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서 더 뜨거운,

진안 송봉순

어르신을 만나다

올해로 아흔셋. 송봉순 할머니에게는 보물이 하나 있다.

수십여 년간 써온 일기장 70여 권이다. 육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 한글을 배웠고 소중한 일상을 차곡차곡 써내려갔다. 서툴고 투박하지만 한 자 한 자 정성 담은 일기에는 늦게 펴 더 아름다운 꿈과 인생이 실려 있다.


고이 간직한 꿈

진안군 마령면에서 구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시절, 여자라는 이유로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채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갔다. 아이 여덟을 낳아 기르며 버섯 농사, 집안 살림까지… 평생 가족을 위해 바삐 살았다.

세월이 흘러도 가슴 한쪽 응어리가 사라지지 않았는데 배우지 못한 한이었다. 까막눈 설움을 벗어나기 위해 가족들 몰래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부엌 아궁이에 불 때면서 부지깽이로 바닥에 기역, 니은 써보곤 했어”라는 송봉순 어르신. 예순여섯부터는 서툴지만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소소하지만 소중한 추억 하나하나 담다 보니 30여 년이 흘렀고 일기장 70여 권이 남았다.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

그렇게 혼자 한글을 익히던 중 기쁜 소식을 들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마령면사무소에서 한글학교를 연 것. 칠십을 훌쩍 넘긴 나이, ‘못 해본 공부 한번 실컷 해보자’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 남편과 자식들 응원을 받으며 참여했다.

배워도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니 답답했지만 포기란 없었다. 끈기와 열정으로 수업에 참여했고 저녁이 되면 일기를 쓰며 공부를 이어갔다. 하루 종일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글로 쓰는 게 참 재미있다고.

어르신의 일기 사랑은 마을에도 자자하게 퍼졌고 진안신문에 매주 일기를 연재하기로 했다. 구십을 바라볼 즈음 마령면 행정복지센터에서 운영하는 주민자치학교 초등학교 과정에 입학했다. 그렇게 3년 교육과정을 마치고 초등학교 학력을 인정받았다. 오랜 설움이 씻겨 내려간 순간이다.


아내, 엄마 그리고 작가

최근 진안신문에서는 어르신의 일기를 모아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라는 책을 펴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장인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를 제목으로 정했다. 책은 2011년부터 2023년까지 12년간 신문에 실은 일기 247편과 가족사를 담고 있다.

“내가 좋아서 매일 썼는데 책으로 만들어주다니 쑥스럽고 감사하다”는 어르신. 구십 넘어 잊지 못할 선물을 받았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 옛날에 우리 아버지는 돈도 있고 그런데

아들만 알고 딸은 공부를 갈치지 않했습니다.

학교가 가고 십퍼서 나갔다 왔습니다.

오빠가 어드갔다 오야고 메를 각고 때릿습니다.

도망쳤습니다. 공부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늑께 스스로 기역 니은 배웠습니다. ”

(2011년 12월 19일 일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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