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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전
막걸리 한길만 걷는다 60년 전통의 한길주[2025년_2월호]
막걸리 한길만 걷는다
60년 전통의 한길주
전국 곳곳에 저마다의 개성을 입은 로컬 양조장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한길주는 여주의 소규모 양조장이지만, 전국적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브랜드다. ‘막걸리 한 길만 걷겠다’는 사훈이 담긴 한길주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글 두정아 사진 김성재
서민의 애환 달래 온 추억의 막걸리
“민속주점에서 막걸리를 시키면 작은 항아리나 주전자에 가득 담겨 나오곤 하죠. 많은 분이 ‘옛날에 먹던 바로 그 맛’이라고 하십니다. 한길주 막걸리는 바로 추억의 맛입니다.”
1965년부터 지금까지 막걸리 생산의 한길만을 걸어왔다. 여주 대신면의 한길탁주제조장에서 만난 이병복 대표는 한길주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술’이라고 했다. 그는 2006년부터 사업을 이어받아 한길주의 명맥을 잇고 있다.
“오래전 민속주 도매업을 했었어요. 90년대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술이라는 술은 다 맛봤지요. 한길주는 많이 마셔도 속이 편안하고 잔향이 깔끔해 좋아했던 술입니다. IMF가 터지면서 술 소비가 늘었는데, 당시 한길주 막걸리의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부담 없는 가격으로 술을 즐길 수 있어 불티나게 팔리곤 했지요.”
젊은 시절, 서울 대학로에서 연극배우로도 활동했던 이 대표는 소문난 애주가였다. 특히 민속주점에서 먹는 막걸리와 파전을 좋아했다. 꿈을 접고 민속주 유통업을 시작하게 된 것도 ‘고단한 농부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농주’처럼 막걸리 한잔에 위로받던 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직접 막걸리 제조업에 뛰어든 것은 단순히 애주가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건강이 좋지 않은 아내를 위해 물 맑고 공기 좋은 여주에서 지내면 좋겠다는 마음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한길주는 쌀이 아닌 밀로 만든 막걸리다. 1960년대 양곡소비 절약을 위해 양조에 쌀을 이용할 수 없던 시절, 밀막걸리는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며 빈자리를 채웠다. 밀막걸리는 현재 일부 양조장에서 소량만 생산되며 추억의 맛을 찾는 고객들을 만나고 있다. 이 대표는 “밀막걸리 특유의 묵직한 바디감과 은은하고 구수한 맛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이 찾으신다”라고 말했다.
전국에서 맛볼 수 있는 한길주
한길주에서 출시되는 제품은 생막걸리와 좁쌀막걸리 두 종류다. 생산량은 월평균 1,000~1,500박스. 로컬 양조장이지만 유통은 전국구다.
“제가 인수할 당시 여주에는 능서와 북내, 흥천까지 총 4개의 양조장이 있었어요. 대신면은 인구가 5,000명 정도였던 터라 관내 소비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시야를 좀 넓혀 전국적으로 유통을 한 것이지요. 한때는 인천과 속초, 부산, 전주, 대전 등 15곳에 대리점이 있었습니다만 현재는 5개 지점만 운영 중입니다.”
이 대표는 “우리는 마트보다는 식당이 주 유통처이기 때문에 경기 침체를 바로 알 수가 있다”라며 “꽁꽁 언 소비심리로 외식 상권이 침체되면 함께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막걸리는 입국부터 발효까지 제조 공정을 일일이 사람 손으로 해야 하는 수고스러움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된다. 밑밥을 만드는 첫 과정부터가 녹록지 않다. 커다란 솥에서 밀가루를 쪄낸 후 골고루 섞어주는데, 이 대표는 “잘 쪄지면 젤리같이 되지만 잘못 찌면 돌처럼 딱딱해진다”라고 했다. 2017년 먼저 세상을 등진 이 대표의 아내이자 작가였던 고(故) 조인선 씨는 산문집을 통해 남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직접 술을 빚게 된 남편은 신이 나서 1년 반 동안 양조장의 골방에서 먹고 자며 일을 배웠다. (중략)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술을 빚는 일은 고된 작업이었다. 돈을 벌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했다면 벌써 집어 치워버렸어야 했건만 남편은 그 일을 10년째 고집스럽게 해내고 있다. (중략) 남편은 자기의 모든 감각을 이용해서 그 온도를 느낀다. 때론 기도하듯 눈을 감기도 한다.” (‘선인장-술 빚는 남자’ 中)
여주에서 제일가는 막걸리를 꿈꾸며
한길주는 ‘선주문 후생산’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양조장에 재고가 거의 없는 이유다. 입소문을 듣고 양조장까지 찾아온 고객이 빈손으로 발길을 돌리는 경우도 가끔 일어난다. 여주 관내에서는 축협이나 농협 마트에서 낱개 구입이 가능하며, 타 지역민의 경우 택배 주문을 하기도 한다. 3년 전부터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는 이 대표의 둘째 아들 예일 씨는 “옛날 막걸리 맛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고정적으로 찾으신다”라며 “택배의 경우 박스로만 판매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한길주를 더 알리기 위해 지역 축제나 행사장에 홍보를 나가기도 합니다. 아쉽게도 여주 지역분들 중에서 아직 한길주를 모르는 분들이 많이 계세요. 식당 중심으로 유통됐기 때문에 일반 소비자분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일단 여주 관내에서 우리 이름을 확실히 알리는 것이 첫 번째 목표입니다. 나아가 전국적으로도 큰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열 씨의 바람이 담긴 말이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제품 출시에 대한 고민과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이 대표는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음식을 맛보다는 눈과 귀로 판단하는 경향이 짙은 것 같다”라며 “그만큼 브랜드의 가치가 주목받는 시대”라고 했다.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가야 할 노력도 필요하겠지요. 마케팅이 참 중요한데, 우리처럼 작은 양조장에서는 한계가 있어요. 곧 은퇴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어떤 변화를 모색해야 할지 고민이 많습니다.”
영하 10도의 추운 날씨, 부자(父子)는 흰 입김을 뿜으며 또다시 작업복을 입었다. 막걸리 한길을 걷겠다는 우직한 발걸음은 다시 시작됐다.
그때 그 시절
양곡소비 절약과 밀막걸리의 등장
1960년대 농가들의 식량 사정은 일제 강점기 때에 비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범국민적인 절미 운동과 혼·분식 운동을 추진해 부족한 양곡을 보충하고자 했다. 절미란 말 그대로 쌀을 절약한다는 뜻으로, 혼·분식 운동은 보리, 콩, 조 등 잡곡을 섞은 혼식밥과 밀가루 음식 먹기를 권장한 운동이었다. 처음에 자발적인 캠페인 성격으로 시작된 혼·분식 운동은 계몽 활동에만 머물지 않고 단속을 통해 강제성을 띠었다. 학교에서는 교사가 학생들의 도시락을 검사해 쌀과 보리의 혼합 비율을 확인했고, ‘양곡소비 절약에 관한 행정명령’을 통해 음식판매업자, 양곡매매업자, 양곡가공업자를 통제했다.
양곡소비 절약을 강화하기 위한 시책으로 1963년에는 서민들의 술인 막걸리 제조에도 백미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사용 원료의 2할 이내로 백미 사용을 허용했다가 추후 전면 금지했다. 이 시기에 막걸리는 밀가루와 잡곡 등으로 제조됐다. 1977년 크게 풍년이 들어 쌀 수확량이 사상 처음으로 4,000만 석을 돌파하며 식량 수급이 가능해지자 쌀막걸리를 허용하는 행정조치가 내려졌고, 14년 만에 쌀막걸리가 다시 등장하게 됐다. (출처 국가기록원)
한길주
경기여주시 대신면 여양로 14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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