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용인시 SNS 시민 서포터즈가 취재한 기사입니다."

안녕하세요.

용인시 SNS 시민 서포터즈 취재기사 김종석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어디서 많이 들어 보신 시가 아닌가요?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많이 보던

포은 정몽주선생의 ‘단심가’ 입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고려말의 학자로

공민왕 9년(1360년) 과거에 장원급제 이후

오부학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향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다졌던 분으로

학문의 대가이면서 외교, 군사, 행정, 인품

모든 면에서 뛰어났던 분입니다.

그는 고려말 혼란기 속에서도

백성을 위한 제도개혁에 노력하였으며,

왜구토벌 및 왜구에게 끌려간 백성들을

구해 오기도 하였답니다.

그러나 이성계 세력이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 하려하자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의 역성혁명에 반대하다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에 의해

개성 선죽교에서 안타깝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이렇듯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능력과 업적에 더해

충절까지 겸했기에 후대에 그의 평가가 높은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용인특례시에서는 이러한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수지구를 관통하는 국도를 ‘포은대로’로 부르고 있으며

수지구에 위치한 대규모 문화시설인

포은아트홀과 포은아트갤러리는

정몽주선생의 호를 따서 지었습니다.

포은아트홀에는 정몽주선생의 동상도 세워져 있답니다.

이렇듯 충절의 표본인 포은 정몽주선생의 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곡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포은 정몽주선생의 묘역 입구에는

안내문과 안내도가 있어서

묘역을 이해하는데 편하게 되어 있답니다.

묘역 입구 좌측에는 종각처럼 아담한 건물이 있는데

이는 정몽주선생의 신도비입니다.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입니다.

입구 우측에는

조선시대 학자 저헌 이석형 선생을 비롯한

연안 이씨 선조들의 신도비, 비각, 행적비들이

넓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포은 정몽주선생의 묘역에

뜬금없는 인물이 있어서 의아할 수 있을 텐데요.

저헌 이석형 선생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조선 최초로 세가지 과거(생원, 진사,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삼장원’으로 불릴 만큼

지식이 출중한 관료였으며,

정몽주선생의 증손자의 사위라고 합니다.

연안 이씨 후손 중에는

이후에도 출중한 인물들이 많이 나와서

명문가로 알려졌다 합니다.

묘역 입구를 조금 지나면

좌측에 한 채의 아담한 한옥 건물이 보일 것입니다.

여기는 다름 아닌 화장실입니다!

만약 한옥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화장실이 있었다면

어딘가 어색했을 텐데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서

보기에도 좋습니다.

묘역 입구에서 위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다 보면

경모사, 모현당, 영모제 등 건물 3동이 있습니다.

정몽주선생의 제실인 영모제

묘를 관리하는 경모사,

그를 기리기 위한 곳으로

충신을 사모한다는 뜻의 모현당이 보입니다.

이곳을 둘러보면 좋을 것 같으나,

아쉽게도 관리상의 문제로 인해 문이 닫혀 있어요.

건물을 지나쳐 가면

신성한 곳을 표현하는 홍살문이 묘역 입구에 있고

홍살문 뒤에는 선죽교 모형을 본 뜬

개울가의 다리가 있습니다.

아마 선죽교를 표현하고자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홍살문 옆으로는 정몽주선생의 동상

단심가 비석이 있습니다.

위엄 가득한 동상 앞에 서니 마주하는 근엄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면서

겸손해지는 자신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동상 옆에는 단심가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단심가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이성계의 세력으로 끌어 들이고자 할 때

주고받은 시조라는 건 아시죠?

다음은 이방원이 정몽주선생을 회유하려고 지은 시조

하여가’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

이에 대해 정몽주선생의 답시, ‘단심가’ 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단심가로 그가 굳은 절의를 보임으로써

결국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지만

그의 충절은 후세에 길이길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단심가 옆에는 또 하나의 비문이 있는데요.

바로 ‘백로가’ 입니다.

이는 정몽주선생의 모친께서

아들이 이방원의 연회에 부름을 받고 나가려 할 때

행여 간신이나 역모의 무리와 어울리지 말라는 의미로

은유적인 표현을 써서 아들에게 훈계한

교육적인 시조라고 합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세올세라

청강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모친까지도 절개가 굳었다는 생각에

절로 숙연해지는 마음을 안고

홍살문을 지나서 올라 가면 연못 하나가 나옵니다.

연못 안에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 것은

정몽주선생과 이석형 선생,

두 분을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연못을 지나게 되면

오르막 위에 오늘 보고자 했던 묘역이 보입니다.

우측은 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

(지방문화재 제171호) 입니다.

중앙에는 정몽주선생의 묘

(지방문화재 제1호)가 있습니다.

다소 소박한 이석형 선생의 묘에 비하면

문인석과 담장까지 갖춰져 있는 게

어느 고관대작의 무덤에 버금갈 정도로

크고 화려해 보입니다.

조선시대에 복권되면서

무덤 또한 대단히 크고 화려하게 단장되고

다듬어진 것이라 합니다.

정몽주선생이 조선 건국은 반대했으나,

효와 충절을 강조한 조선의 유교사회에서

정몽주의 행동은 본받을 만하였기에

태조 이방원이 그의 신원을 회복시키고

영의정까지 추증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추증: 죽은 사람의 관직을 올려 주는 것)

그러나 특이하게 정몽주선생의 묘비에는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의 시호는 쓰지 않고 있습니다.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

(高慮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

이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합니다.

조성에서 영의정까지 추증되었는데도

묘비명에서조차 조선의 시호를 쓰지 않는 점에서

그의 충절이 더욱 잘 와닿는 것 같습니다.

정몽주선생의 묘 좌측으로는 설곡공의 묘가 있습니다.

설곡공은 정몽주선생의 장손인

설곡공 정보를 말합니다.

정몽주선생의 묘를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마주친

정몽주선생의 동상 뒷모습입니다.

그의 근엄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새삼 효와 충절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가정의 달 5월에 자녀와 함께

포은 정몽주선생의 묘역을 돌아보면

좋은 교훈을 얻어가지 않을까 합니다.

추가 정보

포은 정몽주선생의 묘역은

해설사와 함께 돌아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미리 예약(1577-1122)을 하시거나,

관광해설안내소에서 당일 신청도 받아 준다고 합니다.

해설시간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0:00~16:00로 제한이 있으나,

시간외에도 융통성 있게 진행한다고 합니다.

해설사와 함께 한다면 더욱 알찬 관람이 될 수 있으니

언제든 문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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