일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화령전 제향은 1920년 일제에 의해 정조의 진영이 창덕궁으로 옮겨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세 개의 보물을 품은 수원 화령전. 왼쪽부터 정전인 운학각, 복도각, 이완청으로 창건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던 날. 비둘기도 센치해져서 비를 맞고 있습니다. 비 오는 날 화령전에 간 이유는 기와지붕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과 빗소리 들으며 감상에 푹 빠지려고 했기 때문인데 비둘기에게 선수를 뺏겼습니다.

어진을 임시로 보관하던 이안청. 정전인 운한각을 수리하거나 변고가 생겼을 때 어진과 서책 등을 옮겨 보관했습니다.

정전과 이안청을 잇는 행각은 복도각으로 어진을 모신 정전 곁에 이안청을 두는 것은 일반적인데 정전과 이안청을 복도각으로 연결한 방식은 수원 화령전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영전 건축물에서 복도각이 적용된 최초의 사례이자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유일한 사례로 눈이나 비 올 때 어진이 젖지 않도록 지붕이 있습니다.

한 몸인 듯한 정전, 복도각, 이안청 3개의 전각은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정전인 운학각은 동향으로 배치되었으며 단층의 팔작지붕인 익공계 건물입니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기단은 정다듬한 장대석을 이용하여 바른층쌓기를 했습니다. 전면에는 원대를 배치하였고, 흑색의 방전을 깔았으며 전면 3곳, 양측면 1곳, 기단 양 측면에 계단을 설치했습니다.

정조 표준영정을 바탕으로 그린 구군복 차림의 어진을 모신 운한각.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인 화산관 이명기와 유명한 화가 단원 김홍도가 어진 화사에 참여 했던 어진은 부산 용두동 대화재 때 모두 다 타버려서 정조의 얼굴은 선원보감의 간략한 초상화로 추정할 뿐입니다. 정조를 포함한 조선 왕조 역대 임금의 어진은 한국 전쟁 당시 피난지 부산으로 옮겨졌는데 정전 협정 이후 어진을 부산에 방치하였다가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수원 화령전에서 꼭 보고 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원래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던 거북 모양을 새긴 발로 전통매듭을 알아내 복원해서 걸었습니다. 문마다 열리지 않게 하는 고리가 있는데 달팽이 모양으로 엄숙한 곳에 해학적인 문고리가 장식되어 건축가 학생들이 꼭 보고 가는 곳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 그런지 대형 화로와 화마를 막기 위한 드무도 설치했습니다.

1801년(순조 1) 창건하고 1999년 발굴 조사를 통해 건물터를 확인하고 2005년에 복원한 향대청과 전사청. 재실과 마주 보고 있습니다.

제사의 사용하는 향을 보관하는 향대청, 제례에 올릴 그릇이나 깔개 등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고 준비하는 전사청으로 전면에 두 개의 출입문이 있습니다. 넓은 문은 향문으로 향을 정전으로 가져갈 때 쓰고, 좁은 문은 일하는 사람들의 출입문으로 화령전 답사 후 나가는 문이기도 합니다.

언덕에 수원 화령전 제사에 사용하는 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인 어정이 있습니다. 정조 어진을 서울로 옮긴 후 화령전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사라졌다가 복원한 어정으로 화강석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형태로 물이 흘러넘치는 통로까지 정성스럽게 꾸몄습니다.

영전 중 온전히 남아 있는 창덕궁 선원전과 전주 경기전 그리고 수원 화령전입니다.

오늘은 세 개의 보물을 품고 있는 수원 화령전에 대해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번 주말, 화성행궁을 여행하며 화령전도 같이 둘러보시면 어떨까요?

화령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관람 시간: 09:00~18:00

관람료: 화성행궁 유료(어른 1,500원, 군인/청소년 1,000원, 초등학생 700원) 입장 후 무료 관람

휴무: 연중무휴

2024 수원시 SNS 서포터즈 박미연님이 작성해 주신 글입니다

박미연 서포터즈님의 블로그 : https://blog.naver.com/yd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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