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과 폐쇄를 반복... 1678년 초량왜관 조성

1783년 변박의 왜관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왜관이 부산에 설치된 것은 1407년 7월 이후이며, 1547년까지는 제포[현 창원시 진해구], 염포[현 울산시 염포동] 등지에도 왜관이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16세기에 왜변이 잦아지면서 대일 통제책의 일환으로, 조선은 왜관을 한 곳으로 줄였습니다.

1547년 이후에는 부산포왜관[현 부산시 동구 범일동 일대]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왜관 폐쇄는 물론 두 나라의 국교는 단절되었습니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서 국교 재개를 희망하는 사절을 조선으로 보내었습니다. 일본 사절은 전쟁 직전 유일하게 왜관이 있던 부산포로 입항하였습니다.

조선전기 부산포왜관은 이미 조선의 군대가 주둔하는 부산진성 부지에 포함이 되어 또 다른 왜관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1601년 절영도왜관이 조성되었고, 1607년 부산진성과 멀지 않은 곳에 두모포왜관을 새로 조성하고 절영도왜관은 폐쇄하였습니다.

10만 평 부지에 세워졌던 일본과의 교류 공간

「조선도회」 속 왜관 (출처 : 일본 교토대학 도서관)

70년이 지나 1678년 초량왜관을 다시 조성하고 두모포왜관은 폐쇄하였습니다.

초량왜관은 1678년 현 부산시 중구 중앙동, 광복동, 동광동, 대청동 일대, 두모포왜관보다 규모가 10배에 이르는 약 10만평 부지에 세워졌던 일본과의 외교와 무역의 공간입니다. 조선후기에는 한반도 내에서 유일하게 교류 공간으로 존재했습니다.

외교와 무역을 위해 조선인과 일본인이 왜관 안팎에 거주하게 되면서 두 나라 사람들의 생활공간이자 교류공간이 되었습니다.

소중한 역사자원으로 기억되는 초량왜관

초량왜관 표지석(용두산공원)

초량왜관은 약 200년간 조선과 일본의 교류 공간으로 유지되었고, 1876년 개항 이후 그 부지는 일본인전관거류지로 변하였습니다.

일본 근대문화가 이식되고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이곳이 부산의 ‘중구’가 되었고, 조선시대 초량왜관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200년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존재하였기 때문에 남겨진 수많은 문헌과 그림, 비석으로 초량왜관을 조망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개항 이후 용두산 주변 초량왜관 터 (출처 : 김동철 소장)

그리고 지명으로 남겨져 있는 것처럼 부산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초량왜관은 존재해 왔습니다.

부산이 과거 갈등과 전쟁만 존재한 것이 아니고 평화와 교류의 도시로 그 역할을 하였고, 세계화가 심화되는 오늘날에도 평화와 공존의 가치를 가진 도시임을 나타낼 수 있는 역사자원이 초량왜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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