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한 자산

실학의 비조라 불리며 『반계수록』 저자로 잘 알려진 유형원이 부안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아는가? 한양에서 나고 자란 양반 가문 출신이 어떻게 부안과 인연을 맺었을까. 서둘러 ‘부안’ 하고도 우반동(현 우동리)으로 길을 나선다.

그의 생애

반계 유형원(1622~1673)은 한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유흠은 광해군 복위 사건에 휘말려 26세 나이에 옥사한다. 그의 나이 한 살 때 이야기다.

그는 외숙부 이원지, 고모부 김세렴에게 학문적 영향을 받는다. 15세에 병자호란을 겪으며 조부모와 어머니를 모시고 강원도 원주로 피난 간다. 16세에는 부사 심은의 딸과 혼인하고 고모부 김세렴을 따라 함경도 등 북방 지역을 살핀다. 이후 진사 시험에 합격하지만 문과 급제는 번번이 떨어진다. 과거를 포기하고 31세에 부안현 우반동에 정착한다. 그곳에서 20여년 동안 『반계수록』을 저술하고 1673년 51세 나이로 사망한다.

우반동이 안긴 생각들

유형원은 31세에 조부 유성민이 소유한 땅을 경영하기 위해 부안 우반동으로 향한다. 사실 그의 낙방은 극심한 당쟁 탓이었다. 북인 계열이던 아버지의 죽음이 출셋길을 막았다. 두 번의 전란에도 반성은커녕 권력에 아부하는 관료와 양반을 보며 스스로도 정치에 염증을 느낀 터였다. 그러니 부안행은 자연스러운 결과였을 것이다.

“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 / 바닷가 곁에서 몸소 농사지으려고 <중략> 모래 위 갈매기 놀라지 않고 날지 않으니 / 저들과 어울려 함께하며 살아야겠네”

유형원이 우반동에 내려와 쓴 시 〈부안에 도착하여〉를 통해 그간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반동의 현실도 밝지 않았다. 곡창지대 수탈이 심해서다. 그렇게 탄생한 『반계수록』은 개인적 성취를 넘어 조선 후반 실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부안의 지지로 펴낸

유형원이 20여년 우반동 생활에서 주력으로 삼은 일은 『반계수록』을 통해 두 번의 큰 전란을 겪고도 반성하지 않는 권력자들을 비판하고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반계수록』 1~8권은 국가 운영과 토지제도를 서술했다. 국가가 농민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고 조세를 환수하는 균전제를 주장했으며 자영농 육성도 강조했다. 9~12권은 교육과 과거제도, 13~18권은 관직의 정비이다. 19~20권은 관료의 봉급 문제, 21~24권은 국방과 군사제도를 담았다. 25~26권은 속편으로 앞에서 다룬 주제 외의 추가적인 개혁 방안 등을 담았다.

어디든 진흙에 묻힌 보물을 알아보는 밝은 눈이 있게 마련이다. 배상유, 양득중은 『반계수록』의 가치를 조정에 알렸다. 그 결과 영조 46년(1770)에 출간됐고, 정조는 그의 성제(成制) 이론을 토대로 수원화성을 축조한다. 호 반계는 우반동의 옛 지명이다. 유형원의 학문적 성과가 우반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걸 알았으니, 부안에 가면 떠오를 것이 하나 더 늘었다.



글, 사진 = 전북특별자치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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