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 삶과 얼

충남 공주시 중동 284-1


오늘은 충청의 삶과 얼이 서려있는 충남역박물관에 갔습니다.

처음 방문한 곳이라 충남 역사박물관에서는 어떤 것들을 볼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충남역사박물관은 중동에서도 비교적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고, 건물 앞에 정원이 있어서 안정감을 주는 공간이었습니다.

▲ 충남 역사 박물관 건물 외관

충남역사박물관 외관입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건물 아래 기둥이며 창문이 좀 독특한 구조였습니다.

충남 역사 박물관은 어떤 곳인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충남역사박물관

중동성당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충남역사박물관은 많은 건축학도들이 찾는 곳이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인 1940년 충청도 감영청이었던 선화당을 이건하여

공주박물관을 개관하면서부터 박물관의 전시 기능을 담당하였다.

무령왕릉이 발굴됨으로써 그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1973년 현재의 박물관 건물을 신축하였으며,

2004년 국립공주박물관이 웅진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2006년 옛 박물관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충남역사박물관을 개관한 것이다. (출처. 공주의 원도심에서 미래를 만나다 책자 내용 중)

충남역사박물관은 역사가 오래되었네요.

정원에 오래된 나무들도 많아서 위엄을 더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 기획 특별전

안으로 들어가니 1층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안내하시는 선생님이 저희에게 설명이 필요하면 해주신다고 해서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특별전 전시실을 한바퀴 돌면서 설명을 해줬는데 정충신을 이해하는데 너무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늘 특별전의 주인공은 정충신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입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기간은 24.10.25~25.01.31 까지입니다.

어떤 사람인지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 들어가며

충무공은 무인으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시호다.

조선왕조 500년간 정충신, 김시민, 이순신, 조영무, 이준, 남이, 이수일, 구인후, 김응하 9명이 충무공 시호를 받았으며,

이 중 4명이 충청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충청도를 충절의 고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하지만 이순신을 제외하면 사람들에게 충무공으로서 알려진 이는 드물다.

이 인물들의 업적이나 전공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전시에서는 충무공 정충신에 대해서 알아보고 기념하고자 한다.

정충신은 임진왜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에서 전공을 세워 나라를 구했다.

또, 임진왜란 이후 혼란한 국제정세 속에서 이민족 방어 정책과 대응 정책을 세세하게 세워 달리 대응할 것을 주문한 실무자이기도 하다.

서산에 세거하는 정충신의 후손 가문 소장 유물을 중심으로 정충신의 생애와 업적, 추증과 예우를 확인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 주위 충무공 정충신 유물, 유적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안내문 옮김]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이순신에게만 내려진 시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9명이나 시호를 받았고 정충신이 그 중 한 명이라고 하니 더 호기심이 일어납니다.

▲ 출생과 태몽

1575년 12월 광주에서 하급관리로 있던 정윤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윤은 무등산에서 큰 청룡이 나오는 꿈과 백호가 달려드는 꿈을 연달아 꾸고 정충신을 낳았다.

정충신의 9대조 정지는 고려 말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으나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낙향하였는데,

정윤은 아들이 9대조와 같이 훌륭한 충신(忠臣)이 되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충신(忠信)으로 지었다.[안내문 옮김]

옛날 위인들의 이야기를 보면 대부분 특별한 태몽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말 특별한 태몽을 꾸어서 그 사람이 특별해 지는 것인지, 그 사람이 잘되어서 태몽이 특별해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선조들의 태몽 이야기는 정말 신기합니다.

▲ 이항복과 정충신

임진왜란 당시 정충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권율의 장계를 선조가 있던 의주 행재소에 가져오자 병조판서로 있던 이항복이 정충신을 눈여겨보았다.

이항복은 정충신을 자신의 관사에 머물게 하고 공부를 시켰다. 그리고 정충신은 의주에서 시행된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이항복은 정충신이 관직에 등용될 수 있도록 천거하기도 하였다.

이항복의 문인들 역시 정충신을 아끼고 중용하였으며, 정충신의 후손과 이항복의 후손이 세교하기도 하였다.

특히, 정충신은 1618년(광해군10) 이항복이 인목대비 폐모사건을 반대하여 북청으로 귀양갈 때 그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항복이 유배지 북청에서 죽었기 때문에 정충신은 스승을 마지막까지 모신 제자가 되었다.

이후 정충신이 경상도병마절도사 겸 진주목사로 재직할 때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을 간행하여 스승을 기렸고,

이항복의 후손으로 19세기 중후반 좌의정을 역임했던 이유원 또한 정충신의 신도비문을 지어 정충신을 기렸다.[안내문 옮김]

벽에는 정충신의 연도별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여러 사건들 중 특별한 사건을 다시 위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의 내용은 그 중 이항복과의 인연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 충무공의 후손들

조선은 공신에게 여러 특권과 함께 토지와 노비를 내려 생활과 권위를 보장하였다.

또 공신의 적장자는 문서에 등록하여 지위가 대대로 세습되었으며 서원, 사당, 사우 등 유지 비용을 국가에서 보조하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주기적으로 사람을 보내 생활 여건을 파악하고 도와주거나 벼슬을 내려주는 등 많은 은전을 베풀었다.

정충신의 후손들 또한 공신의 후손으로서 여러 우대를 받았다. 이괄의 난이 진압되고 정충신이 진무 공신으로 책훈되자,

조정은 정충신에게 서산군 지곡면 국사봉 아래 이괄의 전답을 몰수하여 내려주었다.

정충신은 이를 받아 서산 별장을 지었다. 이때 지어진 별장 인근에 정충신의 후손들이 터를 잡았고, 정착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이에 후손들은 정충신의 사당을 짓고 오늘날까지 제향을 이어오고 있다.[안내문 옮김]

조상이 공을 세우니 그 후손들이 덕을 보게 되는군요.

정충신의 후손들은 아직도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 인조 하사 갑옷

1630년 5월 가도에서 일어난 병란을 토벌할 때 인조는 정충신에게 활과 화살, 검과 갑주를 하사하였다.

갑옷은 정충신이 실제 착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깥천은 황색 운보단을 사용하였고,

안감은 운문단인 듯하나, 남아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 안쪽에 심지로 사용된 천은 세 겹으로

너비 2.5cm 정도로 누볐다. 단은 넓으며 어깨 부분에 경첩이 있어 활동성을 주었다.

갑옷의 총길이는 116cm, 품 25cm, 등솔에서 소매 끝까지의 화장 길이는 60cm이며 목둘레는 둥글게 파여 있다.

앞쪽에는 지름 1.2cm의 징을 어깨선에서 밑으로 11줄을 박고 그 밑으로 간격을 두고 아랫단까지 2줄을 더 박았다.

본래 갑옷과 목제 투구가 함께 있었으나 투구는 1975년경 도난당했다.[안내문 옮김]

갑옷이 어두운 색이 아니고 노란 빛을 띠니 왠지 따뜻한 느낌이 듭니다.

저 갑옷을 입고 정충신은 여러 전투에서 충심을 다해 싸웠을 것입니다.

▲ 진충사

정충신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사우이다.

현재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국사봉 동쪽 기슭에 있다.

본래 1636년 서산군 지곡면 대요리에 인조의 명으로 건축 되었다가 1737년 영조의 명으로 중건 되었다.

이후 당진군 정미면 신제리로 이건 되었다가 1897년 경 다시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로 이전하여 왔다.

1970년 현 위치에 국비 지원으로 신축 되어, 1984년 충청남도 문화유산 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본당의 현판 글씨는 1971년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이 썼다. 매년 4월 25일 제향 행사가 열린다.[안내문 옮김]

진충사는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제를 지내는 모습이 조금은 상상이 갑니다.

서산에 가서 실제 진충사를 한번 보고 싶습니다.

▲ 나가며

1685년 숙종은 정충신에게 '충무'시호를 하사하여 '충무공 정충신'이 되었다.

그 후손 중 일부는 이괄의 난 진압 후 받은 서산군 일대에 현재도 세거하고 있다.

정충신을 기리는 사당 진충사 또한 매년 4월 25일 추모 제향제가 열리고 있다.

충무공 정충신은 떠났지만, 그가 남겨 놓은 유산은 우리를 떠난 적이 없다.

이번 전시를 통해 충무공 정충신을 많은 사람이 알고 기억했으면 한다.

끝으로 이번 전시를 열 수 있도록 집안의 보물을 내어주신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14세손 정은영 선생님께 감사를 전한다.[안내문 옮김]

이번 전시는 정충신 장군의 후손이 자료를 내 주어서 전시를 하게 되었네요.

나라에 공헌을 한 장군의 자료를 후손들만 보관하고 있는 것 보다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는 게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처음 알게 된 분이지만 충무 시호를 받은 정충신 장군을 다른 사람들도 알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역사 속 충청남도

1층 특별 전시실을 나와 2층으로 올라가니 충청남도에 관한 전시가 시대 별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만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역사 속 충청남도

충청남도는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 위치하여 서해와 맞닿아 있으며, 경기도, 충청북도, 전라북도와 접하고 있다.

충청남도는 알맞게 발달한 산지와 내륙을 가로지르는 금강을 따라 발달한 충적 평야로 인해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 조건을 갖추었다.

금강과 그 지류는 풍부한 유량과 넓은 강폭으로 선사시대부터 농경 문화를 발달하게 한 바탕이었으며, 서해와 내륙을 잇는 수로로써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서해안을 따라 발달한 바닷길은 내륙으로 연결되는 통로인 동시에 중국이나 일본을 연결하는 대외 교역로이기도 하였다.

일찍이 이 해로는 선사시대 한강 유역의 문물과 통하는 통로였고, 그에 연한 포구들은 백제시대에는 중국 문화와 처음으로 만나는 현관이기도 하였다.

충청의 젖줄인 금강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계룡산이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과 함께 오악(五嶽)의 하나로 꼽혔으며,

조선 초기 신도안 천도설과 『정감록』의 8백 년 도읍지이자 신흥종교의 본산으로 충청남도의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안내문 옮김]

자주 가는 계룡산이 우리나라 5대 큰산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금강이 선사시대부터 수로로써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새삼 알았습니다.

▲ 백제 속 충청남도

오늘날 충청남도 일대는 고대 삼한 중 마한의 여러 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백제는 주변의 지배 세력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마한연맹체는 백제국을 중심으로 결집하였으며, 이후 흡수, 편제되었다.

백제의 중앙 권력은 지방의 핵심적 수장 계층과 상호 전략적 제휴 관계를 맺었다.

충청남도 일대에 존재하던 마한의 여러 소국들은 정치적으로 한성백제의 영역에 편입되어 간접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안내문 옮김]

▲ 토착세력과 위세품

한성기 백제는 지방 세력에게 금동관으로 대표되는 위세품을 제작, 수여했다.

이를 통해 지역 주요 거점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지방 귀족 세력을 중앙 지배 체제 안으로 포섭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백제 금동관이 출토되는 무덤의 주인은 지방의 유력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안내문 옮김]

▲ 고려 속 충청남도

후삼국의 하나로 출발한 고려는 통일 과정에서 후삼국시대 혼란과 지방 호족 세력의 난립 등으로 지방까지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고려 초 충청남도 지역은 웅주였다가 후삼국 통일 이후인 태조 대에 공주(公州)가 되었고, 성종 때 12목을 설치하면서 공주목이 되었다.

성종 대에 5도 양계로 개편하여 양광도에 속하였다. 고려시대 충청남도는 지방 제도 개편 속에서 지명 개정이 많이 이루어졌으며,

개명 된 지명 대다수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안내문 옮김]

▲ 조선 속 충청남도

오늘날의 충청남도는 조선시대 충청도의 행정 및 문화 권역 안에 포함되어 존재했다.

충남지역은 삼남 지방 중 하나로 비옥한 농업지대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물류 요충지였다.

특히, 조선시대 중앙의 유력 정치인, 가문이 대거 배출되어 독자적인 학풍이 형성하였고,

서원, 사우 등을 통해 사회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조선 후기 붕당정치의 거점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15세기 후반부터는 충청도의 별칭인 '호서(湖西)'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기도 하였다.

'호(湖)'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호서'라는 명칭은 대체적으로 충청도 를 의미했다.

호서산림(湖西山林), 호서유생(湖西儒生), 호서토적(湖西土賊), 호서대동법(湖西大同法)과 같이 충청도와 호서는 같은 의미로 기록되었다.

충청도 사족들은 호서라는 표현을 즐겼으며, 충청좌도, 충청우도와 함께 호우(湖右), 호좌(湖左)라는 표현도 즐겨 사용되었다.

이때 호우는 오늘날의 충청남도와 거의 비슷하다. 충주와 청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충청도가 되었으나 강상이나 역적 사건이 발생해

고을이 강등되면, 공주와 홍주의 머리글자를 따 공홍도, 공충도, 홍공도, 충공도 등의 이름이 잠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시 '충청도'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지역민들의 청원이 올라와 '충청도'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안내문 옮김]

충청도가 충주와 청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사실을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호서가 충청도의 또 다른 호칭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얕은 지식이 조금씩 쌓이는 걸 느낍니다.

▲ 충청남도의 독립운동

▲ 충청남도의 독립운동가

독립운동은 19세기 말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한민족의 주권회복운동으로,

한민족이 거주하는 세계 각 지역에서, 모든 방법과 수단을 총동원하여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충남인들 또한 기호유림의 충군애국사상과 절의정신을 계승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활동, 위정척사운동, 애국계몽운동, 항일투쟁 등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충남인의 독립운동은 충청남도에 국한되지 않으며, 중국, 일본, 미주 등으로 망명하여서도 1945년

광복 때까지 지속하였다. 충청남도는 2023년 현재 1,73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는데, 이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수이다.[안내문 옮김]

충남인의 독립운동가가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실재 이름들이 빼곡히 써 있는 걸 보니 많은 수가 실감이 납니다.

독립운동가가 많은 걸 보니 충청도가 충정의 고장이 맞나 봅니다.

▲ 충청남도의 어제와 오늘

사진에는 충청남도의 옛날 사진과 현재의 사진이 같이 실려서 비교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 금송

박물관의 금송은 추엉감영의 선화당을 반죽동에서 이곳으로 이전한 1939년 즈음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수령은 90년 정도이다. 금송은 귀한 목재로 공주 웅진동 무령왕릉 왕릉원 내에 있는 백제 무령왕의 관이

금송으로 제작된 것이 밝혀져 고대 한일 관계를 보여준다.

금송은 소나무를 닮았지만 낙우송과의 상록침엽수다. 나무껍질은 얇고 짙은 붉은빛을 띠는 갈색이다.

잎은 줄 모양이며 윤기가 나는 짙은 녹색이고, 끝이 파이며 양면 가운데에 얕은 홈이 있다.

햇살을 받으면 잎이 금색을 띤다. 꽃은 암수 한그루로 3~4월에 피며,

열매는 구과로 10월에 익는다. 정원수로 주로 쓰이며 건축 가구 재료로도 쓰인다.[안내문 옮김]

충남역사박문관을 바로 나오면 금송이 있습니다.

금송을 보면 왠지 반갑습니다.

무령왕의 관을 제작한 나무로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소나무처럼 보이지만 나무 줄기도 나뭇잎도 소나무와는 많이 다른 느낌입니다.

추운 겨울에는 날씨 때문에 여행지가 제한됩니다.

하지만 실내는 예외입니다.

그런 면에서 박물관 투어는 겨울철에 제격입니다.

기획 전시실에서 충무공 정충신도 만나고, 충청도의 어제와 오늘도 볼 수 있는 충남역사박물관 투어

이번 주말에 어떤가요?

충남역사박물관

○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국고개길 24

○ 전화: 041-856-8608

○ 정기휴무: 매주 월요일

* 방문날짜: 24.12.8

※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son님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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