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역사가 담긴 소설

<아리랑> 따라가는

인문학 기행 2편

하와이로 떠나는 방연근과 군산 도선장

금강포구의 왼쪽을 따라 해변으로 이어지고 있는 군산은 온통 왜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곧게 뻗은 새로 난 길들이며, 그 길을 따라 새로 지어진 높고 낮은 집들이 하나같이 일본식이었다. 예로부터 조선사람들의 초가집은 해변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는데 개항이 되면서 일본사람들은 그 비워둔 해변가를 다 차지했던 것이다. 2층 건물이 많은 해변 쪽에서 대륙신민회사를 찾아내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한자로 쓴 나무간판 앞에 섰을 때 그들 세 사람의 삼베옷은 비에 후줄근히 젖어 있었다. 방영근이 보퉁이를 바꿔들며 머뭇거렸다. 감골댁은 아들 뒤로 붙어서며 몸을 오그렸다. 그 눈치를 채고 지삼출은 앞으로 나서며 문을 옆으로 밀어댔다.

중략

"아줌니 섭혀도 여그서 이별허시제라. 배야 비가 잽혀야 뜰 것이고, 우리야 갈 길이 또 멀잖은게라."

지삼출은 감골댁을 달래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니 그리허시요. 동상덜이 기둘리는디 얼렁 집으로 가야 안 되겄소."

방영근은 이때다 싶어 얼른 말을 받았다. 순간 감골댁의 눈이 동요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때까지 문을 틀어잡고 있던 두 손이 스르르 풀렸다.

"그려, 언제 갈라져도 갈라져야 헐 일인디……." 몸을 바로잡은 감골댁은 아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뱃길이 수만 리라는디, 이리 갈라지면 은제나 만내질거나." 금방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아리랑 1권

도선장은 아리랑 속 방영근이 역부로 팔려간 대륙식민회사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동백 대교가 있어 교통할 수 있으니 굳이 배를 탈 이유가 없다. 그렇게 도선장은 사라졌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나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도 도선장이 있었어요." 물론이다. 동백 대교가 2018년에 개통되었으니 도선장이 사라진지 얼마 되지 않는다. 나도 도선장에서 배를 타고 장항으로 건넌 경험이 있으니 옛날이야기라고 하기엔 그닥 멀지 않은 이야기다.

조정래의 아리랑에서는 방영근을 역부로 팔아넘긴 장칠문의 대륙신민회사를 도선장에 두고 있으나 실제 역사상 일제가 당시 부두로 썼던 곳은 부잔교가 설치된 곳부터 째보선창이 있는 곳이란다.

군산내항

군산내항 철도는 1921년부터 1931년까지 수탈한 쌀을 옮기기 위해 군산항에 연결된 철도다. 철도는 1921년 군산항 축항 공사 과정에서 군산항의 동쪽까지 연결되었고, 이후 서쪽까지 연장되었다. 1931년 이후에는 군산세관 북쪽으로 군상항 역이 개설되면서 군산 내항 전체에 철도가 부설되었다.

북원태학 소설 <아리랑> 따라가는 인문학 기행 연수자료

현재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을 중심으로 군산내항에 잔존하는 철도와 창고, 부잔교는 침략의 속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수탈 증거가 총집결한 이곳은 쪽 빨아먹고야 말겠다는 살기를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서면 소설 속 군산내항은 소설로 읽기보다는 차라리 민중의 역사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소설 <아리랑>을 한숨에 읽어 내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책을 읽다 덮고 숨을 돌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읽어 낼 수가 없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서. 그래서 아리랑 12권을 읽는데 12달이 지나갔습니다.

쌀이 가득 쌓였던 군산내항엔 자동차들이 즐비하게 주차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된지 오래다. 그들이 이곳을 찾기 전에 아리랑을 한 번쯤 읽고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군산내항에 잔존하는 철로다. 저 길은 그날을 기억하련만……. 가끔 헛소리로 일제의 침략을 미화하는 학자나 정치꾼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울화가 치민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반박 근거로 삼는 자료 중 하나가 소설 <아리랑>이란다. 그런데 답사 기행을 하다 보면 <아리랑>에서 묘사하는 것보다 더 차고 넘치는 역사적 근거들이 실제로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때로는 인간성을 가늠하는 성선(性善)과 성악(性惡)의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째보선창

째보선창은 농토를 빼앗긴 유랑 농민의 삶터입니다. 그들은 노동자로 전락하여 살 방도를 찾아 째보선창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소설 아리랑 속 감골댁, 수국이와 보름이, 방대근, 손판길, 무주댁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또 다른 이름은 미선소 여공, 쌀창고 낙미쓸이, 부두 노동자였습니다. 대비되는 백남길, 장칠문, 서무룡 같은 인물들도 생각을 뚫고 쏙쏙 올라왔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하는 인간들입니다. 그날 째보선창에 불었던 바람이 그랬습니다. 군상들의 얼굴이 겹쳐지고, 냄새가 겹쳐지고……. 그러나 째보선창의 흔적은 푯말로만 존재할 뿐,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째보선창은 묘하게도 땅이 양쪽으로 찢어지듯 갈라지듯 하면서 바다와 맛닿아 있어서 배들을 대기가 아주 좋았다. 그래서 옛날부터 선창이 되었고, 날마다 작은 배들이 바글거렸다. 배들이 많이 모여드니까 자연히 객줏집들이 많아지게 되고, 일거리를 찾아 막일꾼들이 언제나 북적거렸다. 그런데 그 선창의 생김새가 여자의 그것처럼 째졌다고 해서 째보선창이라고 한다고도 했고, 언청이의 입술처럼 째졌다고 해서 째보선창이라고 한다는가 하면 하필이면 언청이가 오래도록 유곽을 하고 있어서 째보선창이라 한다고도 했다.

소설 아리랑에서

출처/ 북원태학 소설<아리랑> 따라가는 인문학 기행 연수 자료집에서/ 경포천이 금강에 합류하는 부근의 사진이란다. 지금은 복개하여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기록만 남아있는 째보선창에 대한 글을 그대로 옮겨 보았다. / 군산 째보선창은 (구)옥구군 경장리에 속한 자그마한 어촌 죽성포구의 속명(俗名)이었다. 째보선창이란 지명은 1930년을 전후해 해안 매축공사가 끝나고 포구에 어항 기능 시설이 갖춰지는 시기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래는 이곳 '째보선창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객주의 별명'이라는 설과 당시 '포구가 언청이처럼 Y자로 갈라졌기 때문'이라는 설 등이 내려오는데 후자가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째보선창은 종합 어 시장 신축과 산업도로(해망로) 확장공사로 1978년 매립되었고, 군산시 수협 조판 위판장 부지를 제외한 매립지가 지금의 공용주차장이다. 복개 전에는 소설 <탁류> 기념 빗돌이 세워진 곳인 현 위치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출전 '군산항에 얽힌 이야기들' 군산문화원

김제 새창이 다리

​김제 새창이 다리에서 둘째 날 '소설 <아리랑> 따라가는 인문학 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강의 시작은 이 지도다. <아리랑>을 제대로 읽고자 한다면 호남평야의 물길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해방 후, 꾸준히 진행된 호남평야의 수리시설을 알아야지만 식량 자원 확보를 위한 농도 전북특별자치의 가치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호남평야의 물길은 마치 해산을 앞둔 어미의 젖줄처럼 조밀합니다. 어린 시절 겪어야 했던 보릿고개가 없어진 것이 다만 경제 성장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공감할 수 있는 지도입니다.

강의를 들으며 수자원 확보를 위한 거시적 장기 계획에 감탄했다. 집에 돌아와서 호남평야의 물줄기를 이해하기 위해 지도를 확대해 놓고 강의 다시 듣기를 하며 정리한 지도가 이 지도다. 동진강 유역을 따로 떼서 정리하며 호남평야의 물길을 이해하려고 복습했다.

운암 발전소는 1929년 12월 착공해 1931년 12월 완공했습니다. 군산 거주 일본인들의 전기 공급을 위해 설립된 남조선전기주식회사가 공사를 맡았습니다. 운암 발전소는 운암댐 취수구로 방류되는 섬진강 물을 발전에 활용한 남한 최초의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소로 1985년 폐쇄되기까지 54년간 5억 KW가 넘는 전기를 생산해 냈다고 합니다. 이후, 운암취수구의 물이 동진강도수로를 따라 칠보까지 흘러가 칠보발전소에서 전력을 생산해내고 있다고 합니다. 칠보발전소에서 발전에 사용한 물은 다시 동진강도수로를 통해 부안의 청호저수지에 담겨 계화 간척지의 농업용수로 쓰인다고 합니다.

운암취수구에서 유역변경한 섬진강 다른 한 갈래는 동진강으로 흘러 태인의 낙양보애서 시작한 김제간선수로 물길이 김제 망해사까지 흘러간다고 합니다. 낙양리에는 물을 백 갈래로 보낸다는 뜻을 담은 일원백분수하(一原百分水河)비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출발한 김제간선수로의 물이 광활한 광활간척지를 적셔준다 하니 과연 백 갈래의 물길입니다.

김제간선수로는 태인 낙양리에서 시작해 망해사까지 흐르는 수로로 광활간척지의 농업용수 공급원이다.

광활면 항공사진/ 광활면은 우리나라 여느 농촌과 자연환경이나 인문활경이 다르다. 우리나라 농촌 마을은 산 아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사는데 광활면은 네모 반듯한 논 가운데 집들이 띠엄띠엄 있다. 소작농들이 농경지를 관리하며 최소한의 생활만 유지할 수 있었던 공간으로 '집'이라는 개념보다는 차라리 '우리'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그런 공간 구조다.

소설가 임영춘은 장편소설 『갯들』(1981년, 현암사)을 통해 현 김제시 광활면, 곧 일제강점기 당시, 동진농업주식회사가 모집한 이주 농민의 삶을 기록하였다.『갯들』은 주인공 ‘나’(소설명 임판순, 작가 임영춘)를 중심으로 부친인 임종해, 조부인 임치석 삼대와 주변이 어떻게 땅을 잃고 간척지에 정착하여 혹독한 노동에 종사하였는지에 대한 간난신고의 기록이자, 당대의 집단 기억이며 우리지역에 대한 정밀한 민족지이다.

동진농업주식회사는 일본재벌인 아베 후사지로(阿部房次?)가 자기자본 백만원과 총독부 자본 백만원을 들여 1924년부터 1927년까지 김제군 진봉면 거전에서 학당까지 약 10㎞의 방조제를 쌓아 조성한 1,800정보(국제규격 축구장 약2,500개)의 간척지 농장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 군부 출신의 후쿠이 시게키(福井重記)가 방조제 완공과 간척지 조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는데, 후쿠이는 1921년 12월에 베르사이유 조약 평화실시위원이자 국제연맹 군사감독위원도 겸임할 정도의 일본군부의 재원이었다.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총676호의 이주 농민이 간척지에 정착했다. 당시 동진농업주식회사에서는 이민자를 받을 때, 손바닥 검사 등 신체검사를 통해 소처럼 일을 할 수 있는 소작인을 모집하였다. 바람을 겨우 막는 삼칸 초막을 거처로 이주농민 부부가 한해 농사지어야할 논의 규모는 6천평(초기에 7천이백평)으로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의 시간으로 먹고 자고 남은 시간 전체를 노동에 쏟아 생산량을 맞추어 쫓겨나지 않는 것이었다.

소작 분할은 4 · 6제로 4할이 농민의 것이라지만 조세, 논갈이대, 비료대, 종자대, 연차로 갚는 입주가옥대, 식량 빚 등으로 갈취당하고 이주농민은 최소한의 식량으로 연명해야 했다. 이와 반대로 동진농업주식회사의 수입은 각종 지표상 목표량에 도달하였고, 아베는 농장 안에 간척출장소 및 농사시험장 등을 세워 토지개량사업을 통한 산미증식계획에 일조하였다. 이는 이 시기 간척사업이 가지는 수탈적 성격을 방증하는 것이다. 당시 이주농민이 참혹한 노동환경은 소설 곳곳에서 처절하다. 농민들은 바쁜 모내기철을 맞추기 위해 날이 밝기가 바쁘게 나와 어두워질 때까지 쉴 새 없이 모를 심어야 했으며, 곪은 손가락을 헝겊으로 싸맨 채 모를 꽂다가 모가 떠 치도곤을 당하거나, 못줄 속도를 못잡아 허둥대다 기함해 기절하였다. 아이를 낳고도 사흘이면 반드시 논에 나와야했으며, 거센 해풍으로 논에서 일을 하는 동안 한 해만 해도 얼굴 가죽이 몇 번씩 벗겨지곤 했다.

참혹한 노동환경보다 감당하기 어려웠던 일은 어렵게 낳아 기른 자식들을 노동에 쫓기느라 지켜지 못해 배앓이병으로 잃고, 식수용 물항아리 등에 사고로 잃는 것이었고, 이 슬픔을 방조제 아래 몰래 묻어야 하는 것이었다. 또 동진수리조합에서 공급하는 용수 외에 별도의 식수원이 없었기 때문에 용수로 주변 윗마을의 생활오물이나 죽은 동물의 사체까지도 간척지의 몫이 되어, 더운 여름날 목마름을 참지 못하고 끓이지 않은 똘물을 마시고는 배를 앓다 죽는 경우들이었다.

임영춘선생의 갯들은 처절한 생존의 기록이자 광활 간척지 이주농민의 삶을 통해 들여다 본 식민지시대의 기억이다. 또한 작가의 처절한 경험이 녹아있는 일화 하나 하나가 매우 절실하여 여운이 길다. 그래서 좀 더 길게 생각하고 되뇌다 보면 임영춘선생의 작업들을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에 대한 답을 얻을 것 같다.

■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학예연구사

[지평선의 고장, 김제이야기] (16) 처절한 생존의 기록이자 식민지시대의 기억, 소설 `갯들'...김제 광활, 축구장 2,500개 넓이 간척지 농장|작성자 쉬리

새창이 다리는 1933년에 완공된 다리로 김제 광활의 광활한 간척지에서 생산한 쌀을 군산으로 실어내기 위해 일제가 만든 다리입니다. 신창진이 있던 곳으로 백제시대엔 중국과 무역항이었다고 합니다. 일제 수탈로라는 생각만 가지고 건넜던 새창이다리에서 곡창 호남평야에 모이고 갈라지는 물길 이야기를 들으며 농민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을 지키며 살아온 민중의 삶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얀 쌀'은 민중의 붉은 피와도 같다는 생각에 잠시 숙연했습니다.

새창이다리를 건너 왼쪽 만경강 둑에 비석 하나가 서 있습니다. 국가보훈부 지정 현충시설입니다.

김영상(金永相)은 1836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에서 김경흠과 나주오씨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6세에 고향인 정읍 칠보면 무성리 원촌으로 이사하여 18세에 인척인 김인흠, 23세에 김기에게 수학하고, 50세에 소휘면(蘇輝冕)의 제자가 되었으며, 기정진 · 송병선(宋秉璿) 등과도 교유하였다. 김영상은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의 장리(掌理)로 있던 중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빼앗기자 70세의 고령임에도 최익현 · 임병찬 등과 함께 태인의병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1906년 6월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총참모장이 되어 지역 유생들을 참여하게 하였다.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순국하자 1907년 태산사(台山祠)를 건립하고 그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이때 김영상은 유림들의 요청으로 태산사 상량문을 지었고 한동안 태산사에 머물렀다.1910년 8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가 10월 노인들에게 은사금(恩賜金)을 주려 하자 “대한신민(大韓臣民)이 어찌 원수의 돈을 받겠는가.”라며 이를 수차례 거절하면서 사령장에 적힌 자신의 성명을 찢어버렸다고 한다. 이에 1911년 5월 일제가 일왕을 모독한 불경죄로 그를 체포하여 동곡헌병대에 구금하였다가 군산으로 압송할 때 만경강 사창진(沙瘡津)에서 투신하여 자결하려 하였으나, 헌병이 그를 구출하여 실패하였다.1911년 5월 9일 옥중에서 단식, 순국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춘우정이 투신했었던 만경강 신창진

김제향교

징게맹겡? 김제 만경보다 훨씬 정감이 가는 우리 동네 말입니다. 30년 전 징게멩겡 벌판을 문학기행 하듯 통근하던 그 길을 달리면서 한 번도 김제향교가 아리랑의 배경이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책을 읽어내는 독서 역량의 차였을 것입니다.

소설 <아리랑>에서 김제향교는 지식인들의 고뇌를 담은 공간입니다. 당시 유생 임병서와 신지식인 송수익의 만남이 그랬고, 신세호, 임병서, 공허의 만남이 그랬습니다. 항거 과정에서 지향점이 달랐던 시대의 모순을 그린 공간을 향교로 설정한 이유를 기자는 당시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역사를 볼 수 있는 안목의 문제였습니다. 이번 답사를 통해서 비로소 행간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 왜놈들한테 그 큰 빚을 내서 왜놈들을 위해 물길을 만들다니, 그 빚더미는 결국 조선사람들이 떠안는 것 아니오!" "그리된 거지요." "조정대신놈들, 정말이지 다 쳐 죽여야 할 놈들이오!" 임병서가 주먹을 부르쥐었다. "어차피 왜놈들 주구 아닌가요?" 송수익이 쓰디쓰게 웃었다. 그 얼굴에 증오의 빛이 돋아나고 있었다. 다 같이 목소리를 맞추어 책을 읽어 내리는 어린 음성들이 멀찍이서 들려오고 있었다. 햇살 다사로운 속에 들려오는 그 맑고 카랑한 목소리들은 마치 즐거운 노래라도 부르는 것처럼 율동적이고 탄력적이었다. 송수익은 손이 닿는 대로 파릇하게 돋고 있는 쑥잎을 뜯어 입에 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발랄한 목소리에 실리고 있는 한문이 역겹고 괴롭게 들렸던 것이다. "무슨 심사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시오?" 임병서가 송수익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저 아이들 글 읽는 소리가 귀에 들어와서…… 세상이 이리 급변하고 있는데 태평세월로 아이들한테 한문이나 읽혀대고 있는 것이 답답하고 마땅찮기도 해섭니다." 송수익은 잘근잘근 씹고 있던 쑥잎을 뱉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입안에 쌉싸름하고 씁쓰름하면서도 싱그럽고 화한 쑥의 독특한 향내가 가득했다. 그는 숨을 한껏 들이켰다. 진한 쑥 향기에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렇지요. 저 아이들에게 어서 신식공부를 시켜야 옳지요. 저러다가는 세상 돌아가는 것하고는 정반대로 애늙은이들이나 만들 뿐이지요."

아리랑 2권 9쪽

김제향교는 역사의 연장선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 또 가르치는 일을 평생 해 온 사람으로 교육의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던 공간 또한 김제향교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교육은 잘 가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도 이 공간에서 함께 했습니다. 교육현장은 아주 보수적입니다. 가끔 우리 교육이 이래서 되나 싶을 정도로 변화 앞에 중무장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근자의 사례로 IB 교육과정에 대한 교사들의 설문 조사 결과입니다. 설문에 임한 교사 77%가 부정적 평가를 했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학부모 75%가 IB 교육과정을 선호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세상은 전보다 더 빠르게 변하는데……. 이래도 되는 걸까? 5차 산업혁명 시대의 교육에 대한 염려도 함께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소설 <아리랑> 따라가는 인문학 기행은 과거를 반추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시간을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죽산면사무소

김제시 죽산면행정복지센터는 구길 가에 있습니다.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주변은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면사무소 건물이 더 높고 큰 새 건물로 바뀌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후 죽산면사무소는 모습을 달리해가며 적어도 서너 번은 새로 지어졌을 법합니다. 1920년대 이 자리엔 주재소도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2024. 11.3.)죽산면행정복지센터와 아리랑문학마을에 조성한 일제강점기 죽산면사무소 모습

빼앗긴 농토를 찾아내려고 몰려갔던 내촌과 외리 사람들은 소작인들보다 더 심하게 가슴에 찬바람이 일고 있었다. 확실한 자기 논에 농사를 짓고서도 소작인 꼴로 곡식을 빼앗겨야 하는 억울함 때문만이 아니었다. 모두 엉덩이가 터지고 으깨지도록 몽둥이질을 당해서 아니었다. 주모자로 잡혀들어간 박병진과 김춘배가 여직껏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전주로 넘기고서도 재판도 하지 않고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그 일만이 아니었다. 몽둥이질을 당한 사람들 중에서 여섯이나 불구자가 생겨났던 것이다. 내촌에서는 두 사람이 절음발이가 되었다. 그에 비해 외리에서는 네 사람이나 불구자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그들 넷이 전부 절름발이가 아닌 것이 문제였다. 절름발이는 두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절름발이에 성불구가 되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겉모양은 멀쩡한데 성불구가 된 것이었다.

아리랑에서

소설 <아리랑>은 죽산면 홍산리 외리마을과 내촌마을 사람들이 일제강점기를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죽산면사무소와 주재소에는 소설 <아리랑>의 주 무대로 그들의 핍박과 탄압이 담겨있습니다. 친일파인 죽산면장 백종두와 순사 장칠문의 형언할 수 없는 악행이 펼쳐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배자의 그늘에서 굴종하며 배부른 돼지가 되기를 자초한 그들의 말로가 평탄하지 않았으니 그래도 소설은 양심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부분의 친일파 후손들이 잘 먹고 잘 사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결론을 맺었으니 책을 읽으면서 받았던 마음의 상처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습니다.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우리의 친일 청산은 아직도 멀었는데……. 친일세력과 일본은 우리가 주장하는 사과 요구와 배상 책임이 과연 지겹기만 한 것인지 냉철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기자가 마이즈루에서 '2024년 우키시미호 폭침 조선인 희생자 진혼굿'을 하며 일본 시민단체가 50년간 지내왔다는 추모제가 그저 마냥 고맙기만 한 것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이 응당 치러야 할 사죄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국가 주도가 아니라 시민 주도였으므로 거기에 그나마 고맙다는 마음을 담았던 것입니다.

아리랑문학마을에 조성된 일제 강점기 죽산주재소와 전시된 고문 도구들/ 어떤 것이 쇠좆매지? 쇠좆매는 소 자지로 만든 채찍이다. 소를 잡을 때 소 자지의 굵고 긴 뿌리까지 고스란히 뽑아내 통풍이 잘 되는 그늘에 말려 길고, 보드랍고 야들야들하여 살을 착착 감아 드는데, 그 끝에 삼각지게 깎은 납덩이까지 매달아 그 납덩이가 속살을 파헤치고 들어가는 고문 도구란다. 주재소 벽에 걸린 저것이 쇠좆매가 아닐까? 유심히 살펴봤지만 알 수 없었다. 무도하기 짝이 없는 놈들의 만행을 짐작할 수 있는 물건들이 과거를 증명하듯 뻔뻔스럽게 걸려 있었다.

한기팔의 아내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며 논두렁에 주저앉았다. "사람이 미련허기가 곰 찜쪄묵겄어. 밭 찾지도 못허고 저리 잽혀갈람서 멋났다고 똥언 퍼다 붓고그려. 오기로 일본사람덜 이겨지간디. 시상살이럴 제때제때 눈치코치 봐감서 히야제." 이장이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네놈이 집터에다 똥 퍼다 부었지!" "아 아닌디요. 무신 소리다요?" 취조는 이것으로 끝났다. 한기팔은 곧 다른 방으로 끌려가 아랫도리가 벗겨져 열 십자 형틀에 묶였다. 한기팔은 어젯밤 마누라도 모르게 똥을 퍼다 부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빼앗긴 밭을 되찾으려고 똥을 퍼다 부은 것이 아니었다. 그 땅에 집을 짓고 살 왜놈들을 망하게 하려고 한 일이었다. 옛날부터 묏자리나 집터는 으레 명당에 잡는 것이었다. 명당에 서린 길운은 집안을 복되고 흥하게 한다고 했다. (중략……)한기팔은 형틀에서 풀려나서야 엉덩이가 피범벅인 것을 알았다. 네 군데나 생살이 찢어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기팔은 그때서야 자신이 말로만 들었던 쇠좆매를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쇠좆매 30대면 볼기짝이 다 찢어지고 갈라져 피걸레가 되고, 50대면 살이 파헤쳐 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 속뼈가 드러난다고 했다.

아리랑 4권에서

하시모토농장

​하시모토는 소설 <아리랑>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하시모토 나카바는 김제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강제 모집해 보낸 인물이기도 합니다.

관리야 자리가 높기만 하면 권력이고 돈이고 다 한꺼번에 차지하게 되는 건데

"하하하하…… 백상은 역시 생각이 개명하지 못한 조선 촌사람이오. 생각이 그 정도인 백상한테 내 생각을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소. 그건 세월이 가면서 차차 알게 될 거요. 백상이나 벼슬을 하도록 애쓰시오. 아니, 지금도 벼슬을 하고 계시는군. 일진회 회장이 아니신가." 하시모토의 입언저리에 어리는 건 비웃음이었다. "알 수 없는 일이오.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고 벼슬이 싫다니……." 백종두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벼슬을 하고 싶었으면 일·로 전쟁에서 세운 공로로 얼마든지 벼슬을 할 수가 있었소. 허나 난 미련 없이 거절했소. 내가 군인이 되지 않고 세멘트회사 사원이 된 것도 블라지보스토크 지점 근무를 자원했던 것도, 밤낮없이 로서아어를 공부해서 지점을 양도받아 하시모토 양행을 경영한 것도 다 대자본가가 되려는 꿈 때문이었소. 그런데 전쟁이 발발해 통역으로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고, 내가 탄 배가 군산항에 기항하게 되어 이 일대를 면밀히 살펴보니까 이곳이 내 꿈을 다시 펼칠 적당한 곳이었다 그거요. 그래서 당초의 내 사업자금과 전공포상금을 이곳에 투자해서 내 꿈을 이루기로 한 거요."하시모토의 어조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백종두는 자못 놀라움으로 하시모토를 바라보았다. 하시모토가 자기의 과거에 대해 입을 열기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 짤막한 몇 마디만으로도 그가 살아온 내력이 너무 색다르고 특이해 백종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시모토상이 그리 장한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얘기가 참 재미있는데 좀 세세하게 해주시지요. 아주 배울 게 많을 것 같습니다." 백종두는 아부 섞은 말에 설탕까지 발라대고 있었다. "거 뭐 대단할 것 없어요. 차차 지내가면서 얘기하죠." 하시모토는 지도를 접으며 냉철하게 말했다. 그의 옆으로 다가앉기까지 한 백종두는 영 무색해지고 말았다.

아리랑에서

그러나 그들은 미리 계획한 대로 순사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다시 모였다. 그들은 하시모토의 집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다나카가 말한 상부를 찾아가기 전에 하시모토의 집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다나카가 말한 상부를 찾아가기 전에 하시모토와 소작권을 해결하려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하시모토 역시 대문을 열지 않았다. 개 짖는 소리만 컹컹 울려 나왔다. 그런데 그 짖어대는 소리로 보아 개는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한동안 극성스레 짖어대던 개들이 잠잠해졌다. "이, 하시모토가 나오는갑다." 빈색을 하는 누군가의 말이었다. "그려, 지가 안 나오고 어쩔 것이여." 다른 사람이 느긋한 어조로 장단을 맞추었다. 그때 대문이 열렸다. 그리고 쏟아져 나온 것은 시커먼 개들이었다. 개들은 그래로 사람들을 덮치고 들었다. "으악!", "아이고메!", "아야아야……." 대문 앞에 섰던 사람들이 비명을 토하며 쓰러지고 나둥그러지고 있었다. 송아지 만큼씩 큰 개들은 으르렁거리며 넘어진 사람들을 물어뜯고 있었다. "저, 저, 저……." "몽등이, 몽둥이 찾어!" 엉겁결에 띁어졌던 사람들은 어찌할 줄을 몰라 서로 소리 지르며 우왕좌왕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따앙! 그때 총소리가 진동했다. 순사들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베쓰, 톰, 메리! 베쓰, 톰, 메리! 잘했다. 이리 와. 이리 와." 대문 안쪽에서 이렇게 목청을 돋우고 있는 것은 하시모토였다. 출처/ 아리랑 5권

하시모토농장 사무실 내 금고 시설

이 금고 시설을 보면서 공허스님이 하시모토가 흘린 오정보에 속아 하시모토의 집을 털던 모습이 생각나는 곳입니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 넷이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밤이 깊을 대로 깊어서 잎 떨어진 실가지들을 울리는 바람 소리만 차가웠다. 담 쪽으로 몸을 바싹 붙이고 기민하게 이동하던 그림자들이 어느 집 모튱이에 멈춰섰다. "요 집이오, 아까 말헌 대로 여그넌 주재소고 면사무소가 가차운게 더 정신 채리고 조심해야 허요." 그림자 하나가 숨가쁜 듯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다른 그림자들이 억누른 소리로 대답했다. "자아, 시작헙시다. 왜놈집이라 울타리가 판자울잉게 소리 안 나게 잘 해야 허요." 그림자들은 차례로 판자울타리를 넘기 시작했다. 판자가 삐걱이거나 울리는 소리 같은 것은 일체 들리지 않았다. 하나같이 몸놀림이 날렵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무턱대고 판자끝을 잡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판자울타리의 네 모퉁이에 박은 실한 기둥을 이용해서 울타리를 타넘고 있었던 것이다, 네 그림자는 마당 쪽으로 나섰다. 그리고 집 앞으로 신속하게 다가가고 있었다, 땅! "꼼짝말어. 순사다." "우꼬꾸나 웃쏘(꼼짝 마라 쏜다)! 공허는 함정에 빠졌음을 직감했다.

아리랑 4권

김제 죽산에는 하시모토 나카바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죽은 연대가 미상인 걸로 봐서 썩 괜찮은 말로는 아니었을 거라 기대는 해봅니다. ‘그 역시 갈 때는 빈손으로 갔으리라.’ 그가 남긴 삶의 궤적 속에 적어도 인간으로서 하지 말았어야 했던 일들을 생각하며 그의 얼굴과 마주 섰습니다. 물론 입장이 달라서 기자의 느낌은 다분히 주관적, 편향적일 수밖에 없겠으나 글쎄? 꼭 그리 살았어야 했는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이 오버랩 되는 아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하시모토 농장에 걸린 하시모토 나카바의 사진과 송덕비/ 하시모토나카바 송덕 기념비는 당시 전라북도 도지사였던 손영목과 강동희가 세웠다. 비석의 뒷면에는 쓰인 그들의 이름은 자손만대 남아있을 이름이다.

정읍무성서원

'소설 <아리랑> 따라가는 인문학 기행'의 끝은 정읍 칠보 무성서원입니다. 무성서원은 소설 <아리랑>의 송수익이 의병장으로 나서는 곳입니다. 기행단을 이끈 북원태학 장현근 교수는 무성서원은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우리나라 아홉 개 서원 중 그 규모가 가장 작은 서원이지만 그 역할로는 단연 으뜸이라는 말로 무성서원을 평가했습니다. 그는 서원의 규모보다도 역할에 주목했습니다. 서원의 역할이 도학 매진하여 올곧은 선비를 길러내는 교육기관이라고 한다면 면암 최익현의 병오창의가 이루어진 무성서원이 바로 그런 곳이라 평가했습니다. 무성서원은 국난지경에 선비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이끈 역사적 소임을 다한 곳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무성서원만큼이나 돋보이는 유적이 '병오창의기적비'입니다.

​소설 <아리랑>에서 송수익이 의병에 가담하는 장면은 실재했던 태인 의병을 배경으로 했습니다. 작가 조정래는 1906년 6월 4일 이곳 무성서원에서 창의한 면암 최익현의 의병진에 소설 속 송수익의 의병을 포함시켰는데, 송수익은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단위부대의 의병장으로 면암 최익현의 의병진과 합류합니다. 송수익의 의병부대에는 지삼출, 손판석 등 외리, 내촌마을의 주인공들이 대거 참여합니다. (북원태학 소설 <아리랑> 따라가는 인문학 기행 연수 교재)

지식인이 살아가며 지켜야야할 덕목 중 최고의 덕목을 꼽으라고 한다면 기자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소설 속 송수익의 삶은 행동하는 지성입니다. 일제강점기 우당 일가를 비롯한 의암 유인석 일가와 윤희순 일가, 윤세복 형제, 홈범도, 최운산 등 많은 투사들의 삶이 그랬을 것입니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사는 일은 거칠고 험난합니다. 그것이 일제강점기 송수익의 길이며 투쟁에 나선 독립운동가들의 길이었습니다. 일제 침략으로 격변의 시기를 살았던 그들에겐 더더욱 험난한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주에서 그들이 남긴 투쟁의 흔적과 만났던 시간 시간마다 울컥했습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홉 개의 서원 중 하나가 무성서원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무성서원에서 최익현과 임병찬의 주도로 기병한 호남 최초의 의병.

개설

최익현은 1906년 6월 4일 태인 무성서원[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서 문도 80명을 모아 강회를 열고 행동을 개시하였다. 여기에 유생들 외에 강종회(姜鍾會) 등 포사(炮士) 30여 명이 참가하여 사기를 높였다. 최익현의 기병 목적은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하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및 각국 공사를 불러 담판하여 을사늑약을 파기하고, 국가의 자주권을 회복하여 민중을 일제로부터 구하는 데 있었다. 최익현은 무성서원의 강회를 기화로 봉기하여 태인, 정읍, 곡성 등지를 거쳐 순창으로 진출하였다. 1,000여 명의 태인의병이 활동에 들어가자 정부와 일제는 곧바로 대응 조치를 취하였다. 국왕은 최익현에 대하여 궁내부특진관의 직을 박탈하고 동시에 광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를 통하여 해산 명령을 전달하였다. 면암은 단호히 해산 명령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가 순창으로 출동하자 최익현은 “동족끼리는 싸울 수 없다”라며 해산을 명령하였다. 최익현의 의병이 이와 같이 당초 기대한 것만큼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하였던 것은 태인의병의 거병 목표가 전주를 거쳐 북상하여 서울에 포진한 일본 세력과 외교적 담판을 벌여 일본 세력을 몰아내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배경

을사늑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의병전쟁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과

태인의병의 영향은 전국적으로 미쳤다. 쓰시마섬에 끌려간 최익현 일행이 온갖 고초 끝에 순국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태인의병의 영향을 받아 전라남도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최익현의 뜻을 계승한 인물로 백낙구·기우만·고광순·이항선 등을 들 수 있고, 그 밖에도 강재천·기우일 등이 포함된다.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의 후손인 고광순은 태인의병에 참여하려다 좌절되자, 백낙구 등과 연합하여 의병을 도모하였고, 전남 능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양회일도 최익현의 영향을 받았다. 태인의병에 가담하였던 양윤숙도 다시 의병을 일으켜 순창을 중심으로 대일 투쟁을 벌이다 1909년 체포되었다. 임실 출신의 이석용(李錫庸)과 전수용(全垂鏞) 등도 최익현에게 사숙한 유생들로 호남 지역의 후기 의병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진주에서는 최익현의 문인 노응규(盧應圭)가 태인의병에 합류하였다가 해산된 후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태인의병이 약 1,000명이라는 의병을 모아 놓고도 이렇다 할 활동을 전개하지 못한 것은 태인의병의 절반이 유생들이었고, 무기를 소지한 자가 200~300명에 지나지 않아서 자연히 투쟁 역량이 미흡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

최익현이 의병 해산을 지시하였으나 마지막까지 최익현의 곁을 떠나지 않은 임병찬을 비롯한 고석진·김기술·최제학·문달환·임현주·양재해·조우식·조영선·나기덕·이용길·유해용 등을 일러 ‘12의사’라고 한다. 모두 체포됨으로써 태인의병은 해산되었다. 체포된 태인의병은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끌려갔다. 일제는 1906년 8월 14일 군율위반죄를 적용하여 최익현에게 쓰시마섬 감금 3년, 임병찬에게 감금 2년, 고석진, 최제학에게 군사령부 감금 4개월, 나머지에게는 태형 100대를 선고하였다. 그 후 최익현은 1907년 1월 1일 새벽에 쓰시마섬에서 순국하였다.

의의와 평가

태인의병은 상소 운동에서 무장 투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말 후기 의병의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주목된다. 또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일어난 을미의병과 달리 태인의병[병오창의]은 국권 회복을 위하여 일어난 의병이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태인의병에 참여한 사람들 다수가 독립의군부에도 가담하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병오창의 [丙午倡義]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작가 조정래의 말을 빌어 기자의 2024년 아리랑 대장정을 돌이켜 봅니다.

36년 동안 죽어간 우리 민족의 수가 400녀만! 2백 자 원지 2만 매를 쓴다 해도 내가 쓸 수 있는 글자 수가 얼마인가!

중략

용케도 2만 장을 써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과연 그 4백여만의 원혼들을 위로할 수 있을 만큼 글을 써냈는가 하는 생각이 돌이켜지기도 한다.

<아리랑 >작가의 말 중

식민지 역사 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피 흘린 모든 사람들의 공은 공정하게 평가되고 공평하게 대접되어 민족 통일이 성취해 낸 통일 조국 앞게 겸손하게 바쳐지는 것으로 족하다는 작가의 염원 앞에 또 다시 숙연했습니다.

​기자는 30년 만에 다시 아리랑 열두 권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유생 송수익이 독립운동가 송수익의 삶을 살기까지 그 궤적을 따라가며 앞서가신 분들의 고뇌를 보았습니다. 그를 따라 걸었던 김제, 만경, 군산 그리고 만주 무장 투쟁 전적지 4000km 장정에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어느 것 하나도 결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습니다. 기자가 누리고 산 지난 70년의 평화로운 시간은 결국 누군가가 산화해서 피운 생명의 꽃이었습니다.

1박2일의 '소설 <아리랑> 따라 인문학기행'을 정리하며 한 달이나 결렸습니다. 물론 기자가 가진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겠으나 작가가 쓴 글 한 자 한 자에, 스토리텔러가 기획한 여행 한 걸음 한 걸음에서 그 가치를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작동한 나름의 소심함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께 소설 <아리랑>의 고장에서 <아리랑>에 담긴 역사를 오감으로 느끼시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보았습니다.



글, 사진=권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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