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경상남도 온라인 홍보 명예기자단 조윤희


부모님의 고향이자 부모님 어릴 때의 놀이터였던 무진정은 제게 언제나 방문해도 좋은 장소여서 함안을 여행할 때마다 빠뜨리지 않을 정도로 정을 둔 곳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랍니다.

봄에 왔을 때는 이 언덕에 현호색 군락이 저를 반기더니 12월에 접어들어 찾아오니 꽃과 푸릇푸릇한 생명으로 가득했던 곳이 은행과 벚나무의 단풍 든 낙엽이 소복이 쌓여 겨울의 문으로 저를 맞아주더군요.

연못이 주변의 자연과 어우러져 찾아오는 방문객들의 발소리에 감동을 입혀 주고 있는 무진정의 겨울 모습은 삭막하기보다는 포근함이었는데 아마 저만 그리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고요.

지난해 낙화놀이 행사 당시 5만 명 이상이 행사장에 몰려 관광객에게 혼란과 불편을 초래한 무진정의 연못은 무심한 듯 12월의 햇살 아래서 수면을 긁어대는 바람으로 인해 반짝반짝 참 예쁘더군요.

많은 드라마의 배경이 되고 있으면서 사계절의 운치가 덧대어져 섬과 연못을 멋지게 이어주는 다리는 연못 가운데 있는 정자를 향하게 하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으면 참 좋을 곳이지요.

영송루(迎送樓)

무진정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아들이거나 떠나보낼 때 연못 위에 있는 이 정자 위에서 간단한 인사를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영송루 바로 옆에는 얼마나 오랜 시간으로 한자리에 서 있었을까 싶을 정도의 노거수가 있는데 땅 위로 드러난 뿌리는 사람들의 발길에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는 데도 여전히 삶의 기은을 품어내고 있는 열심에 나무를 끌어안아보았답니다.

영송루에서 잠시 쉬었다가 일단 연못을 따라 만든 산책로를 둘러 보기로 했네요.

박씨열녀비

웹툰이 원작이었던 mbc 드라마 열녀박씨 계약결혼뎐의 촬영 배경지가 된 무진정에서 박씨 열녀비를 보았는데 열녀비와 드라마 촬영지로 이곳을 택한 것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 같은데... 이것은 정확한 게 아닌 단지 저만의 상상이라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부자쌍절각(父子雙節閣)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 조려 선생의 5대손이자 무진 조삼 선생의 증손인 조준남의 효행과 그의 아들 조계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숙종 32년(1706) 왕명으로 세운 정려각이 박씨열녀비 바로 옆에 있답니다.

조준남(趙俊男. 1547~1597)

조준남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이 쳐들어와 증조부 조삼의 묘를 파헤치자 왜적들을 뚫고 들어가 흙으로 관을 덮고 저항하였으며, 왜적이 그를 위협하자 조준남은 "네놈들이 내 선조의 묘소를 무단 훼손하니 너희는 나의 불공대천의 원수다."라고 분노하며 자결했다고 합니다.

고종 5년(1868년)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 되었다고 하지요.

조계선(趙繼先. 1570 ~ 1627)

조준남의 큰 아들로 선조 3년(1570)에 출생했으며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어지럽게 되고 부친이 왜적으로 인해 작고하자 무과를 준비해 선조 35년(1603)에 급제했답니다.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1627년 정묘호란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출전하였다가 의주에서 전사하였다고 합니다.

고종 5년에 병조참판으로 가증되었다고 합니다.

쌍절각의 출입문인 성인문(成仁門)은 올 때마다 잠겨 있어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나라를 위한 함안 조씨 문중의 두 위인을 비각으로 만날 수 있어서 감동이었습니다.

제가 함안 조씨 집의공파 33대손이라 그런지... ㅎㅎㅎ

충노대갑지비(忠奴大甲之碑)

정유재란 당시 노비대갑(大甲)이 주인인 조계선을 모시고 전쟁에 참여했다가 그의 주인이 전사하게 되자 대갑은 주인과 함께 죽는 것이 옳으나 고향에 주인의 죽음을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 멀고 먼 의주에서 본가 근처에 이르러 조계선의 부음을 전하고는 "혼자 살면 어찌 면목이 있겠습니까? 주인을 난에서 구하지 못하여 집에 갈 면목이 없습니다." 하고 지금의 검안천에 투신했다고 하는데, 충신의 집에서 충노가 나온다고 하면서 조계선의 묘 옆에 대갑의 묘를 함께 써서 지금도 제사를 함께 지내주고 있다고 해요.

이수정(충노담. 忠奴潭)

겨울의 볕 살을 품은 무진정의 연못을 충노담(忠奴潭)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이것은 충노 대갑의 죽음과 연관이 있답니다.

50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연못 중앙에는 세 개의 작은 섬이 있고 그 섬을 연결하는 홍예교라는 이름을 가진 돌다리가 있어서 섬과 무진정이 있는 언덕 위의 정자와 연결시켜 주고 있지요.

원래는 일수정, 이수정, 삼수정이 있었는데 근처에 신작로를 만들면서 일수정과 삼수정은 사라지고 이수정만 남았다고 하는데 다리가 있기 전에는 연못 안에 있는 세 섬으로 가려면 작은 배를 이용했을 것 같았어요.

유교적 가치관과 예술적 감각이 꽃 피었던 조선 시대에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중시하는 사상이 깊이 뿌리내리며, 이는 정원 건축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이 시대의 정원은 단순히 아름다운 공간을 넘어, 유교적 가치관을 담아낸 문화재이자, 시대의 역사를 담은 살아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답니다.

조선시대 때 연못은 우주를, 섬은 유토피아를 상징한다고 하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이수정과 세 섬도 그런 사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싶어지더군요.

연못이 있어 무진정 정자를 지은 것이 아니라 정자를 짓고 나서 연못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언덕배기에 남다른 안목으로 터를 잡아 누각을 지은 조삼 선생과 그의 말에 따라 연못을 만든 후손들의 기지가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함안 무진정(無盡亭)

함안 무진정(無盡亭)은 조선 명종 22년(1567)에 무진(無盡) 조삼(趙參) 선생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세우고, 선생의 호를 따서 붙인 정자인데요,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어진 정자라는 말이 손색이 없을 정도로 풍류와 학문 연구를 위하여 충노담이라는 연못 언덕 위에 지어진 정자로서 1976년 12월 20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답니다.

무진(無盡) 조삼(趙參)은 1483년(성종 14) 진사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경상도 함양·창원·대구·성주·상주의 목사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겸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지낸 분이랍니다.

한여름 뜨거운 열기 못지않게 피었다 지기를 백일 동안 하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언덕 위의 무진정 주위를 화려하게 만들어 주었을 텐데 꽃도 지고 잎도 다 떨어졌지만 외롭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의 나래를 펼친 것처럼 하늘을 끌어안고 바람의 지분거림에도 꿋꿋하게 무진정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고 포근하게 보일 정도더라고요.

움직이거나 고요히 있거나 항상 사물의 이치를 생각하여 깨달음에 이른다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강조하는 무진정의 출입문인 동정문(動靜門)이랍니다. 이 동정문을 들어서면 곧장 보이는 누각이 바로 풍류를 즐기기 위해 언덕 위에 지어진 무진정이랍니다.

무진정(無盡亭)의 건립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해요.

하나는 조삼이 후학 양성을 위해 지은 것이라는 설과, 또 다른 하나는 조삼의 후손들이 그의 덕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우고, 그의 호를 따서 무진정이라 하였다고 하는 설이지요.

1542년 6월 여름, 풍기 군수를 지낸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지은 무진정의 기문(記文)에 "삼도(三島)의 자줏빛 비취색 같은 좋은 경치와 통하고 십주(十州)의 노을 빛보다 낫다.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고 밝은 달이 먼저 이르니 발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온갖 경치가 모두 모여 진실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라 하겠다."라고 하여 무진정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고 하니 이런 사정을 볼 때 무진정은 조삼이 고향으로 내려와 후진을 양성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정자인데, 이후 쇠락한 것을 후손들이 다시 중수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지요.

함안 군청에서 진동 방향으로 함안 대로를 따라 2.5㎞ 가면 괴산 교차로 우측 종남산 아래 자그마한 연못 언덕 위에 위치한 무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앞뒤로 툇마루를 구성하고, 그 가운데 한 칸을 구획하여 마루방으로 꾸몄으며, 바닥은 모두 지면에서 띄워 올린 누마루 형식이랍니다. 기단은 자연석으로 단을 구성하였으며, 초석은 원주형의 돌을 가공하여 상부 원기둥을 받치고 있는데, 기둥 위에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이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하답니다. 건물 좌우와 뒤쪽 마룻바닥에 머름이라는 낮은 단을 구성하고, 그 상단에 들어서 처마에 걸 수 있는 분합문을 달았지요.

1567년 세웠다고 전하나, 정자에 소장된 주세붕(周世鵬)이 적은 ‘함안 무진정 기문(無盡亭記文)’에는 1542년(중종 21)으로 되어 있어 1567년 이전에 함안 무진정의 이름으로 건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의 건물은 1929년 4월 중건한 것으로, 2013년 초 창호 보수 공사와 주변 석축 및 담장 공사를 하였다고 해요.

겨울이지만 볕 살이 따뜻해서 무진정의 툇마루에 앉아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유가 참 좋았답니다.

괴산재(槐山齋)

생육신의 한 사람인 정절공 조려(趙旅) 선생의 손자인 무진정 조삼을 기리는 집의공파 재실인 괴산정이 무진정 언덕에서 내려다보인답니다.

1670년 창건되어 300여 년간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쳤으며, 조삼선생의 후손과 인근 청소년들의 교육 전당으로 사용되어 왔던 현재의 건물은 세 번째로 중수한 것으로 1992년 낙성식을 했다고 해요.

조삼 선생의 조부인 어계 조려(漁溪 趙旅, 1420~1489)는 단종 1년(1453) 성균관 진사가 되어 당시의 사림 사이에 명망이 높았으나,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백이산 아래에서 살았답니다. 벼슬을 하지 않고 스스로 어계(漁溪)라 칭하며 낚시와 학문으로 여생을 보냈는데,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이조참판에 추정된 사람이지요.

괴산재를 나서며 다시 한번 더 무진정과 이수정의 호를 따라 걸어볼 요량입니다.

무진정 낙화 놀이

선조 때 함안 군수로 부임한 정구(鄭逑)가 군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에서 매년 음력 4월 8일 함안 무진정 연못에서 낙화 놀이를 하였다고 전하는데, 함안 낙화 놀이는 함안의 고유 민속놀이로 연등과 연등 사이에 참나무 숯 가루로 만든 낙화에 불을 붙이는 불꽃놀이로 연못에 떨어지는 불꽃이 장관을 이룬다고 하지만 언제 실제로 보게 될는지...

함안 낙화 놀이는 1985년 현재의 형태로 복원되어 매년 열리고,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괴항 마을에 전승되며 2008년 10월 30일 경상남도 무형 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고 해요.

아름다운 무진정의 겨울 소경을 품으며 짧은 글 하나 남기면서 글을 맺습니다. 낙화 놀이로 유명한 그리고 배롱으로도 유명한 겨울의 무진정이 얼마나 사색의 터가 되는지... 겨울이 진행 중입니다만 분잡한 시간을 잠시 떠나 고즈넉한 산책과 사색을 하실 분들은 함안 무진정으로 여행 오세요.

감사합니다.

무진정의 겨울을 걸으며/조윤희

거친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헐벗은 가지에도 휘날리고 있다

매만져 줄 그대는 저 멀리에 있는데

내 손은 동여매진 채 끌려가듯

겨울 광야 *가온에 서 있다

길 잃은 시선 속으로 다시 한번

그대 다가오라

그대 걸어오라

내 지친 걸음이 무진정을 밟을 때마다

쏟아지는 그리움이 얼기 전에

우리의 시간 곁에 지체치 말고 서길

사랑아 내 사랑아

그리움아 내 그리움아

이 겨울이 지나기 전에

그대 어서 오라

*가온 : '중심', '한가운데'라는 뜻의 순우리말

무진정(無盡亭)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주소: 경남 함안군 함안면 괴산4길 25

(지번. 함안면 괴산리 547)

📍공영 주차장 주소: 경남 함안군 가야읍 함안대로 27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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