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경상남도 뉴미디어 프렌즈 김종신

경남 거제는 동아시아 국제전쟁(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의 첫 승전(옥포해전)과 유일한 패전(칠천량해전)을 모두 경험한 곳입니다. 전쟁은 승패가 나뉩니다. 아픈 생채기와 같은 실패, 패전에서도 유비무환의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칠천량해전의 실패는 원균의 탓일까 하는 궁금증에 칠천도를 찾았습니다.

거제도에서 칠천도 사이의 칠천량 해협을 가로지르는 칠천교를 지나면 칠천도가 나옵니다. 다리를 건너 아름다운 풍광이 자맥질하듯 다가오는 해안 길을 따라 5분 정도 가면 칠천량해전기념공원이 나옵니다.

차를 세우고 칠천량해전 전시관으로 먼저 향했습니다. 입구에는 각종 총통이 한쪽에서 우리를 먼저 맞이합니다.

전시관에 발을 들여놓자, 조선 수군을 위한 추모의 공간이 먼저 나옵니다. ‘통곡이 퍼져 나옴을 이길 수 없었다’라는 이순신의 <난중일기> 기록처럼 칠천량해전에서 전몰한 조선 수군의 영혼들을 위한 곡소리가 울리는 듯합니다.

추모 공간을 지나면 전쟁 연대기가 우리를 시간 거슬러 당시로 이끕니다. 아울러 조선 수군을 톺아볼 전시물들이 하나둘 우리의 눈길과 발길을 이끕니다.

조선 수군을 살펴볼 다음이면 칠천량해전의 배경이 나옵니다. 칠천량해전의 수장 원균의 딜레마와 위기가 우리의 눈길과 발길을 붙잡습니다.

1597년(선조 30년) 음력 7월 16일 거제 칠천도 부근에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 간에 벌어진 전투를 칠천량해전이라고 합니다. 조선 수군은 이 한 번의 패배로 전멸 직전까지 몰립니다.

조선 수군 장수였던 이순신과 원균, 두 사람은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역사 속에 우리에게 각인됐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원균은 ‘전쟁 초기 일본군에 맞서지 못하고 전선과 무기를 불 지르고 도망친 장수요, 이순신을 시기 모함한 악랄한 장수요, 술과 기생으로 소일하다 결국 칠천량해전에서 패전해 조선 수군을 한방에 털어버린 졸장(卒將)’으로 인식됐습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원균에 관한 언급은 84회 등장합니다. 불편한 감정을 이순신은 일기에 그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 등으로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에,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 백의종군케 하고 자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통제사를 원균으로 교체한 것은 당쟁으로 인한 자리다툼보다는 일본군의 반간계와 부산왜영방화사건이라는 상황이 복합적으로 적용한 사례라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 서울로 압송되기 전 신임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원균에게 그동안 비축한 군량미 9,914섬, 화약 4,000근, 총통 300자루 등의 목록과 현품을 인계했습니다.

원균에게 조선 조정은 일본군의 본거지인 부산포를 공격도록 명령했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기 전 전라병사로 주장해 온 것과 달리 원균은 먼저 육군과 협력하여 안골포 등지의 일본군을 섬멸하여 적의 함대가 조선 수군을 뒤에서 공격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면서 수륙 합동작전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이순신의 주장과 맥락이 같습니다.

하지만 총사령관인 도원수 권율과 군사행정 총책임자인 체찰사 이원익을 비롯한 조선 조정은 출전을 회피하는 변명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독전에 원균은 6월 18일에 대소 1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부산 앞 가덕도로 출전했습니다. 안골포에서 일본 군선2척을 빼앗은 것 이외에 별다른 소득도 없이 보성군수 안홍국 등을 잃고 부산으로 가지도 못하고 중도에서 돌아왔습니다. 이에 도원수 권율은 사천까지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치면서 재출전을 명령했습니다.

7월 4일 2차 부산포를 향해 출전했습니다. 조선 수군의 대함대가 일본 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밝은 대낮에 이동했습니다. 대비를 하고 있던 일본군에 여지없이 깨집니다. 조선 수군은 절영도 해전에서 20척의 전선을 잃어버리고 물러납니다. 도원수 권율은 다시금 원균을 사천으로 불러 곤장을 칩니다.

연이어 매를 맞은 원균은 7월14일, 함대 전체를 이끌고 출전합니다. 일본 함대는 조선 수군 함대와 전투를 회피하며 지치게 만들고 거센 풍랑에 전열을 갖추지 못하게 합니다. 원균이 함대를 수습하고 회항하는 중 가덕도에 식수를 구하러 올라갔던 수군 400명이 매복한 일본군에게 몰살당합니다. 7월 15일 밤 칠천량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칠천량에 정박한 조선 수군을 향해 일본군이 맹렬히 공격합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을 물론이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수군 지휘부가 모두 전사하고 경상우수사 배설이 진영을 이탈해 12척을 제외하고 160여 척을 탈취하거나 불태웠고, 그 외에 연안의 진포마다 남겨진 전선을 소각당하는 참패로 끝납니다.

이 모든 패전의 책임은 온전히 원균 탓일까요? 선조는 “원균 한사람에게 책임을 돌리지 말라. 이산해, 윤두수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선조실록』 중).”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패전의 책임은 임금이었던 선조와 군사행정 책임자였던 체찰사 이원익, 총사령관 도원수 권율 그리고 해전을 직접 지휘했던 원균에게 있습니다.

이순신은 수많은 해전에서 승전보를 올리는 데 반해 원균이 지휘한 같은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왜 패배했는지 꼼꼼히 생각하게 합니다.

칠천량해전공원 / 전시관

✅주소 : 경남 거제시 하청면 칠천로 265-39

⏰️관람시간 : 09:00~18:00(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주차장 : 무료

📞문의 전화 : 055-639-8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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