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기 함안군 블로그 기자단 조윤희

응암재(鷹岩齋)

-주소: 경상남도 함안군 법수면 강주1길 246-47

(지번. 강주리 1246)

-함안 조씨(咸安趙氏) 대종중의 재실

여름이 긴 자락을 드리우고 있지만 그 끝자락을 붙잡고 시나브로 가을이 다가오는 요즘입니다. 아침저녁으로 할퀴어대던 더위가 주춤하니 그나마 여전한 불볕더위에 지친 몸과 맘도 견딜 만해지는 것 같네요.

드라이브하면서 들여다보면 푸름이 춤을 추고 맑은 공기가 넘실대는 곳인 함안.

저의 함안 출발지는 음...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요? 제 성씨가 가진 뿌리를 더듬는 것부터 하게 되더라고요.

오늘 제가 찾은 곳 역시 함안 조씨와 관련이 있는 곳이랍니다.

그럼, 저와 함께 9월의 여행하기 좋은 응암재를 향해 드라이브하면 가보실까요?

함안군 법수면 강주리 음암 새터 마을에서 매바위 마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있는 조선 후기 사당인 응암재(鷹岩齋)의 좌측에 별도의 일각문 앞 너른 주차장이 있었는데 풀들이 자란 모습을 보고 추석 전에 관리를 하려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문 앞에 섰네요.

아~

녹슨 문고리에 끼워진 나무 동가리를 보면서 너무도 소박한 모습을 마주하면서 응암재를 관리하고 계신다는 할아버지를 입구에서 만났는데 그분의 모습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더군요.

함부로 다가설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다가가면 누구라도 맞아줄 것 같은 열린 마음을 느끼게 하면서 화려하지 않고 절제된 것 같은 응암재의 모습입니다.

조선 후기 즉, 1779년(정조 3) 선대의 묘제를 위하여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다고 하지요.

안가태평(安家泰平)을 기원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에서 유래된 함안은 무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고장으로 고대 국가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라가야의 문화를 꽃피운 고장이기도 하고요.

그 안에 살았던 조려 선생의 흔적들이 함안의 곳곳에 남아있어서 응암재를 둘러보면서 조려 선생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제가 아는 바를 공유해 봅니다.

고려 전기까지 응암재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목조 와가이며 팔작지붕이었다고 하는데 막상 제가 봤을 때는 정면 5칸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세월이 흘러 수차례 보수를 하다가 근래에 다시 중수를 했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했네요.

팔작지붕을 한 응암재의 측면 모습이랍니다.

응암재는 어계 조려와 정부인 흥양 이씨의 묘소 관리와 묘제를 위한 재실로서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건물을 세운 모습입니다.

조려에 대하여...

-조선 세종, 문종, 단종 때의 문신

-생육신의 한 사람

1420년(세종 2년) 경상남도 함안에서 출생하여 1453년 성균관 진사 시험에 합격하면서 점점 명망이 높았던 조려(趙旅)는 국자감에 입학하여 학문 연구를 하던 중, 1455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즉위하자, 불합리한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을 임금으로 섬길 수 없다 하여, 폐위된 단종에 대한 충성과 의리로 망설임 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 함안 군북에 낙향하여 은거하였다고 해요.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漁溪)를 사용했던 조려는 고려 공조전서(工曹典書) 열(悅)의 손자로,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 안(安)의 아들로 태어났답니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인품이 출중하여 두각이 뚜렷하게 나타나 사람마다 훌륭하게 될 그릇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고 해요.

그는 글공부에 남달리 힘쓰고 그 공부의 요령이 대의를 통투(通透) 하는데 힘쓰고 헛되게 뜻을 모르고 암송하는 버릇을 따르지 않았으며,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따서 짓는 모방적인 습성을 배격하였다고 해요.

어려서부터 의지적인 삶을 살았던 것 같은 그에 대한 흔적이 있을까 하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오른쪽은 두 칸 정도의 방이 있었고 왼쪽에는 한 칸 정도의 방이 있었으며 방과 방은 마루로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중수하면서 바깥에 유리문을 달아서 그런지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조요(照耀)하여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둘러보게 하더라고요.

방 앞에 편액들이 걸려 있었는데 한자에 까막눈이라 패스했습니다 ㅜㅜ

넓은 방은 마루와 달리 깨끗이 소제된 모습이었어요. 누구라도 오면 잘 수 있을 것 같은 침구도 준비되어 있고요.

1453년(단종 1)에 성균관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가 당시 학계의 유종(儒宗)으로 이름 높은 형조판서 김 종직(金宗直)의 시험관 밑에 응시하여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簒奪)하자 그 불의(不義)에 항거하였던 조려(趙旅)는 어느 날 문생(文生)과 작별하고 함안(咸安)에 돌아온 후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두문불출(杜門不出) 하고 말았는데 그의 시문(詩文)에도 김시습의 시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사리를 뜯어 먹으면서 은둔생활(隱遁生活)을 하겠다는 의미의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지요.

1456년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어린 임금의 안전을 기원하였으며, 1457년 금성대군과 이보흠 등이 거듭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고 단종이 사사당하자 문상을 하러 가던 조려가 영월 청령포 앞에 이르러 배가 없어 통곡하고 있을 때 호랑이가 나타나서 그를 등에 업고 영월 동강을 도강했다 하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져 오고 있지요.

땅 넓고 하늘 높아 사념(思念)이 아득하네,

희헌(羲軒)의 세상 멀어져 슬프기 한이 없고,

요순(堯舜) 시절 못 만나니 마음 절로 상하구나,

침통히 읊조리는 붓끝에는 천지가 망막하고,

흠뻑 취한 술잔 앞에 세월은 유유하네

가엾어라 이 늙은이 오래 삶이 괴롭구나,

마음속 그리운 임 잊을 수가 없다네.

-조려의 구일등고시(九日登高詩) 중에서 결미 부분

응암재(鷹岩齋)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바라보면서 조려 선생의 절의를 그려보았습니다.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禪位)하자 성균관에 있다가 함안으로 돌아와서 서산(西山) 아래에 살았는데, 이 서산을 후세 사람들이 백이산(伯夷山)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그는 벼슬을 하지 않고, 다만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어계처사(漁溪處士)를 자처했던 그의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아 뭉클해지기도 하더군요.

응암재의 대문은 솟을삼문으로 대문 좌우는 방을 만들어 다용도로 이용하고 있으며 이 외삼문으로는 출입을 하지 못하고 재실 왼쪽에 있는 일각문이라는 문으로만 응암재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응암재 내부에 걸려있는 상량문을 담아보았습니다.

1456년(세조 2년)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사육신(死六臣. 성삼문, 박팽년, 하위, 이개, 유성원, 김문기)에 대칭하여 세조 즉위 후 관직을 그만두거나 아예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세조의 즉위를 부도덕한 찬탈 행위로 규정하고 비난하며 지내다 절개를 지켰던 여섯 명의 신하를 생육신(尼愛美)이라고 하는데 김시습, 성담수, 원호, 이맹전, 남효온 그리고 조려 선생이 있습니다.

함안에서 절개를 대변하는 인물이 있음이 감사하고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좋은데 과연 다음 세대들은 생육신이며 사육신은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요? 역사가 없는 민족은 내일을 바라볼 수 없지 않을까요?

K-culture 속의 함안을 그리고 함안의 인물을 알릴 수 있는 상품들이 계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을로 향하여 난 길을 걸어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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