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일 전
이순몽장군의 흔적을 만나보는 역사여행, 영천 숭렬당에서 만나봤습니다.
“이순몽 장군의 흔적을 찾아 숭렬당에 왔어요!”
안녕하세요. 새영천알림이단 이종진입니다. 영천은 교통의 요충지로 예로부터 그 중요성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대구와 경주를 이어주는 대로로 금호강이 흐르고 있어 역사적으로 많은 유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우군 우절제사 이순몽장군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로 이곳 숭렬당에서 말이죠.
숭렬당 앞에는 숭렬공원으로서 자리잡고 있습니다.
영천시민에게는 휴식터의 역할을 하며 지나가는 이들에게도 휴식터를 제공합니다.
몇몇 벤치와 산책로가 있고 여러 나무가 식재되어 있어 꽃 구경하기도 좋습니다.
겹벚꽃도 피어있어 봄을 알려주네요.
숭렬공원에서 우측으로 돌아 걷다보면 만나는 시비가 있습니다. 이순몽 신도비와 개선 송덕시비가 있습니다.
신도비란?
신도비는 한 인물의 평생 업적과 삶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입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죽은 이가 생전에 남긴 공로나 덕망을 기리는 목적으로 비를 세우는 제도가 발달했는데,
특히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 이후로는 공을 세운 인물이나 훌륭한 정치를 펼친 사람이라면
모두 돌로 된 비석을 세우는 풍습이 자리 잡았습니다.
신도비라는 명확한 형식은 중국의 진송 시대, 즉 5세기 초에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황제나 제후들의 무덤 앞에는 '○○신도지비'라는 이름으로 비석이 세워졌고,
점차 그 내용이 발전하며 후대의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기록을 담게 되었죠.
신도비는 일반적으로 묘의 동남쪽 방향에 세워졌습니다.
이는 지리학적으로 동남쪽을 ‘신도’라고 칭했기 때문인데,
실제로 후한 시기에는 무덤 앞에 길을 내고 석주를 세워 표시하던 것을 신도로 불렀으며,
이후에는 그 자리에 비석을 세우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전통은 이어져 조선시대 왕릉을 중심으로 신도비가 세워졌습니다.
대표적으로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신도비, 세종대왕의 영릉 신도비가 있습니다.
왕들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사대부들 중에서도 위대한 공적을 남긴 이들,
혹은 도덕적, 학문적으로 뛰어난 이들의 묘 앞에는 신도비가 세워졌습니다.
이런 신도비는 7~8척에 달하는 큰 비석이며, 거북 모양의 받침(귀부) 위에 올려져 있고,
용의 머리를 한 이수(머릿돌)로 웅장함을 더합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정2품 이상의 관직을 지냈고,
공훈과 학문적 업적이 탁월해 후세에 귀감이 될 인물이라면 왕보다도 더 위대한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신도비를 세우는 일이 흔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에는 사대부를 위한 신도비가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수없이 많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전국에 여행하다보면 만나는 여러 신도비가 있습니다.
유명한 역사적 인물이라면 신도비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신도비는 누가 글을 적고 누가 만들기도 하는 것도 기록을 남기도 합니다.
이순몽 장군은 무장으로서 큰 역할을 했기에 이런 신도비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산수유는 예로부터 약재로 널리 쓰여온 나무입니다.
특히 그 열매는 한방에서 귀하게 여겨졌죠.
‘수유’라는 이름에는 ‘지키고 간직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산수유 나무는 오래도록 무언가를 기억하고 싶은 마음을 닮은 것 같습니다.
그런 산수유꽃이 한 사람의 삶을 기리는 신도비 아래 피어 있으니, 더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영천 숭렬당은 보물 제521호로 조선 세종 15년 1433년에 건립된 중국식 건물입니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과는 다른 양식으로 그 구조와 형태가 아름답고 특이한 형태입니다.
세종 원년 대마도 정벌과 야인 토벌 등에 혁혁한 공을 남긴 복장군, 명장 위양공 이순몽 장군이 평소 기거했던 집입니다.
현재는 장군의 위패를 받들고 봄, 가을에 제사를 드리고 있는 곳입니다.
중국식이라고 하니 우리나라 건축물과는 어떤 점이 다를까요? 정면은 5칸 규모 측면, 3칸 규모로 다소 큽니다.
이 현판은 영천 향사당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향규를 적어놓은 것으로서,
광해군 6년(1614) 복재 정담(1552~1634)이 지었으며,
크기는 가로 126cm, 세로 32.5cm로 총 1,091자가 음각되어 있습니다.
향규는 전문과 규약 10조 및 후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은 17세기 초 영천 사림의 전란 후의 사회 기강을 확립하려는 의도를 집약하고 있으며,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조선시대의 향촌사회가 변화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숭렬당 안에는 이순몽 장군의 묘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 세종 대의 무신 이순몽(1386~1449)의 묘입니다.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공세리 산28-3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9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순몽은 경북 영천 출신으로 1417년 무과에 급제하고 세종 1년(1419)에 우군절제사로 임명되어 대마도 정벌에 참전했습니다.
대마도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하여 조정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패배한 상황 속에서도 결정적 승리를 거두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후에는 만주 지역의 야인 정벌에도 나서 판중추부사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영중추원사에 이르렀습니다.
이순몽의 묘는 조선 초기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됩니다.
2층으로 구성된 장대석으로 만든 상석이 있고, 앞쪽에는 문인석, 무인석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특히 문인석과 무인석이 2쌍씩 총 4기가 세워진 점이 특징입니다. 이는 후대가 세운 것으로 추정됩니다.
영천의 인물이지만 무덤은 양평에 있습니다.
양평으로 여행가보신다면 영천의 역사흔적과 양평의 역사흔적을 함께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글귀가 걸려있습니다.
유적지에는 현판과 시판 등 다양한 글귀가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한글과 한자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네요.
뒤편에는 사당입니다. 서원이냐 향교처럼 뒤에 사당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곳에서는 이순몽 장군의 위패를 이곳에 모시고 있습니다.
봄에 찾아온 영천 숭렬당. 이곳은 영천강변공원과 가까워 걸어가며 만나기도 좋은 역사 유적지입니다.
영천의 인물인 이순몽 장군의 흔적을 만나봤는데요. 영천은 무장이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다음에도 역사여행을 해볼텐데요. 영천의 역사기행기 블로그에 많이 올라오니 많은 관심 바랍니다.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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