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에 살아요_얼지 않은 12월
얼지 않은 12월
편안할 영(寧)과 넘을 월(越)
겨울의 시작과 함께 쏟아진 폭설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정말 ‘햇살에 눈 녹듯이’라는 표현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 폭설 뒤 찾아온 햇살 쨍쨍한 날이 며칠 지속되자 발목까지 쌓였던 눈들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영월은 다시 가을의 풍경을 되찾았다. 내 마음도 좀 간사한 게, 눈이 펑펑 내려 쌓였을 때는 눈 치우느라 힘들다고 툴툴거렸음에도, 이렇게 또 맑은 날이 계속되자 ‘겨울에는 눈이 좀 팡팡 내려줘야 할 텐데…’ 하며 다시 눈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 겨울은 여전히 따뜻하다. 12월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달 초에는 송년회 모임이 있어서 오랜만에 서울로 올라갔었는데, 세상에! 서울은 가을이었다. 서울의 날씨를 몰랐던 나는 산에서 지내던 그대로, 히트텍을 입고 목티와 기모 바지를 입고 그것도 모자라 겨울 파카를 걸친 채 서울로 올라갔었는데, 정말 너무 더웠다. 장소를 찾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한 여름처럼 땀이 줄줄 흘렀고, 실내에서는 당연히 겉옷을 벗어두고 팔을 걷어 부쳐야 했다. 바깥바람이 ‘차갑다’가 아닌 ‘시원하다’라고 느껴질 정도였으니, 서울은 여전히 가을 날씨였고, 그를 증명하듯 몇몇 젊은 사람들은 아직까지 반팔 티 하나만 입고 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겨울이 왜 이렇게 더운가. 옛날에는 추석만 지나면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 오들오들 떨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해가 지날수록 계절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는 상황들이 걱정이기도 하고, 겨울이면 겨울답게 눈이 좀 팡팡 내려줘야 하지 않나 싶다가도 막상 또 눈이 오면 이걸 언제 다 치우나 하면서 툴툴거릴 테니 나도 모르겠다. 12월에 서울에 올라갔다가 더워서 고생한 기억만이 선명하다.
무더웠던 서울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제법 바람이 차가운 게 겨울 느낌이 들었다. 역시 강원도는 강원도군. 이제야 겨울다운 날씨가 되었다. 겨우 이틀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도 집안에서는 한기가 돌았으니 밀렸던 집안일을 하며 온기를 채웠다. 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장을 보러 나섰다가 주천강에 새로 생긴 섶다리를 보게 되었다. 가을이 되면 섶다리를 새로 짓는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평소에는 딱히 강 둔치로 갈 일이 없다 보니 올해에는 이번에 처음으로 보게 된 셈이다. 남는 게 시간이라 나는 조용히 내려가 섶다리를 건너보며 강 구경을 좀 했다. 매년 더 크고 튼튼해지는 섶다리는 영월의 명물이 되었지, 하는 생각으로 한참이나 다리와 그 아래 흐르는 강물을 바라봤다. 문득, 강물 위를 유유히 날아가는 새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백로인지, 왜가리인지 모르겠지만 그 모습과 풍경이 퍽 어울려서 보기에 좋았다. 뭐 잡아먹을 게 있나 살펴보며 강 위를 스치듯 낮게 나는 모습이 평온했다.
조금 더 머물까 싶었지만, 겨울철 산의 밤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오기 때문에 서둘러 자리를 떴다. 둔치에 텐트를 친 사람들을 뒤로하고, 시골집마다 피어오르는 연기를 지나, 어스름에 물들고 있는 산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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