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인문기행 (1) - 소설 <아리랑> 따라 여행하기
숱한 역사가 담긴 소설
<아리랑> 따라가는
인문학 기행
2024년 여름은 몹시 더웠습니다. 불볕더위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유례없는 더위는 과학적 통계를 소환해야지만 이해 가능한 여름이었습니다. 기상 관측상 가장 더운 여름이었습니다. 대체 가을이 올지?
겨울은 있기나 한 건지 걱정이 많았던 여름이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드디어 가을도, 겨울도 오긴 왔습니다. 하지만 너무 짧은 가을이었습니다. 분명 어느 가을날 ‘소설 <아리랑> 따라가는 인문학 기행’을 하고 기사를 쓰기 시작했는데 한 달 남짓한 짧은 가을 덕택에 서두를 풀어내기가 쉽지 않은 기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소설 <아리랑> 따라가는 인문학 기행’은 굳이 가을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루터기만 남은 텅 빈 논을 바라보며 호남평야가 얼마나 넓은가? 저 넓은 호남평야를 무대로 한 12권의 소설 <아리랑>은 어떻게 흘러갔는가? 한눈에 뵈는 ‘소설 <아리랑> 따라가는 인문학 기행’을 함께 떠나보시죠.
이 여행은 한민족문화공동체후원회 주최하는 '소설 <아리랑> 따라가는 인문학 기행(이하 아리랑기행)'입니다. 한민족공동체후원회와 회장 장현근(북원태학) 학장의 재능기부로 진행되었습니다.
한민족문화공동체후원회(이하 한민후)는 비영리단체로 2011년 전북교과통합체험학습연구회 회원 4명으로 시작하였습니다. 2024년 11월 현재 108명의 후원자가 매월 1만 원씩 기부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민후는 2013년부터 2019년까지 7회에 걸쳐 재중동포를 초청하여 '동포들을 위한 한민족문화역사체험체험학습'을 지원하였습니다. 또 2023년, 2024년에는 구 소련 동포를 초청 한민족문화역사체험학습을 2년 연속 진행하였습니다. 한민후는 동포사회의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민족 동질감 회복과 모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여 한민족 구성원으로 모국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사업을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한민후는 그들이 계속해서 한글을 사용하고, 우리 문화를 배워 통일 한국 이후 한민족 의식을 고양하는 민족교육을 실천하는 단체입니다.
출발은 만경강 상류 어우보에서
아리랑 기행은 완주군 어우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소설 <아리랑>을 세 단어로 함축하면 '물', '쌀', '농민'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소설 <아리랑>은 이 세 개의 단어를 거미줄처럼 짜서, 시간적으로는 갑오농민전쟁에서 독립항쟁까지 우리 근대사를, 공간적으로는 만경강, 동진강이 흐르는 완주, 김제, 군산, 정읍을 아우르는 서사적 파노라마입니다.
어우보는 식민지근대화론에 쐐기를 박는 우리의 수리시설입니다. '어우보'와 삼례 '독주항'은 일제강점기 이전 조선시대부터 존재해왔던 재래보라고 합니다. 대아저수지 관리소 2층 상황실에 전시된 설명문 '어우취입보현황'에 <명성황후 조카 민영익(1860-1914)이 익산시 춘포면 일원에 농장을 설립, 고산천 용수를 1909년부터 이용해 왔으며, 대아댐 준공과 더불어 콘크리트식 보를 1922년에 축조하였다.'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만경강 유역이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 수리시설이 설치되어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반박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근거가 되는 곳입니다.
대간선수로 끝 서마산 마을 옥구양수장과 전기
대간선수로 끝점 서마산 마을에 도착한 시각은 11시쯤이니까 한 시간 남짓 달린 셈입니다. 현재 콘크리트 구조물로 만들어진 대간선수로는 일제강점기 당시엔 흙을 쌓아서 만든 인공수로로 총 길이가 65km였다고 합니다. 기자는 대간선수로와 마주하면 항상 흙짐을 지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영령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 노동자들이 모진 핍박 속에서 쌓아 올린 수로의 물은 결과적으로 '수세 징수'라는 또 다른 농민 수탈의 빌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수세는 2000년에야 없어졌습니다. 그것도 농민들의 '수세 폐지 항쟁'으로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야 얻을 수 있었던 싸움의 성과입니다. 그러니까 '수세 폐지 항쟁'은 100년이나 걸린 긴 농민투쟁의 역사입니다.
지역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서마산 마을은 주변 마을보다 전기가 훨씬 일찍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연유를 따지기 위해서는 옥구저수지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보통은 골을 막아 언(堰), 제(堤), 지(池)가 축조되는데 옥구저수지는 당시 간석지로, 표고 차가 없어서 탱크형 저수지를 만들어야 했다고 합니다. 서마산길을 따라 나지막한 언덕을 올라가야 비로소 옥구저수지가 보입니다.
이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옥구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옥구저수지에 물을 담기 위해서는 대간선수로의 물을 퍼올려야 했으므로 전기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일제는 섬진강의 물을 막아 운암제를 만들고(1929. 11월 완공), 운암취수구로 물길을 돌려 동진강 유역으로 물을 보냈습니다. 1931년, 남조선 전기주식회사가 남한 최초 유역변경식 운암발전소를 세워 발전한 전기를 가장 먼저 공급한 지역이 이곳 서마산 마을입니다.
"현장에서 읽어주는 아리랑"
불이흥업에서 추진하고 있는 간척사업은 옥구군 해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한 서해안은 바닷물이 밀려들고 빠져나갈 때마다 신비스러운 조화를 부렸다. 밀물일 때는 보이지 않던 뻘밭이 썰물이 되면 몇십 리 길이 뻗치며 질펀하게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 경사도 거의 평지처럼 완만해 넓은 들판이 펼쳐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넓은 땅이 물에 잠겼다가 드러났다 하는 것은 마치 바다가 심심풀이로 부리는 요술 같았다. 더러 바다를 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바다 밑에서 그리도 넓은 땅이 드러난다는 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불이흥업에서는 그 버려진 뻘밭을 농토로 만들 욕심으로 바다를 막고 나선 것이었다. 그들은 작년에 인부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했다. 그들은 세 가지 조건을 내걸어 가까운 지방마다 선전을 하고 다녔다,
첫째, 영구소작을 준다. 둘째, 개간비를 따로 지불한다. 셋째, 소작료를 3년간 면제한다.
그 조건은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농민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그들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농토를 빼앗기고 소작도 제대로 얻기 못해 허덕거리고 있는 농민들이 도처에 수두룩하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세 가지 조건은 논밭도 없고, 소작도 없는 농민들에게는 너무나 좋은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예상대로 인부들은 쉽게 모아졌다, 외리와 내촌 사람들 중에서도 네댓 명이 나섰다. 외리의 남상명도 나섰고, 3.1만세 때 죽은 내촌의 김춘배의 아들 장섭이도 나섰다.
아리랑 7권/ 또 하나의 음모/ 16-17
그들이 내걸었던 세 가지 조건은 공염불이었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노동에 시달리며 적어도 논 열 마지기 정도는 영구소작권을 얻게 될 것이라 생각했으나 다섯 마지기밖에는 얻지 못했을 뿐더러 개간비도 따로 받지 못했습니다. 일본 이주농민들에게는 싼값에 분할 상환하는 조건으로 1가구당 3정보, 60마지기를 분배했습니다.
그들은 머슴 둘은 부려야 하는 중농 규모였습니다. 게다가 저수지 북쪽에 100원짜리 기와집까지 무상 분배되었습니다. 반면에 개간에 참여한 우리 소작농들의 거주지역은 저수지 남쪽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저수지 남쪽은 저수지보다 표고가 훨씬 낮았습니다. 소설 <아리랑>에서 한기팔의 큰딸이 두 동생을 지붕에 올려놓고 사라진 이유입니다.
한편, 가장들이 없는 집집마다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토방을 넘은 물이 마루로 차오르면서 벽에 붙은 흙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돼지의 꽥꽥거리는 비명소리와 닭들이 꼬꼬댁거리는 울음소리가 천둥소리와 빗소리에 섞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마루를 넘어선 물은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엄니, 엄니!"
막내딸이 겁에질려 월전댁의 치마를 붙들고 매댤렸다.
"아고메 이 일얼 어쩔끄나!"
월전댁이 방 안을 윗도는 물을 내려다보며 부르짖었다. 등잔의 흐린 불빛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목침이며 나무 재떨이가 물 위로 떠올랐다.
뿌지지직!
중략
한기팔은 머리가 쿵 울리는 현기증을 느끼며 두리번거렸다. 어지러운 시야에 잡히는 건 분명 딸이 둘뿐이었다.
"우리럴 먼첨 지붕에 올래놓고 언니넌 …… 언니넌 ……."
작은딸이 울움을 떠뜨렸다. 막내딸도 따라서 울기 시작했댜.
한기팔은 진훍범벅인 마루에 털퍽 주저앉았다. 시집보낼 나이가 다되었던 큰딸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아리랑 9권
'읽어주는 아리랑'을 들으며 눈은 폭우에 휩쓸린 너른 들판의 끝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옥구저수지는 간척지 한가운데 산처럼 우뚝 솟아 있습니다.
군산내항 속 아리랑
군산 내항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쌀의 도시였다고 합니다.
일제는 조선을 침략해 군산진이 있었던 수덕산 북쪽 언덕에 이사청, 우편국, 경찰서를 두었다가 1910년 이후 군산부로 승격, 군산부청을 신축하여 이전했다고 합니다.
수덕산 정상에서 옛 군산의 지도를 펼쳐 놓고 군산진의 모습을 더터 올라갔습니다.
현재 한국전력 군산지점이 있는 자리에 군산진이 있었다고 한다. 1899년 군산 개항 후 일본은 한옥으로 지어진 군산진 건물을 접수해 1908년 새 이사청(군산부로 승격하면서 부청이 됨) 건물을 짓기 전까지 목포영사관 군산분관으로 썼다고 한다. 1908년 이 자리엔 하얀 2층 건물이 들어섰다. 이사청이다. "서양식 2층으로 치장한 부청은 그 동산의 남쪽 자락을 깎아내고 높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동산이 뒤편에서 여름의 갯바람과 겨울의 북서풍을 막아주는 부청에서는 군산 시가지가 훤히 바라다보였다./ 조정래의 아리랑에서)" 일행은 한국전력 군산지점을 대각선으로 바라보며 노상 강의를 들었다. 마치 신가가 군산부청을 바라보는 각도와 흡사했다.
작가 조정래가 묘사한 아리랑은 1920년대 군산진의 모습을 그림을 그리듯 묘사했습니다.
부두를 따라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고 있는 본정통은 왼쪽 부청에서부터 오른쪽 째보선창께에 이르러 명치정과 만나고 있었다. 명치정도 곧고 길기는 본정통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중간 지점에서 약간 꺾이는 데다가 상가 중심의 거리여서 부청은 해변 쪽으로 예쁜 젖무덤처럼 도도록하게 솟아오른 동산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그 동산이 어찌하여 뻘밭 질펀한 해변에 바로 잇대어져 솟음한 것인지 신비스러웠다.
그 동산의 마루에 등대 감시소가 높게 솟아 있었다. 저 먼 옛날 군산진 시절부터 멀리 앞바다를 감시하고 뱃길을 알리던 자리였다. 그 자리에 이순신 장군이 통솔하던 삼도수군이 배치되었던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은 그 자리에다 자기네들의 배 왕래를 위해 새 시설을 한 것이었다.
서양식 2층으로 치장한 부청은 그 동산의 남쪽 자락을 깎아내고 높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동산이 뒤편에서 여름의 갯바람과 겨울의 북서풍을 막아주는 부청에서는 군산 시가지가 훤히 바라다보였다.
조선의 양반들보다 명당이라면 더 사족을 못쓰는 일본사람들은 부청을 명당에 앉히기 위해 동산 자락쯤 가차 없이 깎아냈던 것이다. 부청 자리는 군산에서 두 번째 가는 명당으로 손문나 있었다. 첫 번째 명당이야 으레껏 신사 자리였다. 신사는 부청이 차지한 동산보다 네댓 배는 더 큰 규모의 동산 중턱을 깔고 앉아 있었다.
신사는 그들의 철칙에 따라 동쪽을 향해 자리잡고 있었고, 어느 곳에서나 그렇듯 그 주변 일대는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신사와 부청은 그 위치가 기묘해서 부청에서 신사가 대각선으로 바로 올려다보였다. 마치도 부청에서 충성을 맹세하는 것 같기도 했고 신사에서 충성근무를 감시하는 것 같기도 한 형국이었다.
아리랑 5권
작가의 그린 듯한 묘사를 보며 아리랑문학관에서 본 작가가 그린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작가는 군산 개항 이후 군산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을 수집하여 그림으로 그렸으리라 여겨집니다. 수덕산에서 작가가 그렸을 군산진의 모습을 떠올리며 작가의 디테일함에 놀랐습니다. 수덕산 정상에 군산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 VR체험 시설이 있어 군산의 어제와 오늘을 비교하며 볼 수 있다면 더 재미있는 군산 여행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어디를 봐도 '예쁜 젖무덤처럼 도도록하게 솟아오른 동산'은 없습니다. 축항 공사로 산자락을 깎아 바다를 메운 반듯하고 긴 군산 부두만 있을 뿐입니다. 그 길을 걸으며 아리랑 속 인물들의 삶을 만난다면 그들이 결코 허구 속 인물이 아님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날의 비릿함이 여전히 군산 부두에 바람으로 존재합니다.
<아리랑>따라가는 인문학 기행,
2편으로 계속됩니다.
글, 사진=권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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