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일 전
전북 역사기행 - 진포대첩과 청송심씨 이야기
군산에서 만난
역사 이야기
진포대첩과 황산대첩
지금으로부터 645년 전인 1380년,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가르는 금강 하류의 진포(鎭浦)에 왜구(倭寇)들이 새까맣게 몰려왔습니다. 왜구의 침략은 이미 그로부터 약 150년 전인 1223년경부터 시작되었지만, 초기에는 그 규모가 작아서 우리나라의 국력에 심각한 피해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인해 남조(南朝)가 북조(北朝)에게 밀리면서 식량난에 처하게 되자 1350년경부터는 침략의 횟수나 규모가 크게 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380년에는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대규모의 함대(艦隊)가 쳐들어온 것이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금강 하류를 침략한 전함(戰艦)이 500여 척이었다고 하니 왜구의 병력은 약 1만 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구들은 정박한 전함들을 큰 밧줄로 묶어 서로 연결한 후 병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인근에서 약탈해 온 곡식들을 배에 실었습니다. 당시 산과 들에는 왜구의 약탈 과정에서 살육된 수많은 백성의 시체가 널려있었고, 또 길바닥에는 곡식을 배로 옮기는 과정에서 바닥에 흘린 쌀이 거의 한 자[약 33Cm] 높이로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조정에서는 심덕부(沈德符, 1328~1401)를 도원수(都元帥)로, 나세(羅世, 1320~1397)를 상원수(上元帥)로, 그리고 최무선(崔茂宣, 1325~1395)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하여 진포에 급파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진포의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편성되었던 고려의 전함은 왜구의 1/5 규모인 100척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단순한 군사력만으로 비교했을 때는 고려군에게 승산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고려군에게는 수상전에서 절대 유리한 비장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고려의 전함은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火砲)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먼 거리에서도 왜구의 전함들을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왜구는 전함들을 밧줄로 묶어 서로 연결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고려의 화포 공격에 전함이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이때 전함을 지키던 왜구들은 대부분이 불에 타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고, 왜구에게 사로잡혔던 고려인 334명도 풀려났는데, 이 전투를 가리켜 진포 일대에서 왜구를 상대로 대첩(大捷: 크게 이김)을 거뒀다고 하여 ‘진포대첩(鎭浦大捷)’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진포대첩은 우리나라 역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꿔놓았습니다. 진포대첩에서 이어진 황산대첩(荒山大捷)을 통해 조선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398)가 건국의 동력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진포 전투에서 큰 전력을 상실한 왜구들은 양광도(楊廣道: 충청도의 옛 이름) 내륙으로 쫓겨 들어가서 우리 백성들을 마구 죽이고 약탈했는데, 경상도 상주까지 들어갔다가 고려군에게 막혀서 다시 덕유산을 돌아 지리산 자락의 운봉(雲峰)으로 집결했습니다. 그렇게 집결한 왜구들을 고려군은 운봉의 황산(荒山)에서 섬멸(殲滅: 모조리 멸망시킴)시켰고, 당시 ‘양광·전라·경상 삼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三道巡察使)’로서 황산의 전투를 총지휘한 이성계는 국가적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진포는 어디인가?
2000년대 초반에 각 지자체가 관광 상품의 개발을 위한 역사·문화자원의 확보에 공을 들이면서, 전북 군산시와 충남 서천군은 서로 ‘진포는 우리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군산시와 서천군이 진포를 우리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두 지역이 모두 금강 하류에 위치하고 또 두 지역 모두 ‘진포(鎭浦)’라는 옛 지명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군산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임피현(臨陂縣) 산천(山川) 조(條: 항목)에 진포가 임피현의 북쪽 13리 지점에 있는 ‘공주산(公州山) 밑에 있다’는 기록을 그 주장의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또한 군산시는 왜구의 침략 목표가 식량의 약탈이었고, 그 식량을 저장했던 창고가 군산시의 성산면과 나포면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진성창(鎭成倉)이었다며 992년경 작성된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고려사(高麗史)》 〈권79 지(志)〉
『권제33』 「식화(食貨)」 조운(漕運)
조종포(朝宗浦) 이전 호칭은 진포(鎭浦)로
임피군(臨陂郡) 진성창(鎭城倉)이 있다
하지만 서천군은 군산의 진포가 조선 건국 후인 1426년(세종 8)에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에서 옮겨 설치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또 진포대첩의 지휘관들 중 한 명인 나세(羅世)의 나주 나씨(羅州 羅氏) 집성촌 서천군 마서면(馬西面) 일대에 있다는 것을 그 주장의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근래에 들어서 익산시도 뒤늦게 그 논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익산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진포를 끼고 있다고 기록된 공주산이 익산시와 군산시의 경계 지역이고, 또 500여 척이나 되는 왜구의 전함들과 100여 척의 고려군이 전투를 벌였다면 그 전장(戰場)은 진포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익산시의 웅포와 용안 일대까지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또한 진포대첩을 거둔 뒤 10년 후에 권근(權近, 1352~1409)이 쓴 『용안성조전기(龍安城漕轉記)』에 ‘용안의 진포’라는 내용이 있다는 것도 논리의 근거로 활용했습니다.
…遵海而觀。相其地利。於全之界則得鎭浦之龍安。
於羅之界則得木浦之榮山...
…바다를 따라 그 지형을 관찰하여, 전주에서는
‘용안의 진포’를 발견하고, 나주에서는 목포의 영산을
발견했는데...
권근의 『용안성조전기(龍安城漕轉記)』중에서
그렇지만 군산시와 서천군 그리고 익산시는 서로 진포가 우리 지역이라는 논리를 주장하면서도 정말 중요한 기록들을 간과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진포에 쳐들어온 왜구들은 이미 4년 전에도 낭산(朗山)과 풍제(豊堤: 용안의 한 지역)를 침략해서 노략질하다가 고려군에게 쫓겨난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진포대첩의 최고 지휘관인 심덕부와 관련된 기록들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심덕부의 행장(行狀: 죽은 사람의 일생을 기록한 글)에는 진포가 용안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庚申倭寇以戰艦千艘侵我南鄙所過殘滅靡遺諸將皆不能禦轉鬪至龍安鎭浦其勢甚張...
…경신년에 왜구가 전함 1000척으로 우리나라의 남쪽
변방을 침략하여 지나는 곳마다 싹쓸어 남는 것이 없었으나
여러 장수가 막지 못하여 ‘용안진포’로 공격하여 들어오니
그 형세가 매우 컸다...
심덕부의 행장(行狀) 내용 중에서
이 두 가지 기록은 진포대첩이 일어난 시기와 가장 가깝고 또 진포대첩의 최고 지휘관에 대한 기록이므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포의 위치는 용안(龍安) 또는 용안 인근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청송심씨와 호남의 8대 명당
군산시·서천군·익산시는 진포대첩의 최고 지휘관인 심덕부에 대해서 거의 거론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서천군은 나세를 진포대첩의 최고 지휘관이라고 잘못 설명하고, 군산시는 우리나라 최초로 화포를 개발한 최무선만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익산시 역시 심덕부를 거론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심덕부는 익산시와 깊이 관련된 인물이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익산시 함열읍 남당리에는 심덕부의 할아버지인 심연(沈淵)의 묘가 있습니다. 청송 심씨(靑松沈氏) 문중의 2세조이기도 한 심연의 묘가 익산시에 자리 잡게 된 것은 3세조인 심용(沈龍)이 최고의 명당(明堂)을 찾아 부친의 묘를 이장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도 풍수(風水)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호남의 8대 명당 중 하나로 알려진 심연의 묘역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경상도 청송에 살던 효자 심용은 평소에 부친을 명당에 모시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칭 명풍수가라는 지관이 찾아왔다. 심용이 그를 극진히 대접했지만 지관은 묘자리를 잡기는커녕 매일 술만 마시면서 주정을 일삼았다. 식구들이 모두 그 지관을 싫어했지만 심용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정성으로 접대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서야 심용은 지관에게 “이제 자리 하나 잡아줄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지관은 “그러면 재산의 절반을 처분해서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말했다. 심용은 재산을 처분해 돈을 마련한 후 무작정 지관을 따라갔는데, 산을 넘고 물을 건너 500여 리나 떨어진 전라도까지 가게 되었다. 그곳에 이르러서야 지관은 어느 종가의 사당을 가리키면서 “저곳이 명당이요”라고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심용은 그 집으로 들어가 자초지종을 말하고 집을 팔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충분히 예상했던 대로 집주인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거듭된 간청과 거절이 반복된 후에 드디어 심용은 죽기를 각오하고 대문 앞에서 멍석을 깔고 단식을 하였다. 심용이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집주인은 결국 그 정성에 감복해 집을 팔겠다고 하였고, 심용은 집주인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준 후 그곳에 아버지 심연의 묘를 이장하였다. 그 후로 아들 심덕부와 손자 심온, 증손자 심회가 3대를 걸쳐 정승을 하였고, 증손녀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가 되었다.
또한 익산시와 경계 지역인 완주군 화산면 운산리에는 심덕부의 넷째 아들인 심징(沈澄)의 묘가 있습니다. 심덕부의 조부와 아들의 묘가 이 지역에 있다는 것은 청송 심씨 문중의 일파가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심징의 아내가 여산(礪山)에서 살다가 죽었다’라는 내용이 있고, 지금도 익산시 일대에는 여러 곳에 청송심씨 문중의 세거지(世居地)가 있습니다.
심덕부는 누구인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그가 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고려 왕조와 조선 왕조에서 모두 ‘상신(相臣: 정승)’을 역임한 인물은 심덕부와 배극렴(裵克廉, 1325~1392) 단 두 명뿐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고려 말 대규모로 침략한 왜구를 물리친 후, 진포대첩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심덕부와 황산대첩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이성계는 고려 왕실과 혼맥을 쌓으며 국가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특히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에서 이성계와 생사를 함께한 심덕부는 뒤이어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한 ‘흥국사(興國寺) 공신’들 중 두 명만 받았던 백작(伯爵)의 작위를 이성계와 함께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선 왕조가 세워진 후에 이뤄진 회군공신(回軍功臣) 재책봉에서는 1등 공신으로서 공신 명단의 가장 앞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또한 심덕부의 7남 심정(沈泟)과 이성계의 7남인 이방번(李芳蕃)이 공양왕(恭讓王)의 아우인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의 사위가 되면서 동서 관계가 되었고, 심덕부의 6남 심종(沈淙)이 이성계의 둘째 딸 경선공주(慶善公主)와 결혼하면서 두 가문은 혼맥을 통해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덕부의 5남 심온(沈溫)의 장녀는 충녕군(忠寧君) 이도(李裪)와 결혼하여 나중에 소헌왕후(昭憲王后)가 되었고, 장남인 심준(沈濬)은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 민무휼(閔無恤)의 딸과 결혼하는 등 조선 왕실과 거듭 혼맥을 쌓아가면서 청송 심씨 가문은 조선 최고의 명문가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맺는 말
우리 민족이 지난 2500년 동안 외세의 침략을 받은 횟수는 약 1000여 차례에 달하고, 그 횟수를 줄여 넓게 보아도 약 90여 차례 정도라고 합니다. 진포대첩은 그 많은 외침 중에서 우리 민족이 통쾌한 승리를 거둔 몇 안 되는 쾌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진포대첩의 노른자위에 속하는 현장이 전북 지역이었고, 그 전투를 지휘한 총책임자 역시 전북 지역에 연고를 둔 심덕부였습니다. 하지만 지역 연고를 따지는 논리에 의해 아직도 그 실체의 일부가 왜곡되거나 가려져 있습니다.
올해 2025년은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국권을 피탈 당한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부터 2주갑이 되는 해입니다. 이 뜻깊은 해를 맞아 올바른 역사의 정립이 제대로 이뤄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글, 사진 = 최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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