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시간 전
익산 여산 가볼 만한 곳 여산 동헌 & 천주교 성지 백지사 터
익산 여산 가볼 만한 곳
여산 동헌&천주교 성지 백지사 터
익산 여산면 여산동헌에 왔습니다.
여산면 행정복지센터에 주차하고,
50m 정도 걸어 올라가면 나오는데요,
동헌 입구에 테이프가 처져 있지만,
문은 열려 있어 들어가 볼 수 있었습니다.
동헌은 네 면이 담장으로 둘러 있어
내부는 아담하지만,
과거에는 현재 여산면사무소와 여산 파출소,
여산 초등학교까지 객사 등
관아 건물들이 있을 정도로 큰 고을이었다고 합니다.
동헌 옆으로 각종 비석이 나란히 서 있는데요,
울타리로 보호되고 있는 비석도 있어 이채롭습니다.
면면을 살펴보니 군수, 부사들의 선정비입니다.
군수 선정비는 여산이 군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부사는 도호부였다는 것을 알려주는데요,
기록을 살펴보니 여산현이었다가
1436년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의 고향이어서
군으로 승격되었고
1699년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의 관향이라고 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더군요.
조선시대 2명의 왕비가 나온 고을이어서
왕비가 나올 때마다 행정구역도 승격한 것인데요,
행정구역이 승격하면 도호부 자체도 커지지만,
예속된 군현도 많아
그만큼 고을 원님도 힘이 셌을 것입니다.
수많은 비석 중 울타리 안에 곱게 모셔진 비석은
다름 아닌 흥선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입니다.
국사를 공부하면 무조건 알아야 하는 척화비인데요,
조선 후기 고종 때 고종의 부친 흥선대원군이
외국과의 통상 수교를 거부한다는 의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 200여 곳에
세운 비석입니다.
현재 전국에 30여 개 남아 있다는데요,
洋夷侵犯非戰 和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 주화주매국)이라고 쓰였습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는 것은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하자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뜻인데요,
현재 남아 있는 척화비 내용이 모두 같아
나라에서 지침을 내려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헌 건물은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입니다.
여산(礪山)은 1400년 여량현(礪良縣)과
낭산현(朗山縣)을 통합해 낭산을 여산을 속현으로
삼았다가 1404년 현재의 이름인
여산이 생긴 이름인데요
품질이 좋은 돌이 생산돼
숫돌 ‘여(礪)’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세종대왕 때인 1436년 군으로 승격된 뒤
1699년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895년 갑오개혁 때 군으로 강등되었으니
200년 가까이 종3품 도호부사가
근무했던 동헌입니다.
현재 건물은 조선 후기 들어 다시 지었다는데요,
일제강점기 들어 거의 모든 조선시대 관청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면사무소나 경찰서, 학교 등이
들어섰지만, 여산 동헌 건물은 다행히 무사했습니다.
아마도 건물을 헐지 않고 다른 용도로
사용했을 것 같은데요,
관련 기록을 검색해 보니
여산 우체국으로 사용하다가
경로당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여산 우체국 연혁을 보니
1905년 우체소를 설치한 것이 시작인데요,
1985년 청사를 신축해 이전했다고 하니
그때까지 우체국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우체소로 용도를 바꿔 사용해
동헌 건물이 무사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여산 동헌 건물 앞에는 느티나무가
빼곡하게 붙어 자라고 있습니다.
지금은 초봄이어서 아직 잎이 나자 않았는데요,
잎이 무성해지면 멀리서
동헌 건물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중 맨 오른쪽 느티나무는 한눈에 봐도
우람한 몸집이 예사롭지 않은데요
수령은 약 600살로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입니다.
세종 때 여산군이 여산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종3품 당상관이 부임하는 고을 격에 맞게
동헌 건물을 새롭게 신축하고 나무를 심은 듯합니다.
도호부(都護府)는 고려 시대부터 있던
지방행정기구로 고려 때는 전국에 5도호부가
있다가 현종 때 3도호부로 줄었지만
조선시대 들어 군 가운데 1천 호 이상이면
도호부로 승격시켜 세종 때 38읍,
고종 때 75개 읍이 있을 정도로
수가 대폭 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894년 지방제도를 개정하면서
모두 군으로 통일했다는데요,
옛 영화에 비해 동헌 건물만 댕그렇게 있어
조금 을씨년스럽기는 합니다.
여산동헌은 지대가 상당히 높습니다.
담장 너머는 단차가 3m 이상은 되어 보이는데요,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을
대량 학살한 무진박해 때 여산 인근에서 붙잡혀 온
수많은 천주교인이 고문당하고
죽어간 백지사 터가 있습니다.
여산동헌을 나와 백지사터로 가보니
순교성지 비석이 있는데요,
1866년 병인박해가 진행되는 도중
1868년 무진년에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던
처형장이라는 내용입니다.
수많은 처형 방법 중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 붙이기를 여러 번 거듭하는 동안
질식해 숨지는 것인데요,
잔인해도 너무 잔인해
놀라운 가슴 진정시키느라 힘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터는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비참하게 죽어간 현장인데요,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옷매무새를
고쳐 잡아야 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쭉 이어지는 가운데
십자가에 못이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 앞에
백지사로 운명한 천주교인을 상징한
조형물 앞에서는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물이 잔뜩 묻은 얼굴 위로 백지가
하나씩 올려질 때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천주교 성지인 백지사 터에 오신 분들
몇 분 계시던데요,
모두 한결같이 들어서면서 기도합니다.
저도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백지사 터에 들어서면서
저절로 두 손 모아 엄숙하게 바라보게 되는데요,
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슬프고도
험난했던 시기 중 하나가 바로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백지사 터를 나와 옛 여산동헌 객사와 감옥 등
관아 건물이 있었던 여산 초등학교를 가봤습니다.
학교 정문 입구부터 쭉 각종 기념비가 도열했는데요,
1907년 사립호산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1909년 여산향교 명륜당의 사립보성학교가
되었으며 1910년 경술국치 후
1912년 여산공립보통학교로 전환해 개교했으니
100년도 훨씬 넘은 명문학교입니다.
가람 이병기 박사상도 있는데요,
여산 초등학교 제38회 졸업생입니다.
동상 아래 비문은 여산 초등학교 교가로
이병기 선생이 교가의 노랫말을 만드셨는데요,
여산이 호남의 첫 관문이라는
첫 구절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1919년 3월 5일 군산에서 한강 이남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고
3월 9일 밤 익산과 완주 등 여러 산에
봉화가 피어오르고 여산은 3월 10일 새슬막에서
2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 '조선자주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앞세워 만세운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여산동헌과 백지사터를 나오면서 우연히 들른
여산 초등학교에서 가람 이병기 선생과
여산 독립만세운동 기념비까지 보게 되었는데요,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와 근대기까지
여산의 풍경이 활동사진처럼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유익한 여산 여행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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