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도촌마을은 봉화읍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입니다.

마을 입구에 선 소나무 군락이 예사롭지 않음은 가까이에 있는

도계서원이 자리하고 있음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잘생긴 소나무 아래 작은 정자는 동네 어르신들의 쉼터인지 잠깐의 쉼이 참 좋습니다.

도계서원 앞은 주차를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관람의 편의를 제공하듯 합니다.

도계서원(道溪書院)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37호의 도계서원은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켰던 의인들의 충절의 도가 서린 곳으로,

1610년(광해군 2) 순흥부와 봉화군의 사림들의 공의로 건립되었습니다.

단종 때의 문신 이수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습니다.

훗날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킨 금성대군 이유와 이보흠을 추가로 배향했고

,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위의 부당성을 상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여빈까지 추가 배향되었습니다.

도계서원의 충절과 절의 정신을 오롯하게 보여주는 것은 특이하게도 건물입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던 도계서원은 묘우(廟宇)인

견일사(見一祠), 강당인 공극루(拱極樓),

거주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던 동재(東齋)인 공북헌(拱北軒) 등이 있습니다.

‘하나를 본다’는 의미의 견일에서 ‘일’은 바로 임금에 대한 충과 의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도계서원에서 가장 눈여겨볼 만한 건물이 바로 이수형이 은거하던 공북헌입니다.

공북헌(拱北軒)은 ‘단종을 그리는 마음으로 북쪽만을 보다’는 뜻으로

도계서원, 동재 거주 공간으로,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도촌 이수형이 벼슬을 버리고 정착한 곳입니다.

공북헌은 조선시대 일반 서원 건물의 형태와는 사뭇 다른데,

거주하도록 된 방 한 칸의 작은 쪽창을 제외하고 열린 공간은

오직 북쪽으로 난 방과 마루로 들어서는 출입구 뿐입니다.

툇마루를 벽으로 길게 막아 문을 열면 오직 북쪽만을 내다볼 수 있도록 지어졌는데

북쪽에만 창문을 낸 것은 단종의 능이 영월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수형이 평생 머물며 단종이 있던 영월 쪽을 바라보았고,

70여 년을 단종 임금을 추모하다가 1528년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후에 충재 권벌의 6대손 창설재 권두경이 이곳에 들렀다가

이수형의 그런 충절에 크게 감동,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의 높고 깊음을 기려

방을 천인실(千仞室)이라 하였다가. 이광정은 마루는 두 손을 잡고

평생토록 단종을 깊이 사모했다는 뜻에서 공북헌(拱北軒)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도계서원은 단종에 대한 불사이군 충절의 정신이 오롯하게 서린 곳이니다.

휘지않는 오로지 한 임금만을 섬기는 충절로 평생을 살다간

그 마음을 작은 고욱헌 건물 하나로 미뤄 짐작할 수 있듯 그 올곧고

굳센 마음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가 깊은 울림으로 빛나듯 합니다.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은 그저 소소한 작은 서원, 그 속에 또 작은 동재 공북헌, 그 의미를 돼새겨봄 직합니다.

▣ 도계서원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사제길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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