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유성구 가장동의 조용한 과학단지. 봄이면 조폐공사 방향으로 탄동천을 따라 벚꽃 나들이를 오는 사람들로 붐빕니다. 대전교육과학연구원 뒤편에는 매봉산이라고 불리는 작은 산이 있는데 이곳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 창주 김익희 선생의 묘가 있습니다.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5호)

김익희(金益熙, 1610-1656)는 조선시대 대사성, 대사헌,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2023년 드라마<연인>의 배경이었던 병자호란 시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김익희는 청나라와 화평을 반대하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척화론자로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자, 임금(인조)을 남한산성에 모시고 독전어사(督戰御使, 전쟁을 관리하는 벼슬)가 되었습니다. 김익희 선생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구운몽(최초의 한글 소설)의 저자 김만중 선생의 삼촌이라고 하면 기억하기 좀 더 쉬울 것입니다.

대전교육과학연구원 작은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면 회화나무 보호수가 있습니다. (시지정 제2010-1호) 이 나무의 수령은 약 360년으로, 15m의 높이에 3.5m 거대한 둘레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위풍당당하게 김익희 선생이 잠든 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창주사적공원’이 적혀있는 입구를 지나면 하마(下馬)라고 적힌 비석을 볼 수 있습니다. 하마비(下馬碑)는 궐문(闕門) · 능묘(陵廟) · 문묘(文廟) · 서원(書院) 등의 입구에 세우는 비석으로 말에서 내려 걸어감으로써 예의를 표시하라는 뜻입니다. 신분이 높을수록 하마비 가까이에서 내려서 걸어갔다고 합니다.

하마비를 지나면 창주 김익희를 기리는 신도비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증명하듯 비석의 글씨 일부는 바람에 깎여 무뎌졌습니다. 김익희 신도비는 조선 시대 대 유학자이자 김익희 선생의 친구인 우암 송시열이 세웠다고 합니다. 커다란 신도비 옆에는 묘비가 있습니다. 원래 묘비는 묘터에 있었지만, 훼손을 막고 보존하기 위해 신도비 묘각으로 이전했습니다.

신도비 묘각 바로 뒤에는 긍사재가 있습니다. 긍사재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로 김익희의 12대손이 지었습니다. 현재는 잠겨있어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담장 너머로 마당과 본 건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긍사재 뒤편에는 담길을 따라 꽃이 하나둘씩 피어나고 있습니다. 벌들이 향긋한 꽃 냄새를 맡고 윙윙거리고 있었습니다. 왼쪽에는 작은 나무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면 김익희 선생의 묘가 나옵니다. 김익희 선생의 묘는 그의 아내 한산이씨와의 합장묘로, 주변에는 문인석, 상석, 망주석 등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한 쌍의 문인석은 금관조복(국가의 중요 의례 때 입는 화려한 장식의 예복과 황금색 관모)을 한 모습이며, 망주석 기둥에는 다람쥐가 올라가고(우측), 내려가는(좌측) 모양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촛불을 켜고 끄는 모습이라고 설명됩니다. 그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QR코드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로 확인이 가능합니다.

창주사적공원에서 만난 김익희 선생은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유명한 영화 <남한산성>과 드라마 <연인> 속에 나오는 중요한 역사 속 인물 중 하나입니다. 탄동천 벚꽃 구경을 오신다면 창주사적공원에 들러보세요. 꽃향기를 맡으며 역사 공부도 하고 일석이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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