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

무성서원, 그 역사에 귀 기울여보다

평등과 애민, 겸손을 배우다

지난 설 연휴, 정읍에 사시는 막내 고모님께서 명절 차 우리 집을 찾으셨을 때였습니다.

“고모. 제가 전북특별자치도 기자단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번 3월에는 정읍의 명소를 한번 소개하고 싶어요. 제가 어디를 갔으면 좋겠어요?”, “다른 생각할 것 없이 무성서원이지.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된 곳이야.”

시간이 흐르고 취재 여행을 준비하는데 불현듯 고모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 무성서원! 무성서원을 가야겠다.”라고 말이죠. 그렇게 하여 카메라와 보따리 짐을 싸 정읍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3월 초에는 꽃샘추위로 느닷없이 추웠다가 따뜻하기도 하고 가끔 비가 내리다가 그쳤다가 그런 변덕스러운 날들의 연속인지라 이날은 날씨가 제법 좋지 못했습니다. 무성서원은 정읍 시내에서도 제법 떨어져 있는데 평일에 방문하여서 그런지 주차장은 비교적 한산했습니다.

무성서원을 지나는 다리에는 개천에 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습니다. 조용하고 한적하기 그지없는 이곳에서 항일 의병을 결사했던 격동의 현장 중 한 곳이라니, 믿기지 않습니다.

올해에만 여럿 보는 홍살문입니다. 올해 전주 경기전에서의 홍살문을 시작으로 광양에 있는 형제 의병장 묘역, 김제 향교 등 여러 곳에서 홍살문(紅살門)을 자주 보는 것 같습니다.

홍살문을 간단하게 소개해 드리자면 홍살문에 칠해진 붉은색은 악귀를 물리치고 그 위에 달린 화살과 삼지창은 나쁜 액운을 물리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홍살문은 조선시대 때부터 신성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서원이나 향교, 임금의 능, 충신, 열녀 등을 배출한 집안에도 홍살문이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홍살문을 지나 서원에 들어가면 여러 채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특징적인 것은 요즘 말로 건폐율이 낮아 건물마다 거리감이 있어 여유로움이 느껴지고 마을과 단절되지 않아 늘 열려 있는 느낌을 주고 있으며 대부분의 건축물 간 높이가 같은 걸 볼 수 있습니다. 무성서원은 특히 ‘평등’과 ‘애민’, ‘겸손’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서원이라고 하는데요. 신분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배움의 평등과 애민을 강조했던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열심히 카메라를 들어 서원의 모습을 하나, 하나 담는 사이 골똘히 표지판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도대체 뭘 보고 계시는 것일까요?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서원’이 지정되고 나서 무성서원은 정읍을 더욱 빛나게 하는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대표적인 9개의 서원이 있는데 무성서원은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기도 하고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에도 살아남았으며 을사늑약의 반발로 최익현(崔益鉉, 1833년 12월 5일~1907년 1월 1일(음력: 1906년 11월 17일)과 임병찬(林炳瓚, 1851년 2월 5일 ~ 1916년 5월 23일)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항일 의병을 결성한 곳이기도 합니다.

무성서원은 통일신라부터 구한말 등 여러 시대를 거쳐 간 역사 속 굵직한 인물들의 흔적이 스쳐 간 곳으로 무성서원 방문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역사 여행의 소재 보따리가 되기도 합니다.

자랑스러운 세계 유산 ‘한국의 서원’. 그러면서 9개의 서원이 차례대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은연중에 많이 들어봤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자면, ‘유네스코’는 유엔 산하의 전문 기구로 전 세계의 교육, 과학, 문화 보급과 교류를 위해 설립된 단체입니다.

유네스코가 하는 일로 대표적인 것은 세계문화유산과 세계자연유산 지정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 함은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유산으로 세계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내에서 국보와 문화재 지정을 넘어 세계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문화재로 지정받는 것을 의미하지요. 비유컨대 세계의 문화유산, 세계의 보물이랄까요. 좀 더 국제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태산사 내삼문에는 “성조액은(聖朝額恩)”과 “사림수선(士林首善)”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데 이를 ‘주련’(주련 : 벽이나 기둥에 써 붙이는 문구)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성조액은(聖朝額恩), 즉 임금께서 편액을 내려주신 은혜를 입다. 사림수선(士林首善), 사림 중에 최고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림들의 우상이 된 최치원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숙종 임금께서 현판에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뜻이지요.

사림은 고려 중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선비들의 집단'이란 뜻인데요. 조선 초기 붕당정치에서 등장한 세력 중 이들 집단의 이름을 따 ‘사림파(士林派)’의 어원이 된 것이죠.

신라 때는 태인면의 옛 지명이 ‘태산군’으로 불리던 때가 있었는데 최치원 선생이 정읍의 태산 군수로 부임한 시절에 쌓은 공적을 기리고자 태산사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통일신라 말기를 살아간 최치원 선생은 일찍이 유학 사상과 문학에 깊은 뿌리를 내린 인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걸쳐 많은 유학자들이 존경하는 인물로 추종 받고 있습니다.

최치원 선생은 강수, 설총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에 이를 정도로 뛰어난 문인이었습니다. 신라시대 불세출의 천재 문인이자 사상가이기도 하였으며 당나라 유학 시절에는 879년 ‘황소의 난’ 때 ‘황소토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이름을 날려 중국에서도 최치원 선생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와 그는 여러 고을의 태수를 역임하였는데 태산 군수 재임을 마치고 태산군을 떠날 적에 지역 주민들은 그의 인품과 선정을 잊지 못해 살아있는 사람을 모시는 사당인 생사당을 지었다고 합니다.

사당은 이후 ‘태산사’라 불리게 되었고 조선 중종 때 태인 현감이었던 ‘신잠’ 선생을 기리는 생사당과 정극인이 세운 ‘향학당’이 합쳐져 ‘태산서원’이 되었고 1696년 조선 숙종이 ‘무성서원’이라는 이름을 지어줌(사액(賜額), 임금이 이름을 내려주는 것을 말함)으로써 오늘날의 무성서원이 되었습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기리는 신사, 다자이후 텐만구

마침 얼마 전 제가 일본여행을 다녀온 터라 후쿠오카현에 있는 ‘다자이후 텐만구’에서 숭배하고 있는 인물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 道真)’를 떠올렸습니다. 실제로도 최치원 선생(857년~908년 추정)과 스가와라노 미치자네(845년~903년)는 거의 같은 시기를 살기도 했고 능력은 뛰어났으나 낮은 신분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후 ‘무성서원’과 ‘다자이후 텐만구’ 등에서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실제로도 이 둘을 비교하는 칼럼들이 있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어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으나 제가 이 기사를 쓰고 있던 와중에 일본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다자이후 텐만구’을 방문하여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알아보는 도중 불현듯 한창 취재 중이었던 ‘무성서원’을 떠올렸습니다. 일본의 신사 못지않게 우리나라에도 최치원 선생을 기리는 무성서원이 있음을 느껴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졌습니다.

신용희 불망비

‘불망비(不忘碑)’란 후세에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란 뜻으로 을사늑약에 반발하여 전개된 항일 의병 당시 최익현 선생의 뜻에 따라 의병대에 합류했던 독립운동가 신용희(申龍熙) 선생을 기리는 비석입니다. 신용희 선생은 1907년 의병을 이끌고 장성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장렬하게 전사하고 맙니다. 신용희 선생의 불망비는 일제강점기 때인 1925년에 세워졌습니다.

서호순 불망비

1849년 태인 현감이었던 서호순 선생이 무성서원의 강당을 중수하고 이에 대한 공적을 기리고자 세워진 불망비입니다.

강수재

당시 유생들이 기거했던 강수재라는 건물인데 오늘날로 치면 기숙사의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원래는 강수재는 동쪽 기숙사를 담당했고 서쪽 기숙사로 홍학재가 있었으나 현재는 강수재만 남아 있습니다. 기숙사치고는 크지 않고 아담한 편이었는데 과연 이곳에서 몇 명의 유생들이 지냈을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합니다.

자, 이렇게 무성서원을 돌아보고 다시 정읍으로 돌아갑니다. 무성서원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고즈넉하고 인근 마을과 전혀 위화감이 없는 친근한 서원의 느낌을 주었습니다. 보통 어떤 향교에는 유가 사상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대성전을 가장 높은 곳에 세워 두거나 명륜당을 마치 궁궐처럼 광활하게 짓는 경우가 있는데 무성서원은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수평적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최치원 선생의 사상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당시 봉건 사회에서 ‘평등’이란 가치를 추구했다는 사실에 특히 놀라웠습니다. 신라시대는 엄격하고도 폐쇄적인 ‘골품제(骨品制)’ 사회였기 때문에 ‘평등’의 가치가 사뭇 배치되는 측면이 있었는데 6두품 신분으로 인해 출세에 발목이 잡혀야만 했던 최치원 선생의 경험이 일찍이 ‘평등’ 사상을 추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교무류(有敎無類)’ 배움에는 ‘귀천’이 없어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은 훗날 최치원 선생의 행적에도 드러나게 되고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도 귀감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헌법 제11조가 명시하는 평등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실제로는 때로는 반칙을, 어떤 때는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인해 공정한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무성서원을 떠나며 ‘평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줍니다.


마지막으로 정읍에 들렀으니 쌍화차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정읍은 쌍화차를 특화하여 거리를 조성했는데 이른바 ‘전설의 쌍화차 거리’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요즘같이 일교차로 인해 날씨가 춥고 감기 기운마저 흐물흐물 올라오려는 와중에 쌍화차는 감기로부터 몸을 지켜주고 추운 몸을 녹여주는 보양식입니다. 정읍에는 쌍화차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쌍화차 거리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무언가 7080의 레트로한 느낌이 느껴지면서 오로지 쌍화차 하나만을 파는 비범함은 저로 하여금 더욱 쌍화차의 맛은 어떠한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대추와 생각, 잣, 은행 등이 들어간 쌍화차는 꽁꽁 얼어있던 몸을 녹여주는 듯했습니다. 쌍화차 또는 쌍화탕에는 백작약, 숙지황, 당귀, 천궁, 계피, 감초 다양한 약초가 들어갑니다. 그 덕분인지 뭔가 커피처럼 음료를 음미하는 것이 아닌 한약을 먹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오히려 쌍화차 특유의 강렬한 향이 혀끝에서부터 올라오며 온몸으로 감싸는 느낌이 제법 나쁘지 않습니다. 왜 쌍화차 거리에서 쌍화차만 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랄까요.

쌍화차 식당의 주 고객층은 50대부터 80대 등으로 대개 노년층 및 중장년층이 대다수인데 청년들도 쌍화차 거리에 오셔서 진정한 쌍화차의 매력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최치원 선생의 삶과 정읍 무성서원 이야기, 마지막으로 쌍화차 한 모금으로 이야기를 풀어 보았습니다. 제가 사는 전라남도과 전북특별자치도는 이들을 묶어 ‘전라도’ 또는 ‘호남’지역으로 부르지만 이들 지역 간에는 닮은 듯 서로 다른 분명한 매력이 있습니다.

특히 마한과 삼국시대부터 시작해 격동의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전북특별자치도는 많은 스토리가 고여 있는 살아있는 역사 공부의 장입니다. 역사와 함께 특별한 매력을 느껴보시려거든 춘삼월인 올봄에 전북특별자치도를 한 번 여행해 보시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글, 사진=조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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