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79년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홍성의 대표 여행지인 백야 김좌진장군생가, 만해 한용운선생생가지도 둘러보고

광복절 의미 새겼는데 혹시나 시간 되시면 꼭 들러보세요

오늘 소개할 만해 한용운선생생가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된 곳으로

선생님이 태어나신 생가와 사당 만해사, 민족시비공원,

선생님의 애국·애족·애민 정신을 기리고자 설립된 만해 문학체험관이 있습니다.

관람 순서는 주차장에서 출발 생가, 사당, 만해 문학체험관 순으로 돌아봤습니다.

만해 한용운선생생가지 관람 안내해 드려요

관람시간

(3월~10월) 평일 09:00~17:00/토·일·공휴일 10:00~17:00

(11월~2월) 평일 09:00~17:00/토·일·공휴일 10:00~17:00입니다

휴관일은 1월 1일(신정), 설날, 추석 당일, 매주 월요일이며

아래 주차장 입구에 문화 관광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어

오전 10시부터 17시까지 언제든지 해설을 들을 수 있습니다.

공원 입구에서 바라본 생가와 선생님 동상입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님은 고종 16년인 1879년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온양 방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선생님은 기고문을 통해 “아버지는 몰락한 사대부였지만

항상 아들에게 의인, 걸사의 언행을 가르치고

또한 세상 형편, 국가 사회의 모든 일을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이런 말을 듣고 성장한 만해 한용운 선생의 가슴속에는

의인, 걸사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숭배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네요

만해 한용운 선생님의 생가에는 아름다운 배롱나무가 꽃을 피웠습니다.

생가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작은 초가로 양옆으로 한 칸씩 광과 헛간을 추가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만해 한용운 선생은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에 어른도 힘든 서상기, 서경을 독파하는 등 주변에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생가를 지나면 바로 계단 위로 만해사 입구가 보입니다.

만해사 안에는 선생님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고 해마다 제향을 올리고 있지만

아쉽게도 문이 잠겨 있어 참배는 못 했고 대신 아름다운 배롱나무가

사당을 호위하듯 서 있어서 사진으로 담아 봤습니다.

만해사를 나와 입구 쪽으로 내려오면 민족시비공원이 있고

공원 중앙에 독립선언서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당당히 나선 민족대표 33인의 나라 사랑하는 큰마음을 가슴에 새겨 봅니다

만해문학체험관은 만해 한용운 선생님의 애국·애족·애민 정신을 기리고자 설립된 곳으로

자료를 통해 선생님의 삶을 이해하고 선생님의 독립 신과 애국정신을 체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날씨가 많이 더운 한여름 시원한 에어컨이 나와서 정말 좋았어요.

홍성군 결성면이 고향인 만해 한용운 선생은 일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몸 바치신 독립운동가, 시인, 승려입니다

아명은 유천, 용운은 출가했을 때 은사 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이며, 본명은 한정옥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했던 유천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제안을 받아들여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학생 중에는 나이가 위인 사람도 있었으나 모두 유천을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하네요.

어린 유천은 1905년 백담사에서 출가하였고 이때 받은 법명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용운입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을 간행하였고

1918년 불교잡지 유심을 창간하여 불교의 개혁과 혁신을 주장하여 불교 대중화의 길을 개척하셨습니다.

1919년 3.1 운동을 주도하여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때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 3장을 첨가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고 합니다.

3.1 만세 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넘겨지고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아

마포 경성감옥에 구속되었고 이때 민족대표들에게 변호사와

사식과 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수감생활을 끝까지 마쳤다고 합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님이 지은 심우장은 성북동에 북향집으로 유명합니다.

남향집의 이점을 버리고 북향집으로 지은 이유는 총독부와 마주 보기 싫어서가 그 이유라고 하네요.

선생님은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광복 한 해 전 1944년 6월 29일 승랍 49세, 세수 66세로 열반에 들었습니다.

특별 전시실에서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얼굴 기획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생님의 초상은 불교 승려의 얼굴을 기억하지만,

특별전에서는 독립운동가로서 불굴의 의지와 정신으로 가득 차 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얼굴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님 생가지에서는 주말 체험프로그램 운영 중입니다.

님의침묵 시를 활용한 전통 책 만들기, 태극기 바람개비 만들기, 한용운 퀴즈 풀기 등을

4월부터 10월까지 첫째, 셋째 토요일 10:00부터 16:00분까지 운영하니 많이 이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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