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군 옥과면 합강리 임진왜란 의병장 유팽로 장군 생가터에 세워진 사당 도산사와 장군과 부인을 기리는 정렬각 그리고 장군의 애마가 묻혀 있다고 전해지는 의마총을 둘러보았습니다. 이순신. 권율. 김시민. 곽재우 등 잘 알려진 임진왜란의 영웅들 못지않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유팽로 장군에 대한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무척 아쉽습니다. 장군의 업적과 그가 이끈 호남의병대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임진왜란 의병장 영웅 유팽로의 발자취를 더듬어 봅니다.

■ 유팽로柳彭老 (1554년 ~ 1592년)

조선 중기 문신이며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1554년 옥과현( 현 곡성군 옥과면) 합강에서 태어났습니다. 자는 형숙(亨叔), 군수(君壽), 호는 월파(月坡)입니다. 1579년 생원 진사시에 입격하고, 158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습니다. 홍문관 부정자. 홍문관 박사. 성균관 학유의 관직을 거쳤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달려다가 순창에 집결한 500여 명에 이르는 불량배 무리를 설득하여 4월 20일 임진왜란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양대박 그리고 고경명과 의기투합하여 6000명에 이르는 호남연합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고경명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유팽로는 좌부장, 양대박을 우부장으로 하여 금산성으로 진격하여 호남 진격을 준비하는 왜군에 맞섭니다. 유팽로는 적이 방심하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는 신중론을 펼쳤지만 주전론이 우세하여 서둘러 공격을 감행합니다. 2만 명에 이르는 왜군과 전투를 치르면서 호남의병 대부분 전사합니다. 사투를 벌이던 유팽로도 1592년 (음력) 7월 10일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 호남연합의병은 비록 전투는 패했어도 노도처럼 밀려드는 왜군의 호남 진출을 차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대단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 중심에 의병장 유팽로가 있었습니다.

유팽로 의병장 사당, 도산사

유팽로 장군에 대한 풍성한 기록

[월파일기]에는 유팽로 의병장이 겪은 일상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월파일기를 포함하여 장군이 왕에게 올린 상소문을 비롯한 다양한 기록물을 모아 [월파집]이 후손들에 의해 편찬되었습니다. 의병 활동을 함께 했던 고경명과 양대박 등 주요 인물에 대한 기록에도 장군과 관련된 내용이 많습니다. 공식 기록인 [선조실록]에도 호남연합의병 결성과 금산전투의 전개 과정을 비롯한 장군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렇게 풍성한 기록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유팽로 장군의 실제 행적을 아주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유팽로 의병장이 태어난 합강리와 사당

유팽로, 임진왜란 최초 의병의 횃불을 들다.

일본은 조선에 사신을 보내 명나라로 들어갈 터이니 길을 내달라며 공공연하게 요구했습니다. 조정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정신 나간 원숭이' 취급을 하며 무시해버렸죠. 그런데 일본이 사전 정탐을 위해 보낸 세작들이 전국에서 발각되는 등 침략이 임박한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이 수없이 포착되었어요. 이에 깨어 있는 선비들과 무장들은 신경을 바짝 기울여 왜군의 동태를 살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한 이순신 장군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옥과 출신 문신 유팽로(이하 존칭 생략)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임진왜란 때 훈련된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조총이라는 최신 무기로 무장하여 침략한 일본에 비하면, 조선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어요. 부산포로 상륙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밀고 올라오자, 선조 임금과 중신들은 도성과 백성을 버려둔 채 도망치기에 급급했지요. 넷플릭스에서 최근 방영한 영화 [전,란]에 그 부분이 적나라하게 표현돼 있습니다. 대신 버려진 백성들은 나라를 왜군에게 항복하는 대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바로 ‘임란 의병’입니다.

마을 앞을 흐르는 합강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고 조정으로 올라간 유팽로

벼슬에서 물러나 부모님 묘소에 움막을 짓고 고향에서 시묘살이를 하던 유팽로는 위로차 찾아온 고경명의 아들 고인후로부터 동인과 서인이 피비린내 나는 정쟁을 치르는 조정의 상황과 왜군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정황을 전달합니다. 아울러 머지않아 조정에서 부를 것 같으니 준비하라는 당부도 전합니다. 시묘살이를 마친 유팽로는 가솔들에게 집 뒤에 있는 옥출산 전답에 창고를 짓고 군인들이 입을 의복과 병장기를 준비해둘 것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정 7품 홍문관 박사로 제수한다는 교지를 받고 한양으로 올라갑니다.

유팽로 의병장의 고향 합강마을과 옥출산

유팽로의 상소와 격노하는 선조

한양으로 올라간 유팽로는 지체할 겨를 없이 왜군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피 끓는 어조로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립니다.

천체의 운행이 흐트러지고 한여름에 눈이 내리는가 하면 전국 각지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하늘의 경고입니다. 성상께서는 그것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내거나 궁궐을 옮기려 하지만 무너진 덕을 바로 세워 하늘을 감응케 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변란의 기운이 온 나라를 덮고 있음을 아십니까. 그런데도 조정은 무사태평하고 관원들 사이에서는 뇌물이 만연하며 관아의 창고는 텅텅 비어 있어 도적이 따로 없습니다. 만약 당장 오늘 적이 쳐들어오면 어찌하시렵니까. 한시라도 빨리 영을 내려 나라의 기강을 올바로 세우소서.]

선조 임금은 유팽로를 어여삐 여겨 조정으로 불러 승진까지 시켜주었는데 도리어 오늘날의 혼란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힐책하는 상소를 받아들고 격노합니다.

월파 유팽로 의병장이 태어난 합강리 마을 풍경

죽을 각오로 올린 유팽로의 세 번째 상소

동인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배은망덕하고 무엄하기 짝이 없는 유팽로의 죄를 엄중히 물어야 한다고 아뢰었습니다. 아마도 선조 임금은 유팽로의 진정성을 나름 인정했던 것 같습니다. 정 7품 홍문관 박사에서 정 9품 성균관 학유로 벼슬을 두 단계 좌천하는 선에서 유팽로의 잘못을 더 이상 거론치 말 것을 명령합니다. 그런데도 유팽로는 굽히지 않고 다시 상소를 올려 왜 지난번 상소에 대해 답을 주지 않으며 자신의 충언을 듣고도 행하지 않거나 성실하게 행하지 않은 것은 주상 전하의 책임이라고 대놓고 따졌습니다. [ 성상께서는 왜 경연 때 신하가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십니까. 왜 이랬다저랬다 하십니까. ] 이미 벌을 받아 좌천된 상황에서 유팽로가 이렇게 정면으로 상소를 하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행위였습니다. 그런데도 선조 임금은 모른체하고 넘어갑니다.

선조 임금이 꿈쩍도 하지 않자 유팽로는 조정의 중신들을 찾아다니며 위험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당장 정쟁을 중단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전란에 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4월 10일 이번에는 진짜 죽을 각오를 하고 세 번째 상소를 올립니다. [파도 위로 출몰하는 교활한 섬 오랑캐가 무슨 흑심을 품고 있는지 헤아릴 수가 없어 나라가 경각의 위기로 치닫고 있는데, 성상과 조정은 왜 이리도 태평하십니까.] 그때가 임진왜란 발발 6개월 전이었습니다.

유팽로와 부랑배 500명의 만남

유팽로 뇌리를 맴돌던 불길한 예감은 생각보다 빨리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왜군 선발대가 부산포에 상륙했습니다. 참혹했던 전쟁 임진왜란이 시작된 것입니다. 유팽로는 4월 16일, 진주목사 김시민의 아들이자 자신의 제자인 김시백으로부터 왜군이 침략했다는 소식을 직접 전해 듣습니다. 한양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구해 곧장 고향 옥과현으로 달려갑니다.

4월 20일, 고향 합강과 지척인 순창 대동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 병장기를 든 수 백 명의 장정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장검을 빼 들고 소리쳤습니다. “이제 조선은 끝장났다. 양반의 나라든 왜놈 나라이든 잘 먹고 잘 살게 만 해주면 그뿐이다. 왜군과 손이 닿아 있는 자가 말하기를 전라도 고을을 빼앗아 바치면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하니 당장 순창 관아부터 쳐부수자. ” 그를 따르는 장정들이 크게 함성을 지르며 화답했습니다. 모여 있는 자들의 면면을 보니, 평소 부랑배 짓을 하면서 몰려다니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서로 합세하여 일어난 토적이 분명했습니다. 유팽로는 머뭇거리지 않고 무리 한가운데로 들어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는 옥과현 합강 사람 유팽로라고 하오.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에서 말을 달려 곧장 달려오는 길이요. “ 선동하던 사내가 유팽로의 목에 칼을 겨누며 소리쳤습니다. ” 이 양반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것이냐. “ 하지만 유팽로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 여러분은 모두 고려 때 전라도를 휩쓸고 지나간 왜구가 무슨 짓을 했는지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요. 그때 왜적이 양반과 상놈 골라가며 죽였다고 합디까. 왜군이 또다시 쳐들어온다면 그대들은 물론이고 가족들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요. 어찌 교활한 왜군 세작의 말을 믿고 반역을 도모한단 말이오. 나라에 대한 반역의 대가는 죽음뿐이라는 것을 모르시오? 왜적이 들어오면 모두가 죽습니다. 나와 함께 왜적에 맞서 싸웁시다. “한 사내가 외쳤다. ” 관아도 썩고 양반도 썩고 임금도 썩었는데 살길이 어디에 있다는 말이요. “ 그러자 유팽로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 임금도 관아도 양반도 다 썩은 것 맞소. 그러니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것이요."

유팽로 장군이 6세 때 지은 시

전쟁 시작 7일 만에 일어선 500명의 임란 최초 의병대

유팽로의 한 치 흐트러짐 없는 모습에 당황한 우두머리는 슬그머니 칼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유팽로의 말이 맞다는 쪽과 다르다는 쪽이 서로 언성을 높이며 다투었습니다. 한 사람이 유팽로에게 물었다. “ 우리가 무슨 수로 왜놈들과 맞서 싸운다는 말이오. ” “ 걱정하지 마시오. 여러분이 합심하여 싸우기를 각오한다면 다른 백성들도 여러분을 따를 것이고, 관아에서도 병장기를 내놓을 것이요. 내가 앞장설 것이요.” 무리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유팽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습니다. “ 내 말뜻을 알아들었으면 이제 결정을 하시오. 토적이 되어 왜놈의 편에 서고자 하는 사람은 여기 남고, 맞서 싸우고자 하는 사람은 오른편에 서시오.” 잠시 쭈뼛거리던 장정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오른편에 섰습니다. 순창 관아를 치려고 모인 500여 명의 부랑배가 순식간에 의병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 전라도 의병 진동장군 유팽로]라고 씐 청색 깃발을 앞세우고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순창 관아로 들어갔습니다. 임진왜란 최초 의병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유팽로 장군을 기리는 도산사

유팽로는 의병들을 옥과로 데려와 훈련시키는 한편 왜적을 토벌하기 위한 의병에 동참해달라는 격문(통제가문)을 써서 전라도 각 지역의 수령과 사림(양반)들에게 통문을 돌리고 직접 찾아다니며 설득했습니다.

■ 호남연합의병군

1592년 (이하 음력) 4월 20일, 유팽로가 순창에서 500여 명에 이르는 부랑배들을 설득해서 의병을 결성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5월 1일 유팽로가 창의격문을 각 고을에 돌리고 직접 다니면서 의병을 모집했습니다. 5월 15일 별도 의병 모집 활동에 나섰던 양대박과 함께 고경명을 담양 추성관에서 만나 의기투합했습니다. 5월 29일 유팽로와 양대박을 비롯한 각 의병장들이 이끄는 의병들이 속속 담양으로 집결하였습니다. 6월 8일 고경명을 의병장으로 하고 좌부장 유팽로, 우부장 양대박으로 하는 약 6000명에 이르는 호남연합의병군이 결성되었습니다. 담양에서 모였다 하여 담양회맹군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간단한 훈련을 거쳐 6월 11일 전주로 출진하였고 7월 9일 금산에서 왜적과 맞붙어 치열한 전투 끝에 고경명과 유팽로 장군을 포함한 대부분의 의병들이 장렬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도산사

유팽로는 동분서주하며 전라도 일원을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집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때 왜군 정찰대가 임실 갈담역에 출몰했다는 첩보를 접하고 무예가 출중한 장정 37인과 함께 그곳으로 달려가 괴멸시키는 전공을 올리자 그 소식이 삽시간에 퍼지면서 주춤하던 의병 모집에도 탄력이 붙었습니다.

1592년 (음력) 5월 23일 고경명.유팽로.양대박 등 의병 모집에 주력했던 인물들이 한데 모였습니다. 유팽로가 의병 모집 경과와 활동상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왜군을 막는 데는 오합지졸인 관군보다는 의병을 일으키는 것이 훨씬 더 유용하다는 의견에 모두가 공감합니다. ( 당시 관군을 중심으로 전라도 근왕병을 모집 중이었음 ) 고경명이 말합니다.

" 왜군의 본진은 주상 전하의 어가를 쫓아 계속 북진할 것이다. 우리는 북진하는 왜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진격 속도를 늦추고 조선의 서쪽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호남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 호남이 뚫리면 조선이 무너진다."

유팽로가 이끄는 500명의 의병대와 순창· 옥과의 수령들이 개별적으로 모집한 300명의 의병대가 가장 먼저 담양에 도착하였습니다. 고경명과 그의 제자들이 동원한 1,000여 명을 비롯하여 각 고을의 수령과 사림들도 각자 모집한 의병대를 이끌고 속속 담양으로 모였습니다. 추성관에 집결한 의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습니다. 유생들이 피가 끓어오르는 내용의 격문을 지어 낭송할 때마다 의병들의 함성에 땅이 흔들렸습니다. 호남의병대는 고경명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좌부장에 유팽로, 우부장에 양대박을 세우고 본격적인 진법 훈련에 착수하였습니다.

호남의병 진군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한 달 하고도 20일이 지난 1592년 (음력) 6월 8일, 어엿한 진용을 갖춘 6,000명에 이르는 호남연합의병군이 결성되었습니다. 말 위에 오른 의병장 고경명이 큰 소리로 격문을 읽어 내렸습니다.

[국운이 불길하여 섬 오랑캐가 불시에 침입하였다. 장수들은 헤매고 수령이라는 자들은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서 저 왜적 놈들에게 임금과 부모를 내맡겼으니 이 어찌 차마 할 노릇인가. 나 고경명은 백발노인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짐하였다. 눈물을 뿌리며 군중에게 맹세하는 도다.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들이 천둥과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하고 수레를 뛰어넘고 관문을 뛰어넘을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는 절대로 강박해서 응하거나 억지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신하로서의 충성된 마음이 함께 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혹은 무기를 빌려주고 혹은 군량을 도우며, 혹은 말을 달려 전장에서 앞장서고, 혹은 분연히 쟁기를 던지고 밭두둑에서 일어난 의병들이여, 오직 의로 돌아가서 이 전쟁을 평정하기 위해 함께 행동하자. 호걸들이 왜적을 물리치고 세상을 바로잡는 날, 임금께서 한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되리라. 그래서 마음을 터놓고 충심으로 고하는 바이니 반드시 승리하여 왜적을 물리치자. ]

고경명의 결의에 찬 격문에 육천 호남연합의병은 저마다 눈물을 글썽이며 큰 소리로 화답하였습니다. 1592년(음력) 6월 11일, 드디어 호남연합의병 담양회맹군이 진군을 시작합니다. 태인과 금구를 거쳐 전주성까지 가는 동안 더 많은 백성들이 의병에 합류하였습니다.

도산사에서 바라본 합강마을 풍경

■ 1차 금산 전투 1592년 (음력) 7월 9일 ~7월 10일

전라도 방어사가 이끄는 관군과 합류한 호남의병군은 금산성 밖에 주둔하며 금산성을 점령한 2만 병력의 왜군과 대치하다가 먼저 선공을 펼쳤습니다. 30명의 특공대가 야습을 감행하여 성안에 비격진천뢰를 던지고 불을 질러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히게 됩니다. 첫 전투에서 승기를 잡고 사기가 오른 의병과 관군은 다음날 다시 공격을 퍼부어 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입니다. 왜군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관군을 먼저 공격하여 진영을 허물어지자 이를 돕기 위해 쫓아온 의병 진영도 함께 무너지면서 갑작스럽게 수세에 몰리는 상황으로 바뀝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사투를 벌인 끝에 지휘부를 비롯한 대부분 의병이 전사합니다. 비록 전투는 패했지만 이로 인해 왜군 주력부대에 타격을 입혀 호남 진출을 차단하고 조헌과 승려 영규가 이끄는 의병들이 달려와 2차 금산 전투가 벌일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벌어줍니다. 이 두 차례의 전투로 인해서 왜군은 결국 호남 진출을 포기함으로써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이 후방 병참을 확보하여 맘껏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여건을 제공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유팽로 장군의 생가터

1592년 (음력) 7월 8일, 본진을 금산으로 옮겨 금산성에 주둔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왜군 6진과 대치하였습니다. 왜군과 본격적인 결전을 앞둔 진중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운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양대박 의병장이 급병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전주로 달려가 양대박의 임종을 지킨 유팽로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호서 의병장 조헌에게도 연락병을 보내, 금산에서 합류하여 서로 힘을 합쳐 금산성을 탈환하자고 제의하였고 조헌은 이를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전라 방어사 곽영이 이끄는 방어군도 합류하여 의병부대 맞은편에 진을 꾸렸습니다.

정열각

의병과 관군 지휘부가 함께 전략회의를 열었습니다. 눈앞에 있는 적을 향한 적개심을 불태우며 지금 당장 공격을 퍼부어 금산성을 함락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유팽로는 한사코 반대하며 신중론을 펼쳤습니다. “ 적의 병력은 2만, 우리 병력은 관군까지 합쳐 9천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저들에겐 우리보다 월등한 화기인 조총이 있습니다. 성안에 있는 적을 공격할 때는 적보다 최소한 세배 이상의 힘을 가졌을 때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은 병법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 저들과 전면전을 치르면 무조건 대패합니다. 우리는 금산성 주변 험난한 지형을 활용하여 요새로 삼고, 적이 방심하기를 기다렸다가 치고 빠지는 공격을 계속 퍼부어 적의 힘을 빼야 합니다. ” 하지만 진중에는 적이 생각보다는 약하고 대비도 소홀해 보이니 지금 곧장 공격을 퍼부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그동안 얻은 몇 번의 승리를 통해 적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장군 고경명도 유팽로의 신중론보다는 주전론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정열각

처절한 금산성 전투

(음력) 7월 9일, 날이 밝기 무섭게 관군과 의병은 병력을 좌우로 나누어 금산성을 공격했습니다. 왜군이 성문을 열고 쏟아져 나와 조총을 쏘아대자 관군과 의병대는 혼비백산하여 물러섰습니다. 산발적인 전투가 온종일 반복되었습니다. 밤이 되자 소수의 기습군을 투입하여 성 밖에서 불을 지르고 비격진천뢰를 성안으로 던져 넣어 창고가 불에 타면서 왜군 진영이 아비규환에 빠졌습니다. 의병들은 그 광경을 보고 서로 얼싸안으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음력) 7월 10일, 비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자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간밤의 승리에 고무된 진영에는 적과 정면으로 맞서도 승산이 있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왜군이 먼저 성문을 열고 나와 성벽에 바짝 다가선 관군을 공격했습니다. 관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적과 반격하자 갑자기 쏟아져 나온 수천 명의 왜군이 관군을 포위하고 조총을 난사했습니다. 전열이 순식간에 무너져 달아나기 급급한 관군을 왜군이 무섭게 추격했습니다.

위기에 빠진 관군을 구하려고 고경명이 부대를 이끌고 뛰어들려 하자 유팽로가 완강하게 반대했습니다. “ 필시 유인책일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들어가면 전멸입니다. ” “ 하지만 어찌 아군이 몰살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 붙잡을 새도 없이 선봉에선 고경명과 의병들은 말을 달려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필사적으로 후퇴하는 관군과 구하러 온 의병들이 뒤엉켜 혼란에 빠진 틈 사이로 왜군이 파고들어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유팽로가 부하에게 물었습니다. “ 대장군은 어디 계시는가.” 부하가 거짓으로 아뢰었습니다. “ 이미 몸을 피하셨습니다. 나리께서도 얼른 피하십시오. ” 말머리를 돌리려는 순간 적에게 둘러싸여 분전하는 고경명 장군이 눈에 띄었습니다. 부하가 말릴 겨를도 없이 유팽로는 말을 달려 번개처럼 전장 한복판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런 유팽로에게 고경명이 외쳤습니다. “ 내 걱정은 하지 말고 후퇴하라. 그래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지 않은가. ” 유팽로가 말했습니다. “ 아닙니다. 저는 죽어도 대장군을 따르렵니다.” 호남연합의병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우세한 병력과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오전부터 시작된 전투가 늦은 밤까지 계속되면서 왜군들의 시체도 산처럼 쌓여갔습니다.

영웅 유팽로 장군 별이 되다.

7월 11일 밤새도록 전투를 치른 다음날 아침 비로소 전장에 고요가 찾아왔습니다. 의병들도 큰 피해를 입었지만 왜군도 무수한 사상자를 낸 채 금산성을 버리고 퇴각하였습니다. 용케 살아남은 의병들이 유팽로 장군의 수급이 수습하였습니다. 이때 유팽로 장군의 나이 서른아홉이었습니다. 유팽로 장군의 수급을 애마 오려의 등에 싣자 오려는 바람처럼 달려 고향 옥과현 합강으로 향했습니다.

애마 오려가 장군의 수급과 함께 합강리로 돌아왔습니다. 부군의 무사 귀환을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던 김씨 부인은 유해를 부여잡고 울부짖다가 혼절하여 부군의 뒤를 따랐습니다. 온몸에 상처를 입은 애마 오려도 일체의 곡기를 끊고 죽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조정에서는 유팽로 의병장과 김씨부인을 기리는 정렬각을 하사하였습니다. 옥과현 동헌 부근에도 유팽로를 기리는 사당인 옥산사가 세워졌습니다. 합강리 들어가는 길목에는 애마 오려를 묻은 의마총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김인후 선생을 기리는 영귀서원과, 고경명 의병장을 모신 광주 포충사, 금산 종용당에서도 유팽로 장군을 함께 제향하고 있습니다.

1차 금산성 전투에서 고경명.유팽로.고인후를 비롯한 담양에서 회맹한 호남연합의병을 이끈 지휘부 대부분 전사했습니다. 이들의 활약에 고무된 호님 지역에서는 더 많은 백성들이 의병에 참여하였습니다. 그중 일부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에 합류하고, 일부는 권율이 이끄는 관군과 합류하여 호남을 더욱 공고하게 지켰습니다. 이때 호남연합의병이 금산성에서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지 못했다면 그들의 본진이 곧장 전주성으로 밀려 들어왔을 것입니다. 만약 전주성이 함락되었다면 호남이 무너져 이순신 장군의 수군도 힘을 쓰지 못하고 조선은 결국 왜군의 손아귀로 넘어갔을 것이다. 참다운 선비 유팽로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기가 호남을 구하고 조선을 지킨 것입니다.

의마총

유팽로 의병장의 애마인 오려를 묻은 무덤입니다. 금산 전투에서 전사한 유팽로 장군의 수급을 고향으로 모시고 와서 곡기를 끊고 죽은 의로운 말의 무덤이라 하여 의마총(義馬塚)이라 부릅니다. 주소: 전남 곡성군 입면 송전리 807-5

유팽로 장군 애마 오려가 묻힌 의마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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