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홍성에는 많은 역사인물이 있습니다.

백야 김좌진장군, 만해 한용운 선생, 매죽헌 성삼문, 무민공 최영장군 등입니다.

그리고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또 한 명의 역사인물이 있으니 고운 최치원입니다.

장곡면 월계리 한적한 도로 옆으로 고운 최치원유적지가 안내됩니다.

고운 최치원은 남북국시대 당에 유학하고 885년 돌아와

활동을 하였던 통일신라의 학자, 문장가 관료였습니다.

신라의 세계화를 이끌었으나 신라가 쇠퇴하면서

그의 학문은 고려 국가의 체제 정비에 영향을 미쳤네요.

문묘 18현중 한 분으로도 기립니다.

문묘 18현은 조선시대 향교와 서원에서 배향했던 18인의 학자로

설총, 고운 최치원이 신라시대, 안유(안향), 정몽주 고려 시대 나머지 14현은 조선시대의 학자입니다

한적한 마을 1차선 도로 옆으로 문창후 최치원 선생 유적지가 있습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의 친필 금석문이 있는 유적지입니다.

869년 13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879년 황소의 난 때에는 토황소격문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습니다.

885년 귀국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894년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현재의 충남 서산 부선군 등지의 태수를 지낸 후 아찬이 되었네요.

그 후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양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습니다.

이곳 홍성 장곡면의 유적지는 당시 외직을 자청하여 각지를 유랑하던 시기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운 최치원 유적지는 주차장과 화장실 등의 편의 시설이 구비되었고

계곡 옆 벌판으로 금석문이 있습니다.

신라시대의 해동성인으로 청송 되던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한동안 은거하였습니다.

마을 가운데로는 동쪽과 서쪽의 두 물줄기가 한 땅으로 흘러내리다가

합쳐지며 큰 못을 이루는데 당시 고운 최치원 선생이 쌍계라고 이름 지었다 합니다.

최치원 선생은 쌍계의 서쪽 암벽에 13개의 마애 금석문을 새겨 아름다운 경치를 찬양하였네요.

그러한 금석문은 현재까지 이어져 보존됩니다.

넓은 잔디 마당에 취석, 월 협, 단응연립 여진관 진윤삭성여규찬,

인백기천, 등의 글귀가 새겨진 바위가 전시됩니다.

서당 앞에서 국수를 만들기 위하여 밀가루를 반죽할 때 쓰던 돌도 만나게 되네요

인백기천은 12살의 나이로 당나라 유학 가는 아들에게 했던

아버지의 훈계에 대한 답으로 다른 사람이 백을 하면 나는 천을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금석문 글귀가 전시되는 벌판 아래로는 실제 금석문이 새겨졌던 쌍계가 있습니다.

목재계단이 설치되어서는 계곡으로 향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천년의 세월은 고운 최치원이 찬양했던 아름다운 경치는 다소 퇴색되었습니다.

계곡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나 계곡의 폭은 좁고 물길도 빈약하네요

마을과 마을을 잇는 작은 물줄기가 쌍계의 흔적만을 남겼습니다.

주변의 켜켜이 쌓인 암반지대만이 천년의 시간을 더듬어보게 합니다.

그럼에도 흔적이 보존되어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계곡 끝자락으로는 소박한 농가가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합니다.

월 협... 고요히 흐르는 개울물에 달빛이 비치는 골짜기,

취 석... 돌의 모양이 아름다움에 도취되었다,

하지만 일부일 뿐 돌이 마모되어서는 뜻을 확인할 수 없는 금석문이 더욱 많았습니다.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에는 신라시대 최고의 학자요,

문묘 18현중 한 분인 고운 최치원 선생의 흔적이 남았습니다.

쌍계와 금석문을 통해 천년의 시간 저편 최고의 학자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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