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과 바다, 물길 따라 흩어져 있는

부산 역사 문화유산

그 내력과 역사적 의미를 돌아보는 온라인 답사기

「부산 물길 역사의 발자취 찾아서」 일곱 번째 코스로

"부산 최대의 섬, 가덕도의 역사와 문화를 훑어보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7 코스

외양포마을 ▶가덕도등대 ▶ 대항 새바지 인공동굴

▶ 대항 포진지 인공동굴 ▶ 연대봉 봉수대 ▶ 천성진성 터

▶ 가덕진성 터 및 척화비 ▶눌차 정거마을



코스 7ㅣ부산 최대의 섬,

가덕도의 역사와 문화를 훑어보다

가덕도는 부산에서 가장 큰 섬입니다.

하지만 이 섬이 오래전부터 부산은 아니었습니다.

1989년 김해 가락·녹산과 함께 부산 강서구에 편입되기 전까지 창원(진해) 생활권이었습니다.

한편, 천혜의 자연경관을 지닌 가덕도는 지리적·군사적 요충지로서 조선시대부터 줄곧 군사지역이었답니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외양포 포진지 마을

첫 여정, 외양포로 가는 길

가덕도가 육지와 다리로 연결된 이후로도 천성이나 대항 등 섬 내 내륙 지역은 여전히 배편을 이용해야만 했는데, 섬 안의 일주도로가 정비되면서 교통 사정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래도 외양포까지 반듯한 길이 놓인 건 불과 몇 년 전(2018년)이다.

만약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520번 시내버스나 강서1번 마을버스를 타고 대항마을에 내려 1.2km 남짓 고갯길을 20분 정도 걸어서 외양포로 갈 수가 있다.

외양포는 마을 전체가 일본군 부대였다

가덕도 남단의 외양포는 이 섬 가장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어촌마을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만이 그 이름처럼 바다 바깥을 향하고 있는 외양포는 가덕도의 대항 바깥쪽 목이라 하여 본래 외항포라 불렀으나, 현재 공식 명칭은 외양포이다. 외항포가 외양포로 이름이 바뀐 연

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아마도 일본군이 들어온 이후 군사적 의미가 강조되면서 바뀐 게 아닐까?

우리나라 동남쪽 영토의 첫 관문이자 대한해협에서 진해만으로 들어오는 수로의 길목이 바로 이곳 외양포이다. 일찍이 방어와 공격기지로서의 군사 전략적·지리적 가치가 뛰어난 외양포에 눈독을 들여오던 일본은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곳에 포대 진지를 구축하고 포진지를 운용하기 위한 각종 군사시설을 건설했다.

외양포는 마을 전체가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비교적 포대 진지의 원형이 그대로 잘 남아있다.

외양포 마을의 독특한 모습

외양포마을 일본식 가옥

모든 군부대 입구에는 ‘이것’이 있다. 그렇다. 바로 ‘위병소’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대항낚시라는 간판이 달린 건물이 외양포를 찾은 이들을 가장 먼저 반긴다. 이 건물이 당시의 위병소였다. 즉 군부대 정문인 셈이다. 현재는 증축되어 변형된 상태이지만 기본 골격은 옛날 그대로다.

헌병대이다 보니 지하에는 감옥이 있었다고 하는데, 확인할 방도가 없다. 1911년부터는 위병소로 사용되었다. 마을 안으로 난 길은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길이다. 이 마을의 집들은 거의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일본집의 특징인 비늘판 벽을 하고 있으며 지붕 역시 모든 집이 맞배 형태의 삼각 지붕을 하고 누운 파도 모양의 일본식 기와를 얹었다.

여느 시골 마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이곳의 시간은 100여 년 전에 멈춰 있는 것일까?

일본군 포진지의 첫인상

사령부 발상지 표석

포진지는 안으로 엄폐되어 있어서 모르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입구에 ‘외양포 포진지 역사안내소’가 만들어져 있다. 안내소 벽면에는 ‘역사의 시간에 머물다’라는 글귀가 있는데, 이 마을 자체가 그렇지만 이곳 포진지는 그야말로 역사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

포진지 안으로 바로 들어가지 말고 안내소 옆에 있는 비석 같은 커다란 돌멩이에 새겨진 글자를 읽어보자. 읽으셨나? 세로로 ‘司令部發祥之地(사령부발상지지)’라 적혀 있다. 이곳의 내력이 새겨진 표석으로, 마을 안 밭에 처박혀 있던 것을 여기로 가져다 놓았다.

대포 방향의 의문, 어딜 향해 쏘려고?

포진지 안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두 개의 둥그런 포좌가 있는 포대가 눈에 들어온다. 육중한 280㎜ 유탄포가 놓여있던 자리다. 포대 측

면에는 남쪽 축대와 이어진 9.8m×10.5m 크기의 콘크리트 건물이 있다.

정면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다시 꺾여 들어가는 2중 출입구에 아치형 천장을 하고 있으며 지붕은 흙으로 덮은 독특한 구조의 탄약고이다. 그런데 답사 내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어째서 여섯 문의 포가 일제히 남쪽을 향해 일렬로 배치된 걸까? 포진지의 동쪽은 국수봉이, 남쪽은 남산이 완전히 가로막고 있어서 해안으로 접근하는 적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역사의 시간에 머물다

포대 맞은편 북쪽 축대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낡은 적벽돌로 문과 창을 꾸민 동굴 같은 아치형의 구조물이 두 곳 있다. 일본군 병사들이 사용했던 병사(兵舍)로 추정되며 각각 가로와 세로 6m×5m(약 9평) 규모이다.

해방 후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이 살림집으로 사용해서 한쪽 구석에 아궁이로 보이는 구조가 남아 있다. 포진지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지금은 이 시설물 안에 외양포와 관련된 각종 설명 패널들이 설치되어 있으며,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하여 자동으로 재생되는 포진지 관련 영상물도 있다.

근대도시 부산의 원형이 일본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부산은 일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도시이다. 하지만 의외로 부산에는 일제 침략을 후세에게 교육할 만한 유적이나 장소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지금의 외양포는 일본군이 주둔하던 군부대를 토대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고, 그 흔적도 비교적 잘 남아있다. 그래서 외양포는 우리에게 더욱 의미가 있다. 역사교육의 현장으로서 매우 중요한 장소이자 일본 침략의 상징으로서 보존해야 할 가치가 큰 곳이다.

군사시설보호구역 안의

가덕도등대

철조망 너머 바다 절벽 위의 새하얀 등대

가덕도등대의 전면과 측면/위에서 본 가덕도등대의 지붕과 등탑

외양포를 둘러싸고 있는 국수봉 일대에는 앞에서 잠시 언급한 관측소 외에도 화약고와 산악 보루 등 일본군 포진지와 관련된 군사시설들이 있다. 또한 등대 출입은 해군의 출입 허가를 받은 차량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대중교통이나 도보로 갈 수 없다.

등대와는 가덕도 남단 맨 끝 푸른 바다로 둘러싸인 해안절벽 위에 새하얗게 빛나는 신·구 등대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1899년 마산항이 개항하고 1905년 러일전쟁으로 진해만 요새 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이곳을 드나드는 선박이 많이 늘어나자 등대를 건설하게 되었다.

등대 현관 캐노피의 오얏꽃 문양

1909년 12월 25일 점등을 시작한 가덕도등대는 동서양의 건축 양식이 어우러진 모습을 하고 있다. 벽돌로 지은 건물의 버팀기둥 상부 형상이 고딕건축의 첨탑을 떠올리게 하고, 함석을 덮은 지붕 바깥에 두른 난간과 외벽 창문의 장식은 르네상스풍으로 만들었다.

현관에는 삼각 지붕의 캐노피를 달았는데 목재 기둥과 장식에 전통적인 의장 요소가 보이며, 특히 조선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어서 눈길을 끈다.

옛 등대와 새 등대의 동거

옛 등대 옆에는 2002년 새로 지은 등대가 있다. 최신형으로 만든 높이 40m의 등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옛 등대는 새 등대가 완공된 2002년까지 현역으로 사용했다. 등대 건설은 당시 소관부서였던 대한제국 탁지부 등대국에서 맡았지만, 설계와 시공은 일본인 기술자 몫이었다. 그래서 한국, 일본, 유럽의 건축 양식이 섞인 구조가 된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함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서구의 건축 양식, 건축 재료, 장식 기법 등이 우리나라에 도입되는 과정도 엿

볼 수 있으며 역사적·건축적으로 상당히 가치를 인정받아 2003년 9월 16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2006년 12월

에는 해양수산부 등대문화유산 제8호로 지정되었다.

대항 인공동굴의

운명

새바지 해안절벽의 인공동굴

낙석 사고로 폐쇄된 대항 새바지 인공동굴 입구

새바지샛바람, 즉 동풍을 고스란히 받는 곳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바람과 파도가 덜한 반대편에 포구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바닷바람 거센 새바지에도 아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4년 중반 이후 일본군의 전력이 급격하게 떨어지자 일본군부는 본토 결전을 준비하면서 해안 경비를 강화하였다.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도 미군의 공습과 상륙작전을 대비하여 부산과 주변 해안에 방어시설을 구축하였다. 대항 새바지 해안절벽에 인공동굴을 판 것이 그때였다. 일본군은 이 절벽 바위에 여러 개의 동굴을 뚫었다. 동굴의 넓이와 높이는 1.5~2m, 길이는 10~15m 정도이며, 일자 동굴, T자동굴, 복식 동굴 등 모양과 형태가 다양하다.

대항 인공동굴은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어 구축한 한 서린 역사 공간이다. 대항마을 노인들의 말에 따르면 북쪽의 탄광 노동자들을 데려와 인공동굴을 만들었다고 한다.

꼭 여기에 공항을 지어야 하나

대항 포진지 인공동굴 입구와 해안 데크길 / 인공동굴 내부

대항 새바지 인공동굴이 1년 이상 폐쇄된 채 별다른 조치 없이 남아있는 이유는 이곳이 가덕신공항 예정 부지이기 때문이다. 공항 건설로 어차피 없애야 할 공간이니 관리주체인 강서구가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 근현대사의 아픈 흔적인 인공동굴도, 내 첫사랑 연인과의 추억이 깃든 아름다운 몽돌해변도, 새로 지은 저 건물들도 곧 사라질 운명이다. 무엇보다 천혜의 자연경관을 지닌 이곳 전체가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산을 깎고 바다를 메워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로 바뀐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

새바지 반대편 대항포구 북서쪽 해안절벽 위에도 여러 개의 인공동굴이 있다. 폐쇄된 새바지 인공동굴과 달리 대항포구의 포진지 인공동굴은 여전히 개방되어 있다.

해안절벽을 따라 높게 깔린 데크를 걷다 보면 이내 거대한 야포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 동굴 입구에 이른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강제 동원되어 굴을 파던 조선인들과 결사 항전에 내몰린 일본군 병사들의 심정을 추측할 수 있는 모형과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동굴 내부의 통로를 따라 다양한 색상의 조명이 은은하게 들어와서 관광지 느낌도 풍긴다.

가덕도 꼭대기

연대봉 봉수대

임진왜란 발발, 왜군을 최초로 발견하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장계(전황 보고서)를 모아 쓴 『임진장초』(국보 제76호)에는 이순신이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이러한 공문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592년(선조 25) 음력 4월 13일, 대마도를 출발해 부산포로 향하던 왜군의 배들이 가덕도 앞바다에서 최초로 발견된 것이다.

당시 가덕진과 천성진은 경상우수영의 해상 방어 최전방 진지였다. 위 이순신의 장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가덕진 휘하의 천성진 관할 아래에 있던 연대봉의 봉수대에서 임진왜란의 발발을 알리는 중대한 보고가 올라온 것이다. 봉수대는 국경을 침입하는 외적을 발견하고 동향을 파악하는 관측소이자 전쟁의 긴급함을 횃불과 연기로 알리는 통신소 역할을 하는 중요한 군사시설이다.

가덕도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봉수대

연대봉 정상 표지석과 뒤로 보이는 외양포 국수봉

봉수대는 연대봉 발아래 대항포구와 새바지 해변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아주 가까이 보인다. 서쪽으로는 거가대교를 따라 거제도가, 북서쪽으로는 진해만의 여러 섬들과 마산 방향의 경관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몰운대와 마주하는 동쪽으로는 다대포 해안과, 그 사이에 낙동강을 따라 1,300리를 굽이쳐 떠내려온 모래가 만든 섬인 진우도·신자도·장자도·대마등·백합등 등이 생성되어 있다.

연대봉에서 본 거가대교와 거제도

북동쪽 가까이로는 명지 신도시와 을숙도가 나타나고 멀리로는 금정산, 백양산, 승학산, 천마산, 태종대가 차례로 펼쳐져 있다. 그 너머로 날씨가 좋아서 시계가 활짝 열린 덕분에 해운대의 마천루들까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무엇보다 남동쪽으로 일본의 대마도가 제법 선명하게 확인되니,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출몰을 최초로 알린 관측지가 왜 이곳이었는지 말로 설명할 필요 없이 그냥 저절로 알게 된다.

가덕도 연대봉 봉수대

연대봉은 봉홧불과 그 연기를 피워 오르게 하는 시설(연기나는 대)이 있는 봉우리라고 하여 붙은 명칭이다. 즉 봉수대와 관련된 이름으로, 봉수대가 설치되기 이전에는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지 원래의 이름을 알 길이 없다.

천성진과

이순신

가덕도에 수군 진영을 설치하다

조선 중종 때 가덕도에 성을 쌓고 항구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조선 초 남해안을 중심으로 왜구의 약탈에 시달렸다. 조정에서는 전국 각지에 읍성을 쌓아 관민을 보호하고 해안 방어를 위해 수군 진영을 설치하는 등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치에도 왜구의 침입이 끊이지 않자 급기야 ‘햇볕정책’ 카드를 꺼냈다. 대마도와 가까운 포구를 개항하여 왜인들이 거주하거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이른바 ‘재팬타운’을 건설하여 그들을 회유하기로 한 것이다.

고지도를 통해 본 천성진성의 모습

안내문 하나 없이 입구도 출구도 없고 오로지 터만 남은 천성진성을 찾아가니 성터 안의 땅 일부는 마을 사람들이 전답으로 이용하고 있고 일부는 그냥 버려져 있는 듯했다. 천성진이 폐지된 이후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성벽은 허물어져 내렸고 성 안에 있던 시설 또한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일부 구간의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있어서 이곳이 옛 천성진성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는 있겠지만, 지금의 모습만으로는 천성진이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 수 없다. 다만, 옛 지도를 통해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천성진성은 계속 발굴조사 중

천성진성성벽 높이 3.5m, 너비 4.5m이고, 둘레 약 960m 규모에 직사각형의 평면 형태이다. 서쪽, 남쪽, 북쪽에는 옹성(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쌓은 반원형의 작은 성벽)을 갖춘 성문터가 확인되며, 연대봉 아래인 동쪽에는 성문터가 보이지 않고 대신 성벽을 이중으로 쌓았다.

1989년 3월 10일 부산직할시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된 것을 전후하여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2022년 올해에도 2월부터 5월까지 부산박물관에서 5차 발굴조사를 진행했는데, 상당한 학술적 성과를 얻었다고 한다.

가덕진성과

대원군 척화비

가덕진은 어떤 모습이었나

가덕진성 성벽(천가초등학교 담장)

천가초등학교와 덕문중학교 일대가 옛날 가덕진이 있던 자리이다. 지금은 가덕진성 터 안팎으로 학교와 집들이 꽉 차 있어서 성벽과 관련 시설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눈썰미가 있는 독자라면 천가초등학교와 덕문중학교 담벼락에서 어렵지 않게 가덕진성 성벽의 흔적을 확인할 수가 있을 것이다.

가덕진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질 않지만, 성벽 위에 학교 담장이 놓인 까닭에 오히려 성벽이 보존된 셈이니 다행이다.

선창이 왜 거기서 나와?

성 내부가 협소하여 「가덕진도」에서 볼 수 있듯이 일부 군사시설은 성문 밖에 두었다. 특히 눈여겨볼 시설은 ‘선창’이다. 수군 진영임에도 불구하고 군선이 정박하는 핵심 시설인 선창이 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가덕대로 성북IC를 나와 오른쪽 길로 들어서야 가덕진성이 있던 동선마을이 나오는데, 왼쪽 길로 가면 선창마을이 나온다.

마을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선창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가덕진도」에서 볼 수 있는 선창의 위치가 생김새나 지형 등을 볼 때 대략 지금의 선창마을과 일치하는 것 같다. 예전에 배로만 가덕도에 들어갈 수 있던 시절에도 성북·동선마을으로 가기 위해서는 선창마을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내려야 했다. 성북이란 지명도 가덕진성 북쪽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이곳에 척화비가 있다니!

가덕진 척화비와 공덕비

1871년 신미양요를 겪은 후 그해 4월에 서울과 각지의 도회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했던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서 나타나는데, 「가덕진도」에 척화비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도회가 아닌 군사 요충지에도 척화비를 건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도 속의 이 척화비가 지금도 남아있을까? 정답은 ‘남아있다’이다.

척화비는 천가초등학교 안에 있다. 오른쪽 끝에 있는 비석이 바로 주인공 척화비이다. 원래는 지도에 나와 있는 장소에 있었겠지만,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지며 땅속 어딘가에 파묻혀버렸다. 그러던 것을 건축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하여 1995년 12월 지금의 장소로 옮기게 되었다. 오랜 세월 땅속에서 잠들어 있던 비석 치고는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140여 년이 지났음에도 글자 한자 한자가 또렷하다. 땅속에 잠들어 있던 게 오히려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섬 안의 섬 눌차

그리고 정거마을 벽화

국수봉 할매와 할배

가덕도에는 크고 작은 몇 개의 섬이 딸려있다. 대부분 사람이 살 수 없는 작은 바위섬들이지만 눌차도는 다른 섬들과 달리 규모도 크고 육지와

가까운 가덕도 입구의 섬이라서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섬 안의 섬인 눌차도 안에는 큰 마을이 넷 있다.

눌차도라는 이름은 섬의 지세가 완만하고 낮게 누워 있는 모습이라 지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길쭉한 형태의 섬이고 양쪽에 두 개의 낮은 봉우리가 있어서 얼핏 보면 마치 두 개의 섬처럼 보인다. 주봉은 동쪽에 있는 국수봉(해발138.9m)이다.

국수봉? 어째 이름이 낯설지가 않다 했더니 외양포에도 같은 이름의 국수봉이 있다. 왜 가덕도에는 이름이 같은 국수봉이 둘일까? 가덕도 주민들은 외양포는 할배국수봉, 눌차는 할매국수봉으로 부른다. 부부 국수봉인 셈인 데, 외양포 국수봉은 전장에 나가 싸워온 남성을 말하고, 눌차 국수봉은 전장을 지원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가덕도 숭어와 눌차 굴 양식

눌차 굴 양식장과 조개껍데기 더미

가덕도는 자연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험난한 ‘길목’이었다. 자연적으로는 가덕도가 태풍의 길목이어서 거의 매년 직간접적인 태풍 피해를 본다. 하지만 자연은 험난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풍성함도 안겨주었다. 가덕도 해안은 파도가 적은 내 만이면서 수심이 깊고 조류 흐름이 원활해 물이 깨끗하다.

또한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길목이라서 숭어와 대구 등의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 특히 가덕도 숭어는 전국적으로 유명한데, 육질이 부드럽고 향긋한 단맛이 일품이어서 임금님 수라상에도 진상되었다고 한다.

가덕도 숭어보다 더 유명한 건 굴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굴, 대구 등을 이곳 토산으로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예로부터 굴이 풍부했다. 가덕도는 담수 유입량이 적당하고 플랑크톤 번식에 필요한 영양염류가 풍족해 굴 생장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정거마을 벽화마을 생태마을

정거벽화마을 입구

정거마을은 눌차 국수봉 아래 정거마을은 외양포와는 반대편의 가덕도 끝자락이다. 이 마을은 여느 어촌마을과 달리 바다가 움푹 들어간 만이 아니라 불쑥 튀어나온 곶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옛날부터 먼바다로 고기잡이 나가는 어선들은 풍랑이 심할 때면 파도가 잠잠해질 때까지 바닷길 길목인 여기서 닻을 내리고 기다렸다고 해서 ‘닻걸이마을’이라고 불렀다.

‘1904 흐르는 섬 가덕도’ 벽화

이 마을은 지금 정거마을, 정거생태마을, 정거벽화마을, 정거마을 문화거리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주민 대부분이 어업이나 굴 종패 양식업을 하는 이 마을은 환경부가 선정한 전국 생태보전지역 습지생태체험 시범마을 다섯 곳 중 한 곳으로 선정되었고, 2012년 부산광역시 커뮤니티뉴딜시범지역 사업장에 선정된 후 60여 세대의 집 담벼락에 어촌 향기가 가득한 독특한 벽화들이 그려졌다.

마을 입구에는 ‘1904, 흐르는 섬 가덕도’라는 문구가 반긴다. 가덕도의 역사성, 장소성, 현재성을 모두 함축하는 작명 센스가 돋보이는 문구다. 마을은 생각보다 아담하다. 차가 다니지 못하는 좁은 골목길 양쪽으로 줄지어 선 집들의 담벼락에도 대문에도 길바닥에도 벽화가 가득한, 그야말로 마을 전체가 하나의 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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