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열 작가

수영하고 조개잡고 달리기하며, 언제나 즐거웠던 일산해수욕장

울산 동구 일산동에 있는 일산해수욕장은 백사장 면적 90㎢ 길이 600m 너비 40~60m 평균 수온 차 21.2도 수심 1~2m 대왕암공원 입구에 있다. 그리고 주변에 현대중공업이 위치해 있다. 깨끗한 모래로 된 사빈 해안으로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하며 반달처럼 생겼다. 어촌인 일산마을에서는 해마다 마을의 전통 행사인 일산진 풍어제를 100년 넘게 해오고 있다.

옛 일산해수욕장의 모습 (그림 : 김광열 작가)

어릴 적 일산지 마을하면 백사장도 좋았지만 먼저 조개가 떠오른다. 일산지 마을 아이들은 백합조개, 맛조개를 잡아 학교 교실까지 가져와서 자랑하곤 했다. 가져온 조개는 껍질이 빛이 나서 윤기가 있고 아래위 껍질 사이로는 조갯살이 나와 보였다. 긴 막대기처럼 생긴 맛조개는 싱싱하게 살아서 연붉은 조갯살이 보였다. 내가 사는 동진마을 바닷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일산지 마을 해변에는 엄청 많다고 그곳에 사는 친구가 말했다.

“그래! 그 말이 참말이제? 학교 수업 마치고 일산지 바닷가에 가서 확인해보자.”

그 자리에서 바로 약속하고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반갑게 울리고 우리는 단숨에 일산지 마을 바닷가로 달려갔다.

책보자기를 백사장 위에 내팽개치고 신발을 벗고 바지는 걷어 올리고는 모래사장을 지나 물속으로 몇 걸음을 걸어서 들어갔다. 먼저 일산지 친구가 바닷속을 안내하면서 들어가고 내가 뒤따라 들어갔는데 1~3m 앞 바닷속에 펼쳐진 모습은 대단했다. 맑은 바닷물 속 여기저기에서 백합조개가 모래 속에 반쯤 나와 있었고, 그 옆에는 맛조개가 모래 위로 올라와서 모래를 품어대면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내 뒤를 따라 들어오던 친구는 물이 차갑다고 들어오다가 나가버렸다. 당시 일산해수욕장은 왜 그렇게도 물이 차갑던지 뼛골이 시릴 정도였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니 일산지 바닷가는 백합조개와 맛조개로 덮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가 1960년대 후반이었는데, 당시 환경이 살아 숨 쉬던 순도 99%의 일산지 바닷가 모습이었다. 우리가 조개를 확인한 그곳은 해수욕장 사거리에서 바닷가 쪽으로 흐르는 대송천 바로 우측이었고 그곳이 학교에서도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곳이 없어졌다.

일산지 친구들 하면 떠오르는 것이 또 있다. 달리기와 운동장이다. 당시 운동회는 전교생의 축제다. 기마전과 텀블링, 줄 당기기와 오자미(콩이나 모래를 집어넣은 ‘놀이주머니’) 던지기도 있었지만, 하이라이트는 가을하늘에 펄럭이는 만국기 아래서 벌어지는 단거리 100m 달리기와 릴레이경기다. 100m 달리기는 운동장 한 바퀴를 도는 경기인데 6, 7명의 선수가 출발선에 서 있다가 출발신호와 함께 힘껏 달린다.

3, 4, 5 등은 달리다 힘이 점점 빠지는데 1, 2 등을 달리고 있는 선수는 힘차게 치고 나간다. 그들이 바로 일산지 마을 출신들이다. 릴레이 계주도 마찬가지다. 일산지 마을 출신 아이들이 완전히 휩쓸어 버렸다.

왜! 그럴까. 동진, 화진, 월봉, 대송, 번덕, 배산시, 오자불에 사는 아이들은 100m 단거리 1, 2 등에는 들지 못했다. 필자가 2~3학년일 때 5, 6학년 선배의 달리기는 대부분 일산지 출신들이 1등을 차지했다. 일산지 마을에는 평소 달리기 연습을 할 수 있는 훈련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자연 훈련장이 바로 길게 뻗은 길이 600m 모래 백사장이다. 달리면 조금씩 모래가 내려않는 느낌일 텐데 운동장 맨땅 위에서 달리니 더 잘 달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모래사장에서 기초훈련이 다져진 아이들에게는 맨땅에서의 달리기는 그저 먹기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일산지 마을 친구들은 남녀 모두가 달리기를 잘했다.

비교적 조용했던 당시 일산해수욕장의 여름은, 동구 주변 해안가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일명 놀이 배 오아시스 보트가 있었다. 양쪽에 고정된 작은 노를 저을 수 있게 만들었고, 뗏마 배의 4분의 1 정도 크기의 아주 작은 배로 2명이 앉으면 딱 맞았다. 호흡을 잘 맞춰 노를 저으면 빠르게 갈 수 있도록 배 폭에 비해서 날렵하고 길었다. 여름 바다 백사장 해안에서 한 쌍의 남녀가 타고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해수욕장 한두 곳에서는 네다섯 척 정도의 배를 소유하고 영업한 업소도 있었다. 1시간짜리, 2시간짜리로 구분해 대여했는데, 그 보트가 오아시스 보트다. 한번 타보고 싶었는데 대여비가 없어 그냥 구경만 하곤 했다. 배의 앞머리에는 배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백조 No.1부터 백조 No.5까지가 나란히 보였다.

이런 방식의 영업은 약 10년 정도 지속되었다. 그 후 70년대 후반부터 공기 넣는 튜브와 모터보트가 등장하면서 더 이상 일산해수욕장에서 오아시스 보트를 볼 수가 없었다. 이것이 1970년 초 현대중공업이 들어오기 전의 일산지 해수욕장 여름 풍경이다.

현대중공업, 현대 자동차가 생긴 후부터 울산에 인구가 늘면서 일산지 해수욕장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곳에서 유명 가수가 출연하는 해변 노래자랑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1974년 발표된 히트곡 <나에게 애인이 있다면> 연이어 75년 초 발표된 인천 출신 가수 박상규의 <조약돌>이 해변에 울려 퍼졌다.

“꽃잎이 한잎 두잎 바람에 떨어지고 / 짝 잃은 기러기는 슬피 울며 어디 갔나 / 이슬이 눈물처럼 꽃잎에 맺혀 있고 / 모르는 사람들은 제 갈 길로 가는구나 / 여름 가고 가을이 유리창에 물들고 / 가을날에 사랑이 눈물에 어리네 / 내 마음은 조약돌 비바람에 시달려도 / 둥글게 살아가리 아무도 모르게

아무튼 1970년대 중반까지는 울산 동구 일산해수욕장의 생태계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옛날의 백합조개, 맛조개 등은 찾아보기 힘들다. 관계기관에서는 소홀함이 없도록 철저히 환경관리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 대왕암소식지 2024년 여름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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