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경상남도 온라인 홍보 명예기자단 조윤희


바람이 불 때마다 나비처럼 날갯짓을 한다고 하는 홍접초(붉은가우라)가 긴 꽃대 끝에 매달려 춤을 추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9월에 경남 산청 쪽으로 여행 삼아 놀러 왔다가 가우라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겨 봅니다.

가우라 너머로 보이는 기다란 담장을 따라 소나무도 멋있고, 은행나무도 멋있게 하늘과 담장이 어우러진 가운데 공기까지 깨끗한 산청의 이곳.

산천재라는 곳을 다녀왔는데 함께 어떤 곳인지 가보실까요?

산청을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시골이며 농촌인데도 길거리나 건물 사이사이 입 댈 것 없이 얼마나 깨끗하고 정갈하던지 깜짝 놀랄 정도였는데 이번 여행에서도 역시나 최고더라고요.

남명기념관

-주소: 경남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311

(지번. 시천면 사리 466)

-입장료: 무료

-휴무일: 매주 월요일

-운영 시간: 하절기(3~10월) 매일 10:00 ~ 18:00

동절기(11~2월) 매일 10:00 ~ 17:00

덕천서원을 들렀다가 주변에 식당을 찾으러 다니다 눈여겨 봐둔 곳 중 한 곳인 산천재를 가기 전에 길 건너에 있는 건물도 궁금해서 잠시 둘러보자 싶은 마음에 간 곳은 월요일마다 휴관이었던 '남명기념관'이더라고요.

남명기념관은 2001년에 남명 조식 선생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한 기념관인데 안으로 들어서니 수령이 꽤 되는 나무들이 제법 많이 있어 그늘을 제법 길게 드리우고 있더라고요.

중국에서 나는 옥으로 상을 만들어 보내준 것을 세운 남명 조식 선생 석상과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와 신도비문 국역비 등이 커다란 나무 사이에 자리해 있었고 기념관은 월요일 휴관이라 문이 닫혀서 바깥 정원 쪽만 둘러볼 수 있었네요.

남명기념관 옆쪽에도 건물이 있어서 가는데 우와~~~

오래된 매화나무가 담장 밖에서 길을 따라 심긴 모습에 비록 꽃이 진 뒤 잎들이 자리해 있지만 나무에서부터 그윽한 매화향이 나는 것만 같았어요. 매화가 필 때 와서 본다면 정말 장관일 것만 같아 내년의 봄을 미리 산청에서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매화나무 군락 너머 있는 이곳은 남명 조식 선생과 정경부인 남평 조씨, 숙부인 은진 송씨가 모셔진 가묘인 여재실(如在室)이랍니다.

여재실은 『논어(論語)』「팔일(八佾)」편의 ‘祭如在 祭神如神在(제여재 제신여신재)’에서 따온 것으로, 여재(如在)란 조상이 지금도 계신 듯이 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지요.

산천재(山天齋)

-주소: 경남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310-8

(지번. 시천면 사리 394)

-남명 조식 선생 생가, 고택

-국가문화재 사적 제305호

'옆의 큰 비석은 남명 선생이 이곳 산천재에서 돌아가시자 선조 대왕께서 내리신 제문을 새겨 세운 비석임"

2014년 음역 2월 8일 남명학연구소에서 산천재 앞에 세운 비석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 안내석이 나란히 서 있는데 딱 10년이 되었네요.

산천재를 둘러싸고 있는 정원... 정원이라는 말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넓은 공간에 있는 나무 중 눈에 띄는 단풍나무가 산천재를 향해 절을 하듯 숙이고 있는 모습이 신기해서 담아보았습니다.

請看千石鐘 (청간천석종)

천석 들이의 종을 보소서.

非大扣無聲 (비대구무성)

크게 울리지 않으면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네

爭似頭流山 (쟁사두류산)

어떻게 하면 저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 (천명유불명)

하늘이 울려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산천재 입구 넓은 정원에 있는 남명 조식 선생의 시비에서

산천재 입구에는 봄을 알리는 산수유 나무도 있고 목련도 있는 것이...

봄에 왔으면 좋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서 조식 선생이 기거했던 산천재로 들어갑니다.

대문채에서 바라본 산천재의 모습입니다.

물이 맑고 산이 깊은 산청은 1,000여 종의 야생 약초가 자생하고 오래된 돌담길에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룬 조식 선생의 선비 정신이 흐르는 땅이랍니다.

'실천하지 않는 학문은 죄악'이라고 가르친 조식(曺植) 선생은 연산군 7년(1501) 음력 6월 26일 진시[9] 삼가현 토동에 있는 외조부 이국(李菊)의 집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조언형이고 모친은 인천 이씨라고 합니다.

사림의 계보와 붕당을 설명할 때 서경덕과 함께 북인의 시조 중 한 사람으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조선 성리학의 거두로, 의(義)를 철저히 중시하고 현실 정치를 강하게 비판하여 파장을 일으킨 인물이며, 당대에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비견되는 명성을 떨쳤으며, 현대에도 경상남도 권역에서는 이들에게 밀리지 않는 위상을 가지고 있지요.

중국까지 유명세가 퍼진 그의 명성과 달리 마지막 생을 살았던 이곳은 참으로 소박한 참된 선비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소박함이 담긴 집 한 채였다 싶으니 남다른 심경이 되더군요.

春山底處無芳草

봄 산 어느 곳엔들 향기로운 풀 없으리 오마는

只愛天王近帝居

다만 천왕봉 하늘나라에 가까운 걸 사랑해서라네

白手歸來何物食

맨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 건가?

銀河十里喫有餘

은하수같이 맑은 물 십 리니 먹고도 남겠네

-산천재의 주련 시/덕산복거(德山卜居)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터를 잡으시고 수시로 그곳을 바라보면서 61세이던 명종 16년(1561)에 손수 심은 매화나무를 바라보았을 그의 봄날은 비록 시간 속에서 묻혔지만 다음 세대인 우리에게 전해지며 인향만리의 모델을 바라보게 된 것 같아 감동이었습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고 하는데,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義)라는 주장을 한 조식 선생은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죽어서 사간원(司諫院)과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영의정에 추서된 위인이기도 하답니다.

산천재 내부 벽면에 남명 선생이 걸어두었다는 '경'과 '의' 두 글자를 보며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왕비를 배출한 집안보다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이 낫고,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보다 문묘 배향자를 낳은 집안이 낫고, 문묘 배향자를 낳은 집안보다 처사를 배출한 집안이 낫다고 했다.'

율곡 이이의 평처럼 남명 역시 그를 처사라고 자처했다고 해요.

남명은 당대가 벼슬에 나갈 때가 아니라고 봐서 상소를 올려 벼슬을 계속해서 사양했지만 제자들의 출세를 막지는 않았던 것이 광해군까지 남명학파의 인사들이 광해군 때 집권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지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구들과 마루가 높은 것이 특징이기도 하지만 현판이 두 개나 달려 있는 것 역시 특징이기도 한 것 같더라고요.

전서체는 조윤형의 글씨이고, 해서체는 이익회의 글씨다. 이중 전서체 글씨가 멀리서도 잘 보이게 매달려 있는데, 그림을 그려놓은 듯한 회화적인 필체가 돋보이며, 뫼 산(山) 자는 조식 선생이 바라보던 지리산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 같기도 하고요.

담장 밖에서도 보이는 남명매의 모습입니다.

작은 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 점찍다가

큰소리로 요전을 읽는다

북두성이 낮아지니 창이 밝고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 있네

-조식 선생의 우연히 읊다

높이가 5.5m에 이르고, 나무가 가지를 펼치고 있는 수관폭이 5m나 되며 밑에서 3개의 줄기로 갈라져 자란 매화나무는 지금도 꽃과 열매를 잘 맺는다고 하네요.

면 2칸, 옆면 2칸. 고작 그의 집은 이것이 다였을 뿐입니다.

그의 외가인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서 퇴계 이황과 같은 해에 태어나 5세까지 살다가 아버지의 장원급제로 벼슬길에 오르자 한성부로 이사해서 아버지 조언형에게 문자를 배웠던 그는 장성한 후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의 생은 큰 전환기를 맞게 되었지요.

남명의 유적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 유적과 시천면 사리 유적 등 두 곳에 나뉘어 있는데, 원리 유적은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있는 곳이고, 사리 유적은 조식이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정진하던 산천재(山天齋)와 별묘(別廟), 조식의 묘소, 신도비 및 재실 등이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해요.

남명의 처가인 김해에 내려와 살면서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답니다. 장인인 남평조씨 충순위 조수(曺琇)는 김해 일대의 부자 가문 출신으로, 그는 처가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갖게 되어 산해정을 짓고 독서에 힘쓰며 경제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1561년 김해 산해정(山海亭)을 떠나 거처를 정하게 된 산청 산천재(山天齋) 뒤로는 덕산을 두고 앞으로는 덕천강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인 데다, 서북쪽으로는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우뚝하게 바라보이는 명당 터였을 테죠. 지리산 산줄기가 뻗어 내려온 덕산 쪽에서 그 근원처인 천왕봉을 바라보는 형세이니, 풍수에서는 이를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이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16세기 당대에 퇴계와 남명은 늘 비교되는 라이벌이었다고 해요. 낙동강을 경계 삼아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좌도에서는 퇴계가, 진주와 산청을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에서는 남명이 영남 유학의 거대 봉우리를 이루며 학문에서 선의의 경쟁을 벌였으며 심지어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신유년(1501) 닭띠 동갑내기인 데다, 1년여 시차를 두고 생을 마감한 공통점도 있다고 하니 서로에게 인연이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의 동행자였나 싶어지기도 합니다.

북도의 퇴계가 인을 강조하는 후덕한 인품의 소유자라면, 남도의 남명은 의를 중시한 기개 높은 기상의 소유자였다는 뜻이 담긴 내용을 후대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언급할 정도이니 말입니다.

조식 선생이 살았던 소박한 대청마루에 걸터 앉아서 2024년의 여름보다 더 붉은 빛으로 꽃으로 채색했을 배롱나무를 보고 있자니 매화, 산수유를 보려면 봄에, 배롱 꽃을 보려면 여름에, 단풍으로 울긋불긋할 정원의 모습을 보려면 가을에 조식 선생이 그렇게 좋아한 천왕봉의 눈 덮인 모습을 보려면 겨울에 와야만 되겠구나 싶은 생각을 하면서 4계절을 찾아도 배울 흔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마음에 새기게 되었답니다.

실제로 남명은 이곳에서 정치를 바르게 하지 못하는 왕과 고관대작들을 상대로 호통치며 유교 덕목인 경(敬)과 의에 인생을 걸었고, 그의 경의사상을 실천한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을 일으켜 크게 헌신했는데, 의병장으로 활약한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이 바로 그의 경의사상을 실천한 제자들이랍니다.

조용하고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서 남명 조식 선생의 정신이 산청군에서만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과 세계에 전해지길 소원하면서 9월 뿐만 아니라 사계절 여행하기 좋은 산천재로 관광 삼아 놀러 오세요. 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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