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충남역사박물관'
충남의 위인들의 초상화가 전시
충남 공주시 중동 284-1
충남역사박물관을 찾아서
충청남도역사박물관은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돤 조선통신사 기록물인 '신미통신일록'과 조선시대 마지막 통신사인 죽리 김이교 선생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획전시실에서는 '충남의 위인들, 초상화로 돌아오다'라는 제목의 위인들의 영인본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부터 근, 현대시기까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충남역사박물관은 2006년 9월에 개관하였으며, 2024년 새롭게 재개관 하였다는 소식을 주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현수막을 걸어 놓았습니다.
충남역사박물관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은 높았습니다. 노약자와 장애우를 위한 엘리베이터도 있지만 계단으로 한걸음씩 올랐습니다.계단을 다 오르고 한 숨 고르는데 임득의 장군 묘소 문인석이 보였습니다.
임득의 장군의 묘소에 있었던 것으로 금관조복형의 문인석이다. 임득의(1588~1612)장군은 1596년(선조29) 이몽학의 난 때 홍주목사 홍가신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에 1604년 청난공신 3등에 책록되고 평성군에 봉해졌다.(발췌: 설명문에서)
이 나무는 '금송'으로 공주 웅진동 무령왕릉 왕릉원 내에 있는 백제 무령왕릉의 관이 '금송'으로 제작된 것이 밝혀졌다고 하며, 이 '금송'의 수령은 90년 정도라고 합니다.
'숙종대왕 가봉태실 석물부재'라는 설명이 옆에 있습니다.
태실은 우리 선조들의 자손출산과 유산으로 출산과정에서 아이와 함게 배출된 태반을 정성스럽게 풍습 중 매태(태를 매장하는 풍습)의 결과물이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자손이 태어나면 그 태를 항아리에 담아 길지에 매장하여 봉분을 조성하고 비를 세웠는데이를 '아기씨태실'이라 한다. 태실의 주인이 왕위에 오르면 석물을 더하여 비석을 새롭게 세웠는데 이를 '가봉태실'이라 한다.(발췌: 설명문에서)
조선의 19대 임금인 숙종대왕의 '주상전하태실'이 공주 태봉동에 안치되었으나 일제강정기에 패훼되어 방치되었던 것을 흩어진 석물들을 수습하여 원형가치 보존을 위해 보존하고 있습니다.
충남역사박물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치 카페에 온 것 같은 느낌의 안락함이 있습니다. 와~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충남역사박물관은
상설전시실안내1은 역사문화실, 백제 속 충청남도, 고려 속 충청남도, 조선 속 충청남도, 충청남도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상설전시실안내2는 주제전시실, 충청감영실, 조선통신사와 죽리김이교, 생활유물실로 구분하여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 덴리도서관 소장 <조선명헌초상화첩>은 모두 4첩으로, 한국의 역사적 인물 201위의 초상화가 담겨 있다. 본 초상화첩은 원소장자 조영하의 후손이 일본으로 가지고 건너갔다가 생활고로 인해 덴리대학에 매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홍봉한을 비롯한 역대 충청도관팔사 133명, 박문수를 비롯한 충청도어사 7명 및 송시열, 윤중등 조선시대 충남 관련 명현 총 24인의 초상화 28점이 실려 있어, 충남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 (발췌: 아산데일리 공식뉴스)
이번 초상화전은 '진본'이 아닌 '영인본'입니다. 진본은 저자가 직접 쓴 책이거나 직접 그린 그림, 또는 처음 박아 낸 판본을 의미하고, 영인본은 원본을 사진 촬영해 그것을 원본으로 하여 과학적 방법으로 복제한 것을 말합니다.
김시습(1435~1493)초상화입니다.
세조 즉위에 반대한 생육신 중 한 명인 김시습은 조선초기의 문인이며 학자입니다. 말년에 불교에 귀의한 후 부여군에 있는 무량사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합니다.
송시열의 초상화입니다.
송시열의 호는 우암尤庵으로 충청도 옥천 구룡촌에 태어났습니다. 조선 후기 효종~숙종 대 문신이자 학자로서 김장생. 김집의 제자로 주희와 이이의 학문을 모범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왼쪽으로부터 이색초상화. 김시습초상화. 남구만의 초상화입니다.
박순의 초상화입니다.
각기 다른 화가가 그렸지만 박순의 초상화는 거의 똑같았습니다. 초상화는 특정 인물의 모습을 기록하고 후대에 전달하는 의미를 가졌다고 합니다. 털끝 하나 수염의 수 까지도 일일이 관찰하고 그렸기 때문에 각기 다른 화가가 그렸어도 그 모습이 똑같음에 놀랐습니다.
박순(1523~1589)의 호는 사암으로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입니다. 박순의 문집인 사암집 은1652년에 6권 2책으로 처음 간행되었고, 1857년 7권 3책으로 중간되었다고 합니다.
박문수의 초상화입니다.
박문수를 떠올리면 암행어사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릅니다.
박문수(1691~17556)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정치인이다. 이른바 암행어사의 명불허전으로 매번 회자되었던 그는 영조 때 호조판서를 지냈다.(발췌: 위키백과)
이렇게 소중한 역사 속 위인들의 초상화가 일본 덴리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속이 상했습니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무덤 안의 한쪽 벽면 모습입니다. 일일이 벽돌을 연꽃무늬로 제작하여 만들었습니다. 백제인들은 무덤을 살아있을 때의 방으로 만들어 등불을 켜 놓았고, 열리지는 않지만 창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공기와 차단 된 이후에는 등불은 꺼졌습니다. 공기와 차단 된 무덤은 산소가 없기 때문에 보존이 가능했던 것이랍니다.
금동관모(공주 수촌리 출토)와 금동신발(공주 수촌리 출토)이 복원된 모습입니다.
비례가 맞지 않는 미륵이 올해 국보가 되었다고 합니다.
절에 가면 제일 먼저 가야 할 곳이 탑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미륵은 위의 사진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나라 고려시대 부처님들의 특징을 갖고 있어서 국보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충청남도 독립운동가의 성함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그들의 순교를 잊지 않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 이 가마를 보고는 어린아기가 타는 가마인 줄 알았습니다. 이 가마는 성삼문의 신주를 옮겼던 가마입니다.
성삼문(1418~1456)은 조선 세종~세조 대 집현전 부제학, 예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충청남도 홍성 출신이며 본관은 창녕, 자는 군보, 호는 매죽헌이다. 세조 때 신숙주, 권남, 한명회 등을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공모하였다가 사실이 드러나 죽음을 당했다. 성삼문은 사후 관비가 된 아내 김씨가 성삼문의 제사를 지내다가 죽자, 외손인 박호의 집안에서 제사를 받들면서 무인박씨가 성삼문의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성삼문의 신주는 임진왜란 때 땅에 묻혔는데, 1672년 신주가 발견되어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성삼문의 생가가 있는 홍주 노은서원에 봉인되었다. 하지만 1871년(고종8) 서원철폐령에 따라 노은서원이 훼철되자 성삼문의 신주를 모실 곳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성삼문의 제사를 모시고 있던 무안박씨 집안의 박진하가 예조의 승인을 얻어 노성 당호재로 신주를 옮겨 봉안하였다. 이는 노성 당호재가 성삼문의 외손 박증의 후손들이 세거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신주를 옮겼던 가바가 바로 '무안박씨요요'이다. (발췌: 설명문에서)
유네스코(UNESCO)는 인류문화 계승하는 중요한 기록유산의 보존과 이용을 위하여, 기록유산의 목록을 작성하고, 효과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세계기록유산을 지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2017년 10월31일 '신미통신일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한일 양국의 소장 자료 111전 333점(한국 소장 측 소장 63건 124점, 일본 측 소장 자료 48건 209점)으로 이루어 졌다고 합니다.
'일본국 대마주 태수 습유 평의공이 조선국 예조참판 대인 합하께 글을 올립니다.' 라고 서문의 예를 갖춰 1810년 경오년 6월에 보내온 신미통신일록의 글입니다.
'사신의 편지를 받고 참으로 성의에 감동하였습니다.'로 보내는 신미통신일록의 글입니다.
통신사는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공식 외교사절입니다. 마지막 통신사인 죽리 김이교는 1789년 문과 급제하였으며, 신미통신사행의 정사에 임명되었고, 그 이후에 통신사 활동을 정리하여 <신미통신일록>을 남겼습니다.
그림으로 그려진 사절단의 모습입니다.
평상에는 '참고누놀이'와 '여기쌍록놀이'를 해 볼 수 있는 놀이기구가 마련되어있습니다. 설명문이 적혀 있어 누구나 해 볼 수 있는 놀이입니다.
마을과 민속문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을을 대표하는 장승과 농기와 두레패들이 풍물을 울리던 꽹과리, 징, 장구, 북, 과 상모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옛 것이지만 지금도 우리의 실생활에 사용되는 것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임득의(1558~1612)의 공신도상입니다. 임득의는 1596년(선조29)에 홍주목사 홍가신을 도와 이몽학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1604년(선조37) 청난공신 3등에 녹훈되어 공신도상이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관람을 하고 나오니 길 건너편 중동성당이 보입니다. 많은 분이 충남역사박물관을 탐방하여 충남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위인들을 만나보시기를 권합니다.
충남역사박물관
충청남도 공주시 국고개길 24
전화: 041-856-8608
운영: 10:00~18:00
관람료: 무료
주차: 양명중학교 앞- 공주시 중동 258-9 무료
공영주차장- 공주시 옥룔동 245-36 무료
중동 3길 노상 공영 주차장- 공주시중동 51-1 무료
공용유료주차장-공주시 중동63 평일1시간 1100원/주말 무료
※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수화님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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