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나이에도 ‘소금밖에 난 몰라’

정갑훈 명인

충남 태안군 이원면 내리 182-12


한국예술문화명인진흥회는 우리 조상의 유.무형 전통예술문화를 유지 발전시키고 명인들이 쌓아온 가치를 사회 자산으로 공유하기 위해 설립됐습니다.

현재 전국에 약 400명의 명인이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그중 충청지회 명인은 21인입니다.

이 글은 충청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명인 21인의 인터뷰 중 지난 13일 만난 소금 분야 정갑훈 명인의 인터뷰 글입니다. 명인의 지난했던 삶을 조명함으로써 미래를 잇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소개합니다.

▲ 만대솔향기염전 정갑훈 명인이 일하고 있는 모습

최고의 소금을 만들기 위해 인생을 묻다

극한 환경에서 만들어진 작은 결정체 소금. 그것은 자체만으로도 강인함과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바다 깊은 곳에서, 혹은 메마른 땅에서 수천 년의 시간을 견뎌내며 생성된 소금은 어쩌면 인생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성장한 사람의 모습과도 닮아있습니다.

나아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간이 지켜야 할 본질과 가치를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기도 합니다.

▲ 만대솔향기염전 정갑훈 명인이 생산한 소금

▲ 만대솔향기염전 정갑훈 명인이 생산한 소금

음식에 풍미를 더하는 천연원료 소금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인류와 함께 존재해 온 귀중한 식탁 위 소금은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그 안에서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줍니다.

소금의 역할은 인간관계와도 연결됩니다.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냐?”고 물었을 때, 흔히 사람들은 “빛과 소금 같은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몸 담고 있,는 어느 곳에서든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큰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소금은 소중함, 고귀함, 필요함이라는 상징성을 뜁니다. 실제로도 우리 몸에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소금입니다.

▲ 정갑훈 명인이 운영하는 만대 '솔향기염전'에 쌓아놓은 소금

소금 얘기만 하면 눈이 ‘반짝’

한때 그 많던 염전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그곳에는 일곱 가지 색깔이 변한다는 칠면초가 지천을 이루고 있습니다. 50여 년 간 소금밭을 지켜내고 있는 나는,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태 소금 끌대를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양질의 소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나를 보면서 “소금 얘기만 하면 눈이 반짝거린다”라고 합니다. 사실 저는 아직도 염전에서 손을 떼려면 20년은 족히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참 긴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1948년생입니다. 해방 이후 전쟁의 여파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 해기도 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는 식량 배급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불균형과 부정으로 인해 효과를 보지 못하여 사회적 갈등을 야기시키기도 했습니다.

▲ 성은실버요양원에서 봉사활동하는 모습

엄동설한인 그해 1월 27일, 충남 태안군 이원면 사창리에서 나는 2남 3녀 중 셋째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위로 두 명의 누님은 하늘나라로 가시고, 현재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습니다. 가족이 없어진다는 것은 세상 절반이 날아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내 나이 14살 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소중한 유언을 남기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인생이란, 실패와 성공이 공존하는 복잡한 길이라는 것을 아들에게 가르쳐준 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서른 살이 될 때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부재는 아버지 때와는 또 다른 공허함으로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나는 깊어지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했습니다.

▲ 여수 기름유출 현장 태안군자원 봉사단에 합류한 정갑훈 명인

위기가 곧 기회

일찍 아버지를 여윈 나는 14살 때부터 집안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유산과 부지런한 생활습관 덕에 배고픔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린 나이에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은 무거운 짐이 되어 어깨를 짓눌렀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속에서 늘 아버지의 유언이 나를 지탱해 주는 유일한 힘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동안, 많은 변화를 겪기도 했습니다.

19살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했고, 슬하에 남매를 낳았으며, 뒤늦은 군입대와 제대를 하며 집안 살림살이에 전념을 다 했습니다. 그 당시 고급기술이었던 소 쟁기질, 품앗이, 마을 청년 지도자, 마을 이장 등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덕분에 1980년 12월 10일, 전두환 대통령 표창도 받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잊지 못할 일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사는 만대마을로 이사 와서 세 사람과 3백만 원씩 동업으로 완도식 김 양식을 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품고 꿈을 키워나가던 중, 사업장이 모두 유실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가로림만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결과였습니다.

그 와중에 배신감도 느꼈습니다. 동업자 중 한 명이 사기를 쳤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고 났을 때의 아픔은 더 크고 무거웠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막막한 벽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벽이 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눈앞이 캄캄할 때 제2의 삶이 찾아왔습니다.

▲ 만대솔향기염전 정갑훈 명인이 일하고 있는 모습

도전정신 하나로 뛰어든 염전

친한 친구가 염전을 소개해 줬습니다. 당시 염전의 ‘염’자도 모르는 나이기에 처음에는 머뭇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때 퍼뜩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아버지의 유언이 생각났습니다. 딸린 처자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임에도 불구하고 큰맘 먹고 다시 도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또 벌어졌습니다.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힌 것입니다. 특히 아내의 반대가 가장 심했습니다.

가장으로서, 딸린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나로서는 큰 결심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안 되면 되게 하여라’라는 도전정신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새로운 길을 향해 무작정 밀어붙였습니다.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결국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가족의 사랑과 응원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 만대 솔향기염전

후회도 했습니다. 염전사업을 시작할 때, 기초 지식 하나 없는 내가 덜컥 뛰어들었으니 얼마나 낯설고 두려웠겠습니까.

햇빛에 반짝이는 소금 결정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뒤에는 고된 노동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초창기에는 기계의 도움 없이 오직 몸으로만 움직여 일해야 했습니다. 손과 발이 고된 노동에 지쳐 갔고, 소금보다 더 짠 땀방울을 흘릴 때마다 후회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염전기술자를 초빙해 배우면서 조금씩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노하우와 경험을 통해 염전의 비밀을 조금씩 익혔습니다. 힘든 과정을 통해 점차 성장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 정갑훈 명인이 염전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

자연의 깊이와 시간의 가치

40여 년간 나와 함께한 동고동락의 염전, 그곳은 나의 삶의 일부이자, 나의 정성이 깃든 소중한 공간입니다. 매일 아침, 햇살이 염전 위로 비추면 소금 결정들이 반짝이며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나는 이곳에서 천일염을 생산하며 소비자분들과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 소금 수확 체험 활동

▲ 소금 수확 체험 활동

▲ 소금 수확 체험 활동

부디 우리 염전이 잘 보전되어, 양질의 소금이 많은 소비자분에게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정성을 다해 생산한 천일염이 소비자에게 신뢰를 주고, 그들이 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큰 기쁨입니다.

하지만, 간혹 나의 진심과 노력을 무시하는 소비자들을 만났을 때면 마음 한쪽이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저는 그분들도 내가 느끼는 것처럼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누군가의 정성과 땀방울이 담긴 결과물임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소금이 지닌 자연의 깊이와 그 속에 흐르는 시간의 가치를 말입니다.

▲ 드넓게 펼쳐진 염전

▲ 정갑훈 명인 만대솔향기염전

죽는 날까지 염전 일하는 게 꿈

저는 40년이 넘을 동안, 해도 뜨지 않은 새벽부터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온통 관심은 소금입니다. 피곤하지가 않습니다. 어렵게 일군 염전인 만큼 대를 이어 ‘소금명가’로 만들려면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꿈이라면 건강한 몸을 유지하며 내가 사랑하는 염전 일을 죽는 날까지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에게 소금의 가치를 알렸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입니다.

▲ 정갑훈 명인 만대솔향기염전에서 체험활동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 송화소금

※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뽀글이님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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